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흥개호반 교단의 한떨기 진달래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7월1일 10시00분    조회:752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계순

  밀산시조선족소학교 김계순교사

  (흑룡강신문=하얼빈) 류대식 기자= 모진 설한풍을 억세게 이겨내며 봄마다 산야에 화사한 꽃을 만개하는 흥개호반의 진달래처럼 하나하나의 역경을 억척스레 헤쳐나가며 29년간 교단을 굳건히 지켜온 훌륭한 교원이 있다. 바로 흥개호반에 자리잡고있는 밀산시조선족소학교(교장 한흥림)의 김계순(48세)선생이다. "전문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형편에서 민영교원으로 첫 발자국을 내디딘 농촌에서 16년 교원생활은 너무나도 어려운 시련이였습니다…" 김씨는 끝내 억제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그만큼 지나온 교원생활중 많고많은 인고의 서러움이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었던것이다.

  1988년 밀산시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마침 기회가 생겨서 고향인 흥개향 흥농촌조선족소학교에 민영교원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교원이 그의 꿈의 하나였던지라 잘해보고 싶었고 교원사업으로 자신의 인생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교원자질교육도 못받은 형편이라 물덤벙 술덤벙으로 시작했다. 그런데다가 제일 어려운 1학년을 맡아하면서 적응이 되지 않아 쩍하면 목이 쉬였고 몸살이 나 늘 약을 달고있어야 했다.심하면 퇴근후에 링거를 맞으면서도 휴식없이 출근을 견지했다.스스로 모색하며 열심히 하다나니 성과가 마타나기 시작하여1991년에 처음으로 학교 우수교원으로 평의되였다. "그래도 한 3년은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출근하고 서러울 땐 달래도 주는 부모님이 뒤심이 되여주셔서 괜찮았는데 결혼하고 임신을 하고나니 몸이 불편하였지만 해산하는 마지막날까지 출근을 견지했어요. 배속의 아이도 알고 기다려주었는지 기말시험까지 다 친 바로 이튿날에 해산을 하게 되였지요. 이어 방학이 지나고 새학기가 시작되자 산후 휴가도 없이 어김없이 제때에 출근하였어요."

  "그때는 통일시험치는 때인지라 수업을 마치고는 학습이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하학후에 가르치고 그래도 안되여 밤에 집에까지 불러다가 가르쳤지요. 그래서 향적으로는 저가 맡은 과목은 계속1등을 따냈고 밀산현적으로도 우수한 성적을 따냈어요. 민영교원이라는 신분으로 다른 교원에 비해 낮에 밤을 이어 억척스레 사업을 하였지만 말로는 수고가 많다고 해도 서러울 때가 많았어요.꼬박 3년을 월급을 한푼 받지 못하고 사업을 한 사연도 있어요.

  생활이 여려운데다가 아이가 자주 앓아 일년에 한번씩 주는 봉급을 앞당겨서 병치료로 쓸때가 많았지요. 지금 돌이켜보노라니 그때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절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어요." 정말 울음을 터뜨릴만한 사연들이 많았다.

  당시 김씨는 상황이 많이 어려웠기에 교단을 떠나려는 생각도 없은것은 아니였다. 흥개향은 가난하고 교통도 불편한 곳이여서 사범졸업생들은 촌소학교에 오려하지 않았고 혹시 왔다가도 인차 조동하여 다른 학교로 갔으며 민영교원들도 힘들고 전도가 없다고 나가군 하였는데 나간 동료들은 돈을 잘 번다고 나오라고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민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 아이가 너무 어린데다가 또 교원사업을 놓으려니까 아쉬움도 너무 많았다. 나가면 아이들은 또 다른 선생님을 만나야 하고 자꾸 선생님이 바뀌면 아이들이 마음을 안정하고 공부를 할수 없기에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고생끝에 락이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였는데 1995년에는 정식교원으로까지 되였다.

  정식교원이 된후에도 김씨는 변함없이 사업에 혼신을 몰부었다. 학교가 집에서 3,4리가량 떨어져 있었지만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 학교에 데리고 다니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지각 한번 결석 한번 없이 출근을 견지했다. 그는 사업도 열심히 하였을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사 자질을 제고하기 위한 자학도 부지런히 했다. 선후로 오상사범과 연변대학 조문학부 함수도 졸업했다. 2002년에는 소학교 고급교사로 되였다.

  2003년부터는 학생이 없어 흥농학교가 페교되면서 밀산시 련주산진 영창소학교에 조동되여 사업하게 되였는데 헌적인 사업열정은 식지 않았다. 자기에게 차례진 임무를 열심히 하는 한편 학전반 아이들에게 한어병음을 가르칠 교원이 부족한것을 알고 선뜻 나서서 3년동안 아무런 대가도 없이 가르침으로써 학교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2008년에 역시 학생래원의 고갈로 영창소학교가 페교되면서 밀산시소학교에 조동되여 사업하게 되였는데 역시 변함없이 헌신적으로 사업하였다. 4년간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는동안 유치원교원 경험이 없었지만 거기에 적응하기에 위해 자질제고에 힘을 기울이고 아이들에게 알맞게 활동을 조직하여 아이들이 유치원에 오고싶어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다.

  2012년부터 소학교의 담임을 또 다시 시작하였는데 정작 44살 나이에 자기보다 10여살씩 어린 교원들과 같이 해낸다는것이 정말 힘든 일이였다.하지만 두말없이 학교의 지시에 호응하였고 자기가 맡은 아이들이 여러면에서 최고로 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이전부터 위가 안좋았던 그는 계속 약을 달고있었는데 2015년을 잡아서부터는 위의 상태가 더욱 나빠져서 죽도 먹을수 없는 상황에서 한달내내 물고기국물만 끓여마시며 한편으로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출근을 견지해왔다. 올해 3월에는 부과병으로 심하게 하혈을 하게 되였지만 1학년을 담임한 상황에서 과임선생님들과 상과 시간을 바꾸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인차 돌아와 제시간에 수업하면서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소학교 교사들은 거의 '만능'선생들이였다. 김씨도 음악을 내놓고는 어느 과목이나 다 가르쳐봤었다. 그중 그는 학교의 교수방침에 발맞추어 조선어문교학에 대해 보다 신경을 쓰고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 조선족학교 학생들은 거의 한어로 대화하고있다. 그래서 우리말이 점점 약해지고있는 추세다. 이런 국면을 돌려세우기 위해 그는 학교에 등교해서부터 하학할때까지 우리 말로 대화하도록 강조하였고 학교에 올 때 내가 본것 , 내가 들은것 등을 간단하게 말하도록 했으며 저녁에 집에 돌아가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말로 부모님께 이야기해드리고 싸인을 받아오도록 했다.

  "또 1학년 때에는 아침독서 시간을 리용하여 교원이 '중국조선족소년보', '꽃동산'잡지 그리고 아이들에게 알맞는 동화책을 골라 매일 한편씩 읽어줌으로써 조선어로 된 책읽기에 대한 흥취를 불러일으켰으며 2학년 때에는 랑독, 랑송에 중시를 돌려 열독시간에 배운 과문을 열심히 읽게 하고 배운 과문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과문을 선택하여 한달에 한번씩 학급에서 랑독, 랑송시합을 조직하였어요. 3학년때에는 주로 일기쓰기 경색, 이야기모임, 소년보읽기 경색을 조직하는것으로 우리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모를 박았어요. 하여 근 3년동안에 제16회 동북아청소년 평화백일장대회, 만방컵 작문경색 , 계서시 랑독 ,랑송경색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냈어요."

  김씨의 헌신적인 사업 열정과 함께 이룩한 성과는 동료들과 사회의 공인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는 성급우수론문상,지구급우수지도교원 시급우수교원 등 영예를 근 30차례나 받았다.

  그렇다.바로 김계순씨와 같은 수많은 기층교육자들이 우리민족 후대의 육성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업해 튼튼한 기반을 닦아놓았기에 오늘날에 와서도 우리민족은 소수민족으로서 자신의 언어, 자신의 전통을 잊지 않고 계속 전승,발전시키면서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는 것이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현지인 말에 귀 기울여야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어"  "중국에서는 법보다 친구가 중요할 정도로 신용관계가 사업의 핵심요소입니다. 편하다는 이유로 한국인끼리 모여 있어서는 중국 사회 깊숙이 진출할 수가 없습니다." 허영수(53)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일본 지바(千葉)지회 회장은 17일 해외 시장에 진출하...
  • 2013-06-18
  • 중경에 있을 때의 청년시절 리화림(좌)과 로년의 리화림 리화림, 그녀의 본명은 리춘실, 1905년 1월 6일 조선 평양시 경창리에서 태여났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원학교에 다닐무렵,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력사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사상을 익혔다. 열네살 때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7년...
  • 2013-06-17
  • 특별기획- 연변을 빛낸 조선족무역인 (6) 가비양 중국총판 김향란사장의 이야기   가비양 중국총판 김향란사장 가비양커피 중국총판 김향란사장이 6월말 상해에 제3호점을 오픈한다.기자는 일전에 가비양커피 중국총판 첫 본점을 시작으로 짧디짧은 2년사이에 연길과 훈춘 등 곳에 각각 분점 하나와 상해 1,2호점 등 ...
  • 2013-06-17
  • -봉산전통장체험관 김봉산 허봉숙 부부의 창업일화 모아산동남쪽기슭에 자리잡은 봉산전통장체험관(锋山朝鲜族传统酱体验馆)은 《6.1》아동절을 맞으면서 큰잔치라도 치르듯 들썽하였다. 학부모들의 손을 잡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찾아온 어린이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메주를 만드느라 야단법석이고들있었다. 손매돌을 돌리...
  • 2013-06-16
  • 한국 영문월간 잡지사 임덕규회장 인터뷰 임덕규 지난 4월 26일 필자는 한국 영문월간 (디플로머시)잡지사 임덕규회장을 인터뷰했다. 올해 79세인 임덕규회장은 역시 4년 전에 필자가 만났을 때의 건강한 그 모습이였고 예지로 넘친 그의 실눈은 이어지는 웃음으로 눈을 떴는지 감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 번도 임회...
  • 2013-06-14
  • 길림성정진광고유한회사 최정학 리사장             15년간의 피나는 노력으로 전국 160여개 도시에 분회사를 세운 한 기업가가 있습니다. 올해 59살인 최정학은 안도현에서 공무원으로 있던중 1995년에 국가민족사업위원회의 초청으로 미국시찰을 가게 됐습니다. 당시 광고회사에서 견습하...
  • 2013-06-13
  • 아리랑방송서 '바로 쓰는 우리말' 프로그램 제작  "청취자 여러분, 무엇을 본보기로 삼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본따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정확한 표현은 '본따다'가 아니라 '본뜨다'입니다." 중국 옌지(延吉)인민방송국의 우리말 라디오 방송 채널인 '아리랑방송&#...
  • 2013-06-13
  • -연변기림병원 침구골과재활센터 리철호주임의 일가견 《뇌성마비어린이들을 구하는것은 의사로서 밀어버릴수 없는 책임입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뇌성마비어린이들을 일찍 발견하고 일찍 치료하는것입니다.》 연변기림병원(延边祺林医院)침구골과재활센터 리철호주임이 기자에게 하는 말이다. 현재 연변기림병원 8층 ...
  • 2013-06-13
  • 류건봉(1865-1952, 산동성 안구현 사람)은 청나라가 1909년 12월에 안도에 지방행정기구인 현을 세운 후에 임명한 제1임 지사--오늘날의 현장이다. 류건봉기념비는 안도현 명월구에서 장백산으로 가는 입구에 위치해 있다. 맞은 켠 송전탑 밑으로 뻗은 도로가 안도 외곽에서 직접 장백산으로 통하는 관광도로이다.   ...
  • 2013-06-13
  • 한국로사가야금앙상블예술단 정미화단장의 남다른 중국정 중한문화교류음악회서 25현가야금연주를 하고있는 정미화단장. 중국의 조선족들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한국연예인이 있다. 바로 한국 로사가야금앙상블예술단 정미화단장이다. 정미화단장은 《로사가야금앙상블예술단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지원을 받...
  • 2013-06-13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