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공무원에서 교원으로 - 연태대학 생명공학학원 윤화선 교수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0월2일 19시00분    조회:716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윤하선

연해지역 조선족탐방: 위해, 연태편 (12)
“공무원에서 교원으로”-연태대학 생명공학학원 윤화선 교수


산동성 연태시 해변가에 위치한 연태대학은 성 중점종합대학일뿐만아니라 주변의 수려한 풍경으로 원근에 명성이 자자하다. 연해지역조선족탐방 위해, 연태지역취재의 일환으로 기자는 지난 9월 8일, 아름다운 연태대학 교정에서 윤화선 교수를 만났다.

생명공학학원 문앞까지 마중 나오며 반갑게 맞아주는 윤화선 교수를 보면서 웬지 친근감이 들었다. 학원 문앞에서 학교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들은뒤 기자는 윤교수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섰다.

<연태에 온지는 10여년 됐어요, 사실 저는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연태대학에 취직한 남편따라 이곳으로 오게 된거예요.>

2004년 연태대학에 와서부터 지금까지 윤화선교수는 10여년간 생명공학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윤교수의 소개를 들으며 교원사업에 종사하기 전 그가 공무원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기자는 윤교수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의사를 꿈꾸던 소녀, 길림성 의학계통의 최연소 중층간부로

“저의 부모님은 모두 의학 관련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던것 같아요.”

윤교수의 어머니는 연변병원의 간호사로 있었다. 하지만 건강상황이 안좋은 관계로 1980년에 부득이 퇴직수속을 밟을수밖에 없었다. 병환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중에 의사로 되여 어머니를 치료해주고 싶어하던 어릴적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고 윤화선 교수는 말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대학입시를 맞이하게 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의사전공에 지원하려는 딸을 한사코 반대해 나섰다. 의학계통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어머니였기에 딸이 힘들게 살가 우려하는 로파심때문에서였다. 결국 어머니의 의견을 꺽지 못한 윤화선 교수는 약사 전공을 택하게 되였다.

1985년, 윤화선 교수는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의학원을 졸업하고 연변약품감독검험소에 배치받게 되였다. 자신이 지망하던 의사전공은 아니였지만 의학과 관련된 직업인것만큼 그는 열정을 불태우면서 일에 전념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3년, 근무 8년만에 윤화선 교수는 약검소의 약리실 주임으로 파격 발탁되였다. 당시만 하여도 전성 의학계통에서 가장 젊은 중층간부였다. 그때로부터 윤화선 교수는 젊음의 패기로 사업을 이끌어나갔다. 약리실은 약리학 관련 독성실험을 진행하고 약품관리법을 집행하는 업무를 주로 취급하는 부서였다. 하지만 윤교수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완성하는 한편 프로젝트 연구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연변에서 유명했던 555항암령도 윤교수의 연구실에서의 약리학 연구를 거쳐 출시될 정도였다.

그렇게 약리실 주임으로 10년간 근무하면서 윤화선 교수는 많은 연구성과를 내놓았고 론문도 여러편 발표하여 간부와 동료들의 인정을 받았다. 윤화선 교수는 길림성 과학기술진보상 2등상 영예를 따냈을뿐만아니라 1998년에는 연변조직부로부터 중점간부대상으로 등록되기까지 했다.

희생적인 안해

윤교수와 남편은 대학시절 동창생이였다. 대학을 졸업한후 그의 남편은 연변제약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제약회사는 남들의 부러움을 자아낼만한 훌륭한 직장이였지만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불경기를 맞았다. 1995년, 남편은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연길시의 첫 경동보일러 대리점은 바로 남편이 만든것이였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길지 않았다. 199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폭발하면서 그 사업도 계속할수 없게 되였다. 고심끝에 남편은 결국 한국으로 류학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남편이 한국으로 류학간다고 하니 친구들도 믿기 어려운 눈치였습니다. 남편이 한국으로 로무송출을 떠난다는 소문까지 날 정도였다. 나중에 친구들이 직접 한국에 가 두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믿더라구요.”

그도 그럴것이 40세에 가까운 나이에 재차 학업을 선택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기때문이였다.

남편이 한국 전남대에서 2년남짓이 박사과정을 밟았을 무렵이였다. 이국타향에서 홀로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윤교수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직장을 쉬이 떠날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더이상 남편을 혼자 내버려둘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남편을 설득해보지 않은것도 아니였다. 하지만 남편의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가슴을 울렸다.

“내가 중도에서 포기하면 앞으로 우리 아들을 어찌 교육할수 있겠소?”

남편의 말 한마디에 그는 의연히 무급휴직신청을 내고19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떠났다. 그렇게 윤교수는 5년간의 박사과정을 마칠때까지 남편의 뒤바라지를 했다. 전도가 유망한 그에게 있어서 분명 쉬운 선택이 아니였지만 윤교수는 그 결정에 대해 한번도 후회한적 없다고 말했다.

공무원에서 교원으로

2004년,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연태대학으로 취직한 남편을 따라 윤교수도 연태로 오게 되였다. 공무원에서 교원으로 신분 전환을 하면서 적응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사실 한국으로 가기전 전국직업약사자격증시험을 보았어요. 안되면 나중에 약국에서라도 근무하려는 생각에서였어요. 그러던 저한테 대학에서 교편을 잡을수 있는 기회가 차례지니 너무 설레였어요.”

맨 처음 교단에 섰을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윤교수는 말했다.

“약검소에 있을때 회의도 많이 사회했고 각 현시 실무일군들을 상대로 강습도 적지 않게 조직했었지만 정작 학생들을 마주하니 웬지 모르게 떨리더라구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어떤 내용이든 잘못 가르쳐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깊이 들었어요. 그래서 강의준비도 더욱 열심히 했구요.”

자신을 한층더 제고하기 위해 윤교수는 2004년부터 2년간 중국해양대학에서 식품공학과 연구생 과정도 마쳤다.

식품공학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료리하는 주방장을 련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만큼 해당 전공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결핍한것은 사실이지만 발전전망은 아주 광활하다고 윤교수는 말했다.

“일상생활에서 식품은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식품 기능성 연구나 영양분석 등 내용은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날로 사람들의 중시를 받고 있습니다. 식품공학과의 전망은 아주 밝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교원으로서 윤교수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제자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더 좋은 대학의 연구생으로 입학할때이고 다른 하나는 길거리에서 인사를 건네오는 제자들과 만났을때이다.

과거 “스승은 부모와 같다”는 말을 페부로 느끼지 못했지만 교원으로 된후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꼭 마치 자기 자식과도 같이 느껴진다는 윤교수는 누가 어려움이 있다고만 하면 언제나 발벗고 나서는 엄마와도 같은 교원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자랑스러운 엄마

내외가 모두 대학교 교수라는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자식한테는 줄곧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윤교수는 말했다.

“좀 더 좋은 교육을 받길 원하는 마음에 12살난 아들을 장춘외국어학교에 기숙생으로 보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린 아이한테는 너무나 모진 선택이 아니였나 싶기도 해요.”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뭉클한 감정이 앞선다는 윤화선 교수다. 그도 그럴것이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이 절실한 나이에 홀로 타지에서 자립생활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아들은 너무나도 훌륭하게 성장했다.

2006년, 절강대학을 비롯한 여러 명문대에 추천으로 입학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아들은 의사의 꿈을 키우기 위해 대학입시를 보고 당당히 중국중의약대학에 입학했다. 현재 아들은 한국 카톨릭의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자식이 진로를 고민할때가 되니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수 있을것 같아요. 언제 어디서나 부모 마음은 같다는 말이 너무 가슴에 와닿는거에요.”

윤교수의 아들마저 의학의 길을 선택하면서 그의 가정은 3대가 모두 의학관련 업종에 종사하게 되였다.

이처럼 아들에게 있어서 부모는 행동으로 교육하는 본보기였고 이들 부부에게 있어서 아들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자식이였다.

연태조선족 사회의 발전을 위해

“고향에 있을때는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연태에 오고나니 민족심이 너무나도 강해졌어요. 사람이 뿌리는 못 속이는것 같아요.”

50대에 접어들면서 연구기회도 많이는 후배들한테 넘겨주다보니 여유시간이 전보다 많다고 한다. 하여 2013년부터 윤교수는 본격적으로 연태시 조선족녀성협회 래산분회 회장, 연태 한국어 래산분교 교장 등 사회 직무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또한 후대들에 대한 민족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취지에서 지난해부터는 연태정음한국어학교 교장직을 맡고 연태지역 조선족 자녀들을 상대로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몰붓고 있다.

“전에는 시간적 여유가 적다보니 자주 고향에 다녀오지 못했어요. 그래도 요 근래에는 설이나 방학때마다 꼭 다녀오군 해요.”

매번 연변에 다녀올때마다 새롭게 변모하는 고향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윤화선 교수는 말한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고향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가? 유감스러운 일은 있지만 후회는 없어요, 어떤 선택이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으니깐요.”

윤교수는, 남편이 퇴직하고 나면 꼭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번씩 되뇌이군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향의 겨울이 하도 추워 견딜수 있을진 몰라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만은 변함없다고 했다.

묵묵히 뒤에서 남편의 성공을 받쳐준 희생적인 안해로, 훌륭한 아들을 키워낸 자랑스런 어머니로, 자신의 일터에서 착실히 일하고 있는 당당한 직업녀성으로, 모든 역할에 충실하면서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윤화선 교수, 지혜롭고 아름다운 전통 조선족 녀성상임에 손색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중앙인민방송국 박민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2006년 12월18일 , 민영기업 금두그룹이 대형국유기업 길림성교통건설그룹을 재조합한 장거는 각 매체를 통하여 삽시간에 전 성을 들끓게 하였고 이는 길림성내 민영기업이 대형국유기업을 재조합하는 선례를 개척하였다. 이 대담한 혁신의 주인공이 바로 길림성금두그룹의 김명남리사장이다. 등록자본이 2만원인 규모가 작...
  • 2007-02-15
  • 김광범, 남, 조선족, 1947년 5월 출생, 단과대학 학력, 현재 흑룡강성 목단강시민족종교사무국 국장. 1994년부터 지금까지 여러차례 공을 세워 목단강시정부의 표창을 받았으며 시직속기관 당위로부터 여러차례 당작풍 렴정건설 선진개인으로 당선되였다. 그가 국장으로 부임한 이후 목단강시민족종교사무국은 국무원으...
  • 2007-02-12
  • 《장4B》 총설계사, 총지휘로서의 리상영, 7년 여에 10차례에 걸쳐 10종의 인공위성 16매를    전부 예정궤도에 정확히 발사, 《10발 10중》의 기적을 창조하다 《하량하리기금상》 수상자 《며칠전 또 한방이라,그러니까 이번이 10발10중 맞지요?》 2006년 11월 15일 북경 인민 대회당에서 거행된 《...
  • 2007-02-11
  • CCTV중국올림픽키잡이 선발에 나서 동부지역 80강까지 올랐으며 전국 '녀자투표인기왕'으로 이름을 날렸던 산동지역대표선수 조충(赵翀)이 조선족이였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비록 32강진출에서 아쉽게도 탈락되였지만 그녀가 받았던 폭발적인 인기는 조선족들의 이미지향상에 큰 힘을 하였다. 초기의 인터넷투표...
  • 2007-02-07
  • 비용까지 대주고 한국로무 보냈다오. 돈 떼울 일이 절대 없답니다. ㅡㅡ 치렬한 경쟁과 유혹적인 리윤으로 많이 변질이 된 해외로무송출시장에서 이런 평을 듣기란 쉽지 않다. 해외로무지원자들의 일 전한푼이 어렵게 모은 돈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어요. 때문에 우리는 매개 고객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책임지는 각도에서&nbs...
  • 2007-02-01
  • 조선족학자 임범송교수를 만나다 작년 12월 26일,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43만자나 되는 조선문대형도서《심미비평론》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으로 하여 저자 임범송교수는 흥분된 자신을 걷잡기 어려워했다. 그럴만도 하다. 70세 고령인 임범송교수는 자식들이 유럽려행을 다녀오시라는 권고도 마다하고 《인생의 마지...
  • 2007-01-31
  • 1원짜리 인민페에 등장하는 소수민족 여성의 실제 주인공이 28년여만에 나타났다.지난 20전짜리 모델인 조선족 처녀에 이어 이번에는 동족처녀였다.이 인민페에 등장했던 동족 소녀는 지금은 45살의 중년 여성이 됐지만 최근에야 자신이 지페 모델이었음을 알게 됐다.귀주(貴州)성 총장(從江)현의 한 동족 부락에 사는 스나...
  • 2007-01-28
  •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반 없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자 김철남은 중경에서 해방을 맞는다. 당시 조선 국내의 정치상황이 불안했 탓으로 그는 중국에 머물러 사태를 관찰했다. 그래서 중국에 눌러 앉은 그는 1952년 페암으로 인하여 북경에서 세상을 떴다. 지금 북경에 건재하고 있는 이서군 녀사는 조선족...
  • 2007-01-28
  • 색 바래지 아니 할 '영원한 화신'       실로 빠른 것이 세월인 것 같다. 벌써 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바로 5년전의 그 여름밤, CCTV 제5채널의 2002한·일월드컵의 생방송을 보다가 까닭없이 히딩크가 이끄는 한국팀을 비하하는 해설원의 언사에 참지 못해 전화통을 들고 그 해설원 유건홍과 설전을...
  • 2007-01-28
  • 27일 청주 라마다호텔에서 사단법인 한국청년회의소(JCI) 손인석 회장(36·청주 광진건설 대표)이 취임식을 가졌다.손회장은 각 지방 JC와 중국 조선족 소학교간 자매 결연을 추진, 한민족 얼을 잊지 않도록 도와 주고 소외된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심장병을 수술해 주는 사랑의 메신저 운동도 ...
  • 2007-01-28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