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재한조선족 성공시대> ⑩ '여성 1호 출입국 전문 행정사' 이미옥 씨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8월22일 07시25분    조회:847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이미옥
과수원집 며느리→맞벌이 주부→행정사…제1회 시험서 48대1 경쟁 뚫어
고졸 출신에 조선족 유일…대전서 행정사무소 운영하며 억대 매출 올려
휴대전화 저장 고객만 8천명…"이제 지식·경험 나누는 삶 살고 싶다"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지난 2013년 6월 28일 치러진 제1회 행정사(行政士) 시험에는 전국 6개 지역에서 1만3천여 명이 응시했다. 결혼이주여성인 중국동포(조선족) 이미옥(43) 씨도 부푼 꿈을 안고 도전했다.

그는 일반행정사 부문 1차 시험 합격자 2천584명에 포함됐고, 3개월여 뒤에 치러진 2차 시험도 무난히 통과해 최종 269명에 들었다. 결혼이주여성으로는 유일한 합격자였다.

이 씨의 합격은 그가 고졸 출신인 데다 한국으로 시집와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키우는 주부였다는 점에서 특히 남달랐다. 이 씨는 중국에서 성장해 한국 생활과 법률 지식이 한참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민법(총칙), 행정법, 행정학 개론(이상 1차 시험), 민법(계약), 행정절차론, 사무관리론, 행정사실무법(이상 2차 시험) 등 어려운 과목을 공부해 48대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 씨의 일터는 대전광역시 중구 중촌동에 있는 대전출입국관리사무소 바로 앞에 있는 '대지합동행정사무소'. 지난 19일 기자와 만나기 위해 서울역까지 바쁜 시간을 쪼개 상경한 이 씨는 인터뷰 취지를 설명하자 "저 말고도 성공한 분들이 많이 있는데…"라고 겸손해하면서 조심스레 명함을 내밀었다.

'대표 행정사 이미옥'이라는 명함 뒷면에는 '국제결혼, 부모·자녀·친지 등 초청, 국적·영주권·이중국적 등 신청대행, 입양 및 중국 면허증 갱신, 유전자 검사 대행, 친족 관계 공증서·위탁서 대행, 번역·공증·인증'이라고 적혀 있었다.

1시간 넘게 한중 양국에서의 삶을 털어놓으면서 보여준 그의 이미지는 외유내강(外柔內剛) 그 자체였다.

'여성 1호 출입국전문 행정사' 이미옥 씨.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링(穆稜)시에서 태어나 자란 이 씨는 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상하이에 있는 한국 회사에 취직했다. 어려서부터 조부모의 고향인 한국을 동경하던 그에게는 더없는 축복이었다. 2년 차 새내기 시절에 거래처 직원으로 만난 한국인 남자와 교제 끝에 결혼해 1996년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시댁은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이었지만 과수원을 운영하는 부자였죠. 솔직히 처음에는 '먹고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겠구나'라고 생각해 좋았습니다. 그러나 과수원집 맏며느리 역할은 녹록지 않았어요. 시아버지가 워낙에 깐깐하셨고, 시동생 5명과 함께 사는 일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과수원 인부들을 위해 하루 5끼니를 챙겨야 하니까, 눈뜨면 밥하고, 설거지 하고 청소하는 것이 전부였답니다."

대가족 맏며느리 역할이 힘에 부친다고 느낄 때쯤 남편과 시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 성남시에 월세 단칸방을 얻어 독립했다.

하지만 분가를 반대한 시댁으로부터 한 푼도 지원받지 못해 당장 먹고 사는 것이 시급했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남편 몰래 4살인 딸과 2살인 아들을 집에 두고 여행 가이드 자격증시험 학원에 다녔다. 가이드를 하면 돈을 만질 수 있다는 지인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는 아이들 유치원 보낼 돈마저 없었어요. 공부하면서도 늘 아이들 걱정뿐이었죠. 전철역까지 항상 뛰어다녔고, 전철 안에서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시험공부를 했어요. 점심은 호떡 하나로 때웠죠. 하루는 집에 들어가니 딸 아이가 동생 머리에 12가지 물감을 모두 쏟아 붓고 난장판을 만들었더라고요. 그날 아이들을 끌어안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이 씨는 3개월 만에 가이드 자격증을 취득했다. 하지만 가이드 업무가 며칠씩 집을 비워야 하는 일이라 어린 자녀를 두고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만두고 서울 명동에 있는 번역회사에 취직했다. 이곳에서는 중국 동포들의 출입국 행정업무를 취급했다. 당시는 행정사가 하는 일을 대부분 번역회사가 맡아 할 때였다.

그는 회사에 출근한 지 한 달 만에 모든 업무를 척척 알아서 했다. 그러자 회사 사장은 "3년간 이직하지 않고 퇴사해도 같은 업종에 종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뭔가 이상하고 부당하다고 판단한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2002년 '대지번역'이란 상호를 내고 집에서 인터넷으로 그동안 배웠던 번역 업무를 시작했다.

"결혼서류 번역, 초청, 공증 관련 서류대행 등 매일 20∼30건씩 처리했어요. 당시 불법체류 합법화, 여권 연장 등 업무가 쇄도하면서 광화문 교보빌딩에 있던 주한 중국영사관(지금은 명동으로 이사)을 내 집 드나들듯 다녔죠. 아예 영사관 휴게실에 테이블을 놓고, 직원 3명과 함께 업무를 했을 정도였어요."

업무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서울 종로에 사무실을 냈고, 2005년에는 대전에도 사무실을 오픈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번역사무소가 생기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결국 2007년 서울 사무실을 정리하고 대전에 정착했다.

"경쟁이 치열하기 전까지 돈도 많이 벌었어요. 나름 이 업계에서는 잘한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죠. 좀 과장해 돈을 긁어 담았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남편의 사업이 잘 안 돼 날리기도 많이 날렸죠."

정부는 퇴직 공무원들이 독점하던 행정사 자격시험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나자 2012년 법을 개정해 일반인도 시험을 통해 행정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제1회 행정사 시험 소식은 이 씨에게도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제시된 시험 과목을 보고는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까지 그 어디에서도 배워본 적이 없는 학문이었다.

"오후 4시까지 사무실 업무를 마치고는 KTX를 타고 서울로 왔어요. 수업이 끝나면 밤 11시 30분 막차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왔죠. 그렇게 7개월을 서울과 대전을 오가는 강행군을 했어요. 시험 몇 개월을 앞두고는 아예 서울에 거처를 마련해 살았죠. 매일 하루 3시간씩 자고 공부했어요. 거의 모든 과목을 외웠던 것 같아요. 나중에는 환각·환청이 들릴 정도였어요."

결혼이주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행정사 시험에 합격한 그는 현재 직원 4명의 월급을 주면서 억대의 매출을 올린다. 세금도 "착실히 내고" 있다고 했다. 자격증 취득 이후의 변화는 한마디로 "당당해진 것"이다. 과거 번역사무소가 하던 일을 지금은 행정사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와 만난 고객은 10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몇 번 거래를 했거나 손님을 알선해 주는 핸드폰 저장 고객만도 8천 명 정도입니다. 남들은 번듯한 사무실을 내고 억대를 벌어들이다고 해서 성공했다고 말하지만 저는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국동포들을 위해 제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나누고, 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은데, 바쁘다는 핑계로 그 일을 못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그 일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는 매년 행정자치부 초청으로 행정사 시험 합격자들을 상대로 출입국 업무 관련 강의를 진행한다. 이 씨에게는 자랑이 있다. 악착스럽게 살던 시절 늘 희망이고, 힘의 원천이던 딸이 하버드대 리더십전형에 수석으로 뽑혔다. 오는 9월 입학을 앞둔 딸은 오바마 대통령상을 받는 장학생으로 선발됐다고 한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조선족청년작곡가 박광춘 신미디음악회가 10월 28일 연변TV방송국 스튜디어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박광춘이 최근년간 창작한 새로운 가요와 음악작품들을 신미디음악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담아 표현하였다. “세상은 우리것이야”“청춘스타트”“오아시스” 등 17수의 음악으로 구성되였고 열정 사랑 찬미 등 세 부분...
  • 2005-10-31
  • 광복 60주년을 맞아 올해, 덕수궁미술관에서는 8월말부터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보통사람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일제 강점기 중국 땅에서 화가이자, 고고학자, 나아가 혁명가로 활동하다 끝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 뼈를 묻어버린 한낙연(韓樂然)을 기념하는 ‘광복 60주년 기념 한낙연 특별전...
  • 2005-10-31
  • [원제:할빈시고려회관 안중근의거96주년기념좌담모임 소집] 2005년 10월 27일 10월26일 안중근의사 의거 96주년에 즈음해 할빈시고려회관은 안중근의사 기념좌담모임을 소집했습니다. 회의는 리민 전 흑룡강성정협위원회 부주석이 기증한 ,이란 글발의 휘호족자 두폭을 전달했습니다. 이날 모임에서는 안중근의사의 생애와 ...
  • 2005-10-28
  • 《퉁소마을》인 훈춘시 밀강향에서 태여나 자라 꾸준한 탁마로 중국 문화예술부상인 문화(文華)예술학원상 제2회민족악기연주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최민(25살)이다. 1993년, 훈춘시문화관에서 《퉁소마을》조성을 위해 밀강향에 퉁소 100대를 지원했다. 어려서부터 마을 로인...
  • 2005-10-28
  • 효자효녀라 하면 사람들은 흔히 부모에게 효도하는 성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15세밖에 안되는 초중생이 학교로부터 '효자상'을 받았다. 그가 바로 상지시조선족중학교 초중 2학년 4반의 류춘길학생이다. 춘길학생은 학습성적도 우수하거니와 학우간에 우애단결하고 학교 각항 제도도 모범적으로 ...
  • 2005-10-27
  •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조선 국방공업을 이끌어온 시세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여난 연부위원장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체코의 프라하공대를 류학한후 로동당, 정무원(현 내각), 국방위를 오가면서 조선 국방공업과 경제건설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항일빨찌산 유자녀로 김일성 주석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
  • 2005-10-26
  • 1983년. 중국작가협회 길림성 분회 부주석, 상무위원회 위원이던 그는 베이징으로 전근한다. 이어 중국 작가협회에서 발간하는 '민족문학'주필이 된다. 그때만 해도 조선족은 북경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 5년 만에 베이징 호적(시민)이 된다. '베이징 시민'은 특혜였다. 조선족으로는 처음 베이징 명예시민이 된 것이다. 등...
  • 2005-10-26
  • [원제:《천리를 말 한필로 달리다》호평속에 다카쿠라켄 장예모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제18차동경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오른 영화 《천리를 말 한필로 달리다》는 장예모감독과 다카쿠라켄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개막식에서 이 작품은 세계영화인들과 일본관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편의 중국영화...
  • 2005-10-25
  • [원제: 중국조선족항일사 연구하는 만족당사학자-조문기] - 다련래 조선족항일사에 관한 저서, 론문 대량 발표 다년간 신빈현 당사지방사연구판공실 주임직을 담임했던 조문기(만족 57세)씨는중국조선족항일사연구에 조예가 깊어 중국조선족사회는 물론 한국에도 꽤 알려졌다. 조문기씨가 중국조선족항일사에 관심을 가지기...
  • 2005-10-25
  • 중국의 대표적인 음악가인 정률성선생(1914~1976)의 출생지와 관련, 현재 한국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은 한국 광주남구의회 유 순남 의원이 지난 17일 정률성선생의 호적과 화순 능주소학교 제적부, 정률성아버지 정해업씨의 토지소유대장자료 등을 토대로 정률성선생의 출생지가 화순이라고 주장하면...
  • 2005-10-2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