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공무원에서 교원으로 - 연태대학 생명공학학원 윤화선 교수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0월2일 19시00분    조회:702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윤하선

연해지역 조선족탐방: 위해, 연태편 (12)
“공무원에서 교원으로”-연태대학 생명공학학원 윤화선 교수


산동성 연태시 해변가에 위치한 연태대학은 성 중점종합대학일뿐만아니라 주변의 수려한 풍경으로 원근에 명성이 자자하다. 연해지역조선족탐방 위해, 연태지역취재의 일환으로 기자는 지난 9월 8일, 아름다운 연태대학 교정에서 윤화선 교수를 만났다.

생명공학학원 문앞까지 마중 나오며 반갑게 맞아주는 윤화선 교수를 보면서 웬지 친근감이 들었다. 학원 문앞에서 학교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들은뒤 기자는 윤교수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섰다.

<연태에 온지는 10여년 됐어요, 사실 저는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연태대학에 취직한 남편따라 이곳으로 오게 된거예요.>

2004년 연태대학에 와서부터 지금까지 윤화선교수는 10여년간 생명공학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윤교수의 소개를 들으며 교원사업에 종사하기 전 그가 공무원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기자는 윤교수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의사를 꿈꾸던 소녀, 길림성 의학계통의 최연소 중층간부로

“저의 부모님은 모두 의학 관련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던것 같아요.”

윤교수의 어머니는 연변병원의 간호사로 있었다. 하지만 건강상황이 안좋은 관계로 1980년에 부득이 퇴직수속을 밟을수밖에 없었다. 병환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중에 의사로 되여 어머니를 치료해주고 싶어하던 어릴적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고 윤화선 교수는 말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대학입시를 맞이하게 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의사전공에 지원하려는 딸을 한사코 반대해 나섰다. 의학계통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어머니였기에 딸이 힘들게 살가 우려하는 로파심때문에서였다. 결국 어머니의 의견을 꺽지 못한 윤화선 교수는 약사 전공을 택하게 되였다.

1985년, 윤화선 교수는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의학원을 졸업하고 연변약품감독검험소에 배치받게 되였다. 자신이 지망하던 의사전공은 아니였지만 의학과 관련된 직업인것만큼 그는 열정을 불태우면서 일에 전념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3년, 근무 8년만에 윤화선 교수는 약검소의 약리실 주임으로 파격 발탁되였다. 당시만 하여도 전성 의학계통에서 가장 젊은 중층간부였다. 그때로부터 윤화선 교수는 젊음의 패기로 사업을 이끌어나갔다. 약리실은 약리학 관련 독성실험을 진행하고 약품관리법을 집행하는 업무를 주로 취급하는 부서였다. 하지만 윤교수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완성하는 한편 프로젝트 연구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연변에서 유명했던 555항암령도 윤교수의 연구실에서의 약리학 연구를 거쳐 출시될 정도였다.

그렇게 약리실 주임으로 10년간 근무하면서 윤화선 교수는 많은 연구성과를 내놓았고 론문도 여러편 발표하여 간부와 동료들의 인정을 받았다. 윤화선 교수는 길림성 과학기술진보상 2등상 영예를 따냈을뿐만아니라 1998년에는 연변조직부로부터 중점간부대상으로 등록되기까지 했다.

희생적인 안해

윤교수와 남편은 대학시절 동창생이였다. 대학을 졸업한후 그의 남편은 연변제약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제약회사는 남들의 부러움을 자아낼만한 훌륭한 직장이였지만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불경기를 맞았다. 1995년, 남편은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연길시의 첫 경동보일러 대리점은 바로 남편이 만든것이였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길지 않았다. 199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폭발하면서 그 사업도 계속할수 없게 되였다. 고심끝에 남편은 결국 한국으로 류학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남편이 한국으로 류학간다고 하니 친구들도 믿기 어려운 눈치였습니다. 남편이 한국으로 로무송출을 떠난다는 소문까지 날 정도였다. 나중에 친구들이 직접 한국에 가 두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믿더라구요.”

그도 그럴것이 40세에 가까운 나이에 재차 학업을 선택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기때문이였다.

남편이 한국 전남대에서 2년남짓이 박사과정을 밟았을 무렵이였다. 이국타향에서 홀로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윤교수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직장을 쉬이 떠날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더이상 남편을 혼자 내버려둘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남편을 설득해보지 않은것도 아니였다. 하지만 남편의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가슴을 울렸다.

“내가 중도에서 포기하면 앞으로 우리 아들을 어찌 교육할수 있겠소?”

남편의 말 한마디에 그는 의연히 무급휴직신청을 내고19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떠났다. 그렇게 윤교수는 5년간의 박사과정을 마칠때까지 남편의 뒤바라지를 했다. 전도가 유망한 그에게 있어서 분명 쉬운 선택이 아니였지만 윤교수는 그 결정에 대해 한번도 후회한적 없다고 말했다.

공무원에서 교원으로

2004년,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연태대학으로 취직한 남편을 따라 윤교수도 연태로 오게 되였다. 공무원에서 교원으로 신분 전환을 하면서 적응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사실 한국으로 가기전 전국직업약사자격증시험을 보았어요. 안되면 나중에 약국에서라도 근무하려는 생각에서였어요. 그러던 저한테 대학에서 교편을 잡을수 있는 기회가 차례지니 너무 설레였어요.”

맨 처음 교단에 섰을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윤교수는 말했다.

“약검소에 있을때 회의도 많이 사회했고 각 현시 실무일군들을 상대로 강습도 적지 않게 조직했었지만 정작 학생들을 마주하니 웬지 모르게 떨리더라구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어떤 내용이든 잘못 가르쳐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깊이 들었어요. 그래서 강의준비도 더욱 열심히 했구요.”

자신을 한층더 제고하기 위해 윤교수는 2004년부터 2년간 중국해양대학에서 식품공학과 연구생 과정도 마쳤다.

식품공학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료리하는 주방장을 련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만큼 해당 전공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결핍한것은 사실이지만 발전전망은 아주 광활하다고 윤교수는 말했다.

“일상생활에서 식품은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식품 기능성 연구나 영양분석 등 내용은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날로 사람들의 중시를 받고 있습니다. 식품공학과의 전망은 아주 밝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교원으로서 윤교수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제자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더 좋은 대학의 연구생으로 입학할때이고 다른 하나는 길거리에서 인사를 건네오는 제자들과 만났을때이다.

과거 “스승은 부모와 같다”는 말을 페부로 느끼지 못했지만 교원으로 된후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꼭 마치 자기 자식과도 같이 느껴진다는 윤교수는 누가 어려움이 있다고만 하면 언제나 발벗고 나서는 엄마와도 같은 교원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자랑스러운 엄마

내외가 모두 대학교 교수라는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자식한테는 줄곧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윤교수는 말했다.

“좀 더 좋은 교육을 받길 원하는 마음에 12살난 아들을 장춘외국어학교에 기숙생으로 보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린 아이한테는 너무나 모진 선택이 아니였나 싶기도 해요.”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뭉클한 감정이 앞선다는 윤화선 교수다. 그도 그럴것이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이 절실한 나이에 홀로 타지에서 자립생활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아들은 너무나도 훌륭하게 성장했다.

2006년, 절강대학을 비롯한 여러 명문대에 추천으로 입학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아들은 의사의 꿈을 키우기 위해 대학입시를 보고 당당히 중국중의약대학에 입학했다. 현재 아들은 한국 카톨릭의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자식이 진로를 고민할때가 되니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수 있을것 같아요. 언제 어디서나 부모 마음은 같다는 말이 너무 가슴에 와닿는거에요.”

윤교수의 아들마저 의학의 길을 선택하면서 그의 가정은 3대가 모두 의학관련 업종에 종사하게 되였다.

이처럼 아들에게 있어서 부모는 행동으로 교육하는 본보기였고 이들 부부에게 있어서 아들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자식이였다.

연태조선족 사회의 발전을 위해

“고향에 있을때는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연태에 오고나니 민족심이 너무나도 강해졌어요. 사람이 뿌리는 못 속이는것 같아요.”

50대에 접어들면서 연구기회도 많이는 후배들한테 넘겨주다보니 여유시간이 전보다 많다고 한다. 하여 2013년부터 윤교수는 본격적으로 연태시 조선족녀성협회 래산분회 회장, 연태 한국어 래산분교 교장 등 사회 직무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또한 후대들에 대한 민족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취지에서 지난해부터는 연태정음한국어학교 교장직을 맡고 연태지역 조선족 자녀들을 상대로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몰붓고 있다.

“전에는 시간적 여유가 적다보니 자주 고향에 다녀오지 못했어요. 그래도 요 근래에는 설이나 방학때마다 꼭 다녀오군 해요.”

매번 연변에 다녀올때마다 새롭게 변모하는 고향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윤화선 교수는 말한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고향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가? 유감스러운 일은 있지만 후회는 없어요, 어떤 선택이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으니깐요.”

윤교수는, 남편이 퇴직하고 나면 꼭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번씩 되뇌이군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향의 겨울이 하도 추워 견딜수 있을진 몰라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만은 변함없다고 했다.

묵묵히 뒤에서 남편의 성공을 받쳐준 희생적인 안해로, 훌륭한 아들을 키워낸 자랑스런 어머니로, 자신의 일터에서 착실히 일하고 있는 당당한 직업녀성으로, 모든 역할에 충실하면서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윤화선 교수, 지혜롭고 아름다운 전통 조선족 녀성상임에 손색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중앙인민방송국 박민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곤명시정협위원, 곤명동방금홍부동산개발회사 이사장, 북경세박투자그룹 박철 회장            북경수도국제공항에서 공항고속도로를 따라 시구역방향으로 10여킬로메터 달려 5환로부근에 이르면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있는 번화한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온다. 역동하는 도시...
  • 2021-04-08
  • 김려화 교수, 조혈줄기세포 분화조절 분자 메커니즘 밝혀     얼마전 국제학술지 《eLife》에 게재된 동북림업대학 생명과학학원 유전학과 김려화(조선족.50) 교수의 조혈줄기세포 분화조절 관련 연구 결과가 세계적 관심을 끌고있다. 김교수가 이번 론문( “Rab5와Rab11, 여러 개의 신호전달경로 억제 통해...
  • 2021-04-06
  • 한 중국 류학생이 영국 런던에서 음악의 꿈을 좇아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코미디 영화 《합법 동반자(合法伴侣)》가 지난 12일 전국적으로 개봉했다. 이 영화는 2019년 제22회 상해국제영화제 및 아시아 신인상 최우수 감독상과 최우수 각본상에 노미네이트(提名)된 작품인 데다 인기스타 리치정(李治廷)과 백가(白客)가 주...
  • 2021-03-24
  • 최영덕 로인의 즐거운 예술생활 강가의 돌쪼각, 산기슭에 나딩굴고 있는 나무뿌리… 다른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지만 무순시 최영덕 로인의 손질을 거치게 되면 ‘보배’로 탈바꿈된다.   3월 14일, 필자는 지난 2000년 무순시조선족제1중에서 정년 퇴직한 최영덕(79세) 로...
  • 2021-03-18
  •         리민은 1924년 흑룡강성 라북현 오동하촌의 한 애국자 가정에서 태여났다.        부친 리석원은 일제에게 빼앗긴 땅에서 살기싫어 20세기 20년대에 중국 동북에 망명해왔으며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겪으면서 민족독립과 항일의 뜻을 굳혔다. 그...
  • 2021-03-12
  •   항일전쟁시기 가장 처절하고 간고했던 동북전장에서 싸운 동북항일련군에는 녀전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고 경력이 가장 풍부하며 영향력이 가장 크고 기여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전우들사이 평판도 가장 좋은 사람은 녀전사 리재덕이라 할 수 있다. 리재덕((1917-2019) 리재덕은 1917년 1...
  • 2021-03-09
  •  구성지고 신명나는 우리 민족의 소리 - 판소리에 현대음악을 접목시켜 틱톡이라는 새로운 매개체를 통하여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가수가 있다. 바로 현재 연변가무단에서 판소리 전승자, 민요가수로 활약중인 최              구성지고 신명나는 우리 민족의 소리 - ...
  • 2021-03-08
  • 국제미술전시행사의 총괄 기획인 허문길 화백   ▲사진설명: 허문길 화백    2월 22일 주칭다오 한국총영사관 김경한 총영사는 조선족 출신 허문길 화백을 면담하면서 중한 양국간의 문화교류행사에 대해 진지한 자문을 구했다.      그렇다면 허문길 화백은 누구인가.    허문길...
  • 2021-02-26
  • 길림성 통화청산그룹유한회사 리청산 회장이라면 동북지역의 조선족들은 거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끌끌한 민족기업인으로 년매출이 수억원에 달하고 년간 납세액이 5천만원을 넘는 기업의 총수로 해마다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사심없이 사랑을 쏟아가고 있다.   △ 코로나19와 싸우는 1선 의무일군들에게 보내는 원...
  • 2021-02-24
  • 일전에 필자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솔잎식품생산허가증’을 획득하고 ‘솔왕’으로 불리는 연변장백산솔잎연구유한회사 조경수(1956)를 찾아 솔에 대한 일가견을 들어보았다.   일찍 2006년 조경수는 연변일보 중문판에 ‘솔연구의 제1인자’라고 불리며 주목을 받은 적 있다. 솔관련...
  • 2021-02-20
‹처음  이전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