조글로로고
김녕일 원사, '바이러스 연구는 나의 숙명'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월15일 20시52분    조회:502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녕일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의학과학원 군사수의연구소 바이러스학 전문가 김녕일 원사

김녕일(金宁一), 세간에 별로 흔치 않는 이름이었다.

김녕일은 그의 이 이름에 명인의 영상이 비껴 있다고 말했다.

"저의 생일이 러시아공산당의 수령 레닌(列宁)과 하루 차이가 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인데요."

그래서일까, 김녕일의 이름은 시초부터 그만의 독특한 기운을 뿜고 있는 듯 했다.

어릴 때 그는 골목대장으로 동네 곳곳을 누비던 개구쟁이 소년이었다. 훗날 그는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의학과학원 군사수의연구소 바이러스학 연구원이자 전문가로 된다.

정말로 이름에 담은 부모님의 서원(誓願)이 발현된 걸까? 김녕일은 60 고개를 앞둔 지난해 말 중국공정원 원사로 선정된다. 원사는 국가에서 설립한 과학기술 영역의 최고의 학술칭호로 종신영예이다.

사스, 조류독감, 에볼라, 메르스 등등. 인류는 거듭되는 전염병을 치르면서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를 충분히 실감했다.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인류가 안고 가야할 지속적인 과제로 되고 있다.

"바이러스에 강한 백신을 만들어서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석사공부 할 때부터 연구방향을 이쪽으로 선정했습니다."

김녕일은 바이러스와 시작된 그의 특이한 인연을 이렇게 말한다. 그때부터 김녕일은 연구실에 터를 잡고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와 새로운 발견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세계 3 대 과학저널인 '네이처 (Nature)', "사이언스(Science)", "셀(Cell)"에 논문을 싣는 것은 모든 과학자들의 소원이다. 김녕일은 상기 간행물에 유수의 논문을 수록하면서 일찌감치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김녕일이 그동안 각종 전문 간행물에 발표한 논문은 무려 600여편에 달한다. 그러나 원사를 신청할 때는 줄여서 400여편으로 줄이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논문 숫자가 너무 많아 제 자랑을 떠들썩하게 늘여놓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길림성 성장과 당위서기의 회견을 받고 있는 길림성 籍  원사들(김녕일 원사 우3)

지난 32년 동안 김녕일은 18종 바이러스의 특성과 병원체 특성, 면역기능 등을 연구했으며 3종 바이러스 단백질발현 벡터 계통의 플랫폼을 구축했다. 이런 실적으로 하여 김녕일은 2012년 국가과학기술진보 1등상을 수상하며, 2014년 8월 습근평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서명과 지시로 2등공을 기입받았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은 것은 부모님의 엄격한 교육과 계몽교사를 포함해 바른 가르침을 준 모든 은사들, 그리고 든든한 친구들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김녕일은 원사 칭호를 받는 순간 눈앞에 떠오른 건 부모님과 은사, 친구들이였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 김녕일은 대자연의 이런저런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부친으로부터 문제의 해답을 흥미진진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도그럴 것이 부친은 연변대학 물리학과 제1기 졸업생으로 통화(通化)에 물리교원으로 있었다. 교사인 부모는 엄격한 훈육으로 개구쟁이 아들을 학문의 길로 인도했다. 1974년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마친 김녕일은 그때 그 시절의 하향 붐에 떠밀려 통화 부근의 마을에 '재교육'을 받으려 내려갔다.

그는 집체호 친구들과 다락밭을 만들고 관개수로를 뚫으면서 손에 진흙이 마를새없이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릴 때 '골목대장'을 하듯 민병 중대장을 맡던 이야기는 이때 생긴 에피소드이다.

에피소드는 그런 '자랑' 뿐만 아니었다.

"옥수수밥으로 끼니를 에우던 때였는데요, 돌아서면 금방 허기가 졌죠."

육체의 배고픔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지만 정신적인 허기는 쉽게 배불릴 수 없었다. 김녕일은 그때 그 시절 누구든지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모택동선집", '레닌전집', '반듀링론' 등을 걸신처럼 밤늦도록 통독했다.

"사회과학은 임의성이 강하지만 자연과학은 증거로 문제를 설명해야 하는 학문이죠."

이런 도서는 종국적으로 김녕일에게 학문적으로 자연과학을 선택하는 방향판으로 되고 있었다.

1977년 김녕일은 연변대학 농학원 수의학과에 입학, 소망대로 자연과학 학문의 길에 들어선다. 졸업 후 김녕일은 농학원의 조교로 배치를 받았다. 그런데 불과 반년 만에 김녕일은 사직서를 내고 군사수의대학의 석사과정을 밟는다. 사실상 80년대 초는 대학생도 흔치 않을 때였다.

"부모님들이 학문을 더 깊이 닦았으면 하는 바램이었고, 저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김녕일은 본격적으로 바이러스학 연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높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강화를 할 필요성을 절감한 것도 바로 이맘때라고 한다.

"석사과정으로 바이러스학을 기본적으로 습득했지만 학술의 선두주자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였습니다. 깊이 있는 연구를 하기에는 더 심도있는 학습이 필요했습니다."

1990년 김녕일은 일본교토대학 바이러스연구소에 초빙되어 에이즈백신 공동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우두(牛痘)에서 추출한 바이러스에 에이즈 유전자를 넣어 만든 바이러스가 에이즈의 예방에 가능한가를 검증하는 프로젝트였다. 백신을 만드는 과정에서 외래 바이러스 유전자가 삽입되면 어떻게 고효율적으로 발현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시종 넘기 어려운 장벽으로 되고 있었다. 이에 앞서 일본 박사 2명이 이 난제에 걸려 별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김녕일은 중국에서 1985년부터 새로운 백신 개발에 종사하면서 유전자와 관련한 각종 소프트웨어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가 일본에 가서 공동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은 것도 실은 논문에 드러난 그의 이런 연구능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나중에 일본 연구소에서는 김녕일을 수석과학자로 초빙할 의향을 내놓았다. 연구소 소장과 동일한 수준의 노임, 저택 제공 등 '유혹적인' 대우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김녕일은 일언지하에 연구소의 제안을 거절한다. 한마디로 자가기 즐기는 연구대상에 집착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프로젝트는 연구자의 주관의향과 상관없이 피동적으로 선정된 분야만 하게 되어 있었거든요."

김녕일은 이번 일본행을 계기로 또 한국 서울에서 에이즈백신 공동연구를 진행했지만, 최종적으로 군사의학과학원 군사수의연구소에 돌아온다.

본 방송국 기자 인터뷰를 받고 있는 김녕일 원사

수십년간의 과학연구 생활을 뒤돌아보면서 그는 과학에 대한 일가견을 이렇게 말한다.

"과학연구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작은 변화라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 학과가 교차된 시기에 아주 작은 변화가 쌓여서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과학연구는 갈수록 여러 학과의 교차와 융합 작업을 필요로 하고 있다. 김녕일은 최근에도 생물, 화학, 유전공학, 분자물리학 등 여러 가지 학과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면서 자정이 넘도록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학문연구 외에도 김녕일은 후학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총 390명의 제자를 양성, 제자들에게 아주 엄격한 스승으로 정평이 났다. 그는 제자들에게 과학에 대해 신중하고 증거에 입각한 진실한 태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과학을 존중해야 합니다. 과학은 그 어떤 거짓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원사는 공식적인 정년퇴직이 70세이다. 김녕일은 나중에 퇴직하게 되면 학문에서 대를 이을 더 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싶다고 말한다.

"저는 한 인격체가 완성되고 승격되려면 꼭 학문을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문 연구'라는 이 '바이러스'는 그에게 있어서 어떤 '백신'도 억제할 수 없는 '전염병'으로 되고 있는 듯 했다.

글:  권향화 기자

중국국제방송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촬영 내내 목 메어도 참 행복했소' 첫 일본군 위안부 소재 영화 ‘소리굽쇠’ 출연 中조선족 배우 이옥희 씨 30일 개봉하는 영화 ‘소리굽쇠’는 여러모로 ‘커다란’ 영화다. 규모만 따지면 제작비 3억8000만 원에 불과한 작은 영화지만 담긴 뜻이 크다. 국내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 2014-10-27
  •        (흑룡강신문=하얼빈) 이흔 기자 =  하얼빈사범대 학화학화공학원 부원장 김영학(남 49세)박사는 유기화학연구에 두각을 나타내고있다.   헤이룽장성 경안현 출신인 김영학 부원장은 1990년 연변대학 이학석사학위를 졸업하고 자무쓰대학(佳木斯大学)에서 10년간 교편을 잡았다...
  • 2014-10-23
  •      “안녕하세요. 서방흥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목소리 하나만으로 청취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서방흥아나운서였다. 단색TV도 없었고 라지오만이 신문과 더불어 세상이야기를 들을수 있는 유일한 소통수단이였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을 라지오에서 흘러나오는...
  • 2014-10-22
  •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87) 김의진(金毅振) 프로필: 1956년 길림성 화룡현 출생 1978-198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1982-1990년 중앙민족번역국 공무원, 《자본론》등 경전저작 번역 참여 1991년부터 관광분야 등 실체 운영, 수백만명 관광객 유치 및 접대, 중한민간교류 가교역할 담당 북경일...
  • 2014-10-16
  • (흑룡강신문=하얼빈)진종호기자 = 8년간의 한국로무생활을 접고 귀향해 '현대농민'으로 화려한 변신을 했으며 위기에 처한 마을의 중임을 선뜻 떠매고 나선 젊은이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그가 바로 탕원현 탕왕조선족향 홍광촌의 리명광(44세)당지부서기겸촌주임이다.   겉으로는 왜소하고 차분해보이지만 남...
  • 2014-10-15
  • 진청민 731부대 진열관장 재중(在中) 동포 역사학자인 진청민(金成民·50·사진)씨는 1932~1945년 만주에 주둔했던 일본군 731부대의 생체실험과 잔학 행위를 증언해줄 전직 부대원을 만나기 위해 2008년 일본으로 향했다. 731부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던 오카와(大川)씨의 당시 나이는 95세였다. 오카와씨는...
  • 2014-10-15
  • 연길시 향란요가구락부 전향란원장의 소박한 꿈   “춤을 통해 건장을 찾고 함께 꿈을 실현해가며 고민을 함께 나누는 생활공간, 문화공간으로 거급날것입니다.” 연길시 향란요가구락부의 전향란원장은 구락부 설립 10주년( 2004년 10월 1일 오픈)맞으며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연길공원 맞은켠 정보산업...
  • 2014-10-14
  •     실수를 뒤집으며 성공을 위해 부지런히 달려 “8시”의 정확한 발음은 어떠할가?  “야듭시”라고 습관대로 튀여나왔는데 파트너가 “여덜시”가 정확하다고 귀띔해준다. 입사한지 얼마 안되여 낸 첫 방송인데 실수투성이다. 그 기억이 9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지난...
  • 2014-10-13
  • 장만흥 명예회장 “대련, 中 북방에서 제일 큰 항만도시”   한 달 전 회장직에서 물러나 현재는 명예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ZXOIL’(정흥석화)라는 석유제품을 다루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정만흥 중국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명예회장은 대련(大連)이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장밋...
  • 2014-10-11
  •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창립 50년 맞아 기념식과 포럼 개최 "동포 문제, 학문적으로만 파고들면 안 돼…현장에 답 있어"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사단법인 해외교포문제연구소가 창립 50년을 맞았다. 국내 재외동포 단체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됐다. 이구홍(72) 이사장이 창립한 이 연구소는 10일 오전 서울 종...
  • 2014-10-1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