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추모글]백지경, 그는 장백현의 모범현장이였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월25일 08시43분    조회:585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백지경

전임 장백조선족자치현 현장 고 백지경의 감동이야기

전임 백산시 통전부 부장, 전임 장백조선족자치현 현장인 백지경선생은 지난 2017년 12월 8일에 향년 82세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러나 일편단심 당에 충직하고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수정같이 청렴한 백지경은 당지 인민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장백현에 가서“백현장”이라고 하면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람마다“우리의 모범현장”이라고들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백지경은 길림성 집안시 태평향 태생(1936년생)이다. 그와 장백현과의 인연은 1966년부터 시작된다. 그해 소수민족 우수청년간부로 발탁된 그는 편벽한 변강지역인 장백현 14도구공사에 배치받아 선후로 당위서기와 주임으로 몇년간 사업했다. 1973년부터 1983년까지는 장백현 부현장, 1984년부터 1992년까지 선후로 장백현 부서기, 현장을 담임했다. 1992년에 백산시 통전부 부장으로 전근해 사업하다가 1994년에 정년퇴직했다.

백성의 실제 문제를 해결해주는 급시우

 

1973년에 장백현 부현장을 담임한 그는 농업을 책임지고 림업, 수력, 전력 등을 관리하게 되였다. 그 당시 장백현에는 농사짓는 농민들마저 식량부족으로 해마다 국가의 배급을 타먹어야 했다. 식량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백지경은 식량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보로 30리길을 걸어다니며 새 품종을 개발하고 화학비료 인입에 박차를 가했으며 실험전재배에 몰두해 끝내 증산을 이루어냈다. 화학비료로 밀식의 약점을 보강하고 밀식으로 옥수수와 벼 생산량을 무당 300~400근으로부터 무려 800~1000근으로 증산했다. 이는 당시 농사에서 큰 혁신이였다. 그때 개발한 새 품종은 몇년사이에 장백현의 80% 지역에 보급되였다.

식량문제를 해결한 뒤를 이어 백지경은 또 농민수입 증대에 달라붙었다. 인삼재배로 농민들의 수입을 올리려 했지만 당시 인삼재배는 나무채벌, 삼림훼손 등 리유로 허가가 잘되지 않았다. 그는 장백현 혁명위원회 부주임 곽택유를 찾아 현황을 회보, 곽택유의 지지를 얻게 되였다. 그후 전 현 각 공사와 생산대마다 인삼을 심게 되였고 빠른 시일내에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되였고 얼마 지나 인삼재배는 합법화되였다. 이같이 인삼재배는 장백현 인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장백현의 경제사업을 춰세우는데 없어서는 안될 제일 큰 효자산업,기둥산업으로 되였다. 

과학기술이 보급됨에 따라 인삼생산 원가가 줄어들고 인삼생산량이 부쩍 늘어나면서 인삼 한근에 30원까지 올라가 전 현의 인삼판매액이 3억원을 돌파한적도 있었다. 인삼생산이 호황을 이루어 현내 로동력이 모자라 타성에서 만여명의 로무자가 장백에 밀려든적도 있었다.

장백현 민족교육의 든든한 터전을 만든 민족간부

1980년에 백지경은 장백현당위원회 상무위원, 장백현 정부 부현장을 담임, 문화, 교육, 위생 분야를 책임지게 되였다. 당시 대학입시제도는 회복되였지만 장백현의 조선족 입학률은 너무 낮아 말이 아니였다. 민족교육사업은 거의 붕괴 상태에 처해있었다. 장백조선족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하나둘 한족학교로 빠져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조선족들은 한족학교에 가지 못하게 규정하자고 주장했지만 백지경은 이런 억지공사는 타당치 못하다며 대학입학률을 높이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는 대학입학률은 장백의 인재래원, 인재안정, 민족교육의 흥망과 관계될 뿐만 아니라 전 장백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교육분야에서 교육의 질을 높이고 입학률을 높일데 대한 대토론을 벌렸다. 한편 그는 짬만 있으면 학교에 내려가 여러 모로 의견을 들어보았고 심지어 선생님들의 수업을 직접 들으면서 좋은 경험을 찾아내고 보급하여 장백현적으로 전례없는 교육열을 불러일으켰다.

3년간의 끈질긴 노력끝에 입학률은 올라갔고 해마다 백여명씩 대학에 입학, 전국의 평균수준을 초월했다. 지어 북경대학, 청화대학 등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교육건물, 문화체육, 위생, 방송, TV 등 교육문화 기본시설에 대한 건설에도 모를 박았다. 당시 장백의 교실은 단층집인데다가 위헙건물이였고 텔레비죤 중계방송시설이 없어 백성들이 국내 텔레비죤마저 시청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지경은 몇번이고 관계 부서와 국가와 성, 시 해당부문에 찾아가 걸린 상황을 회보하면서 대책을 강구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끈질긴 노력끝에 현실험중학교 8000평방메터, 현1중, 현중의원, 도서관, 문화관, 무선방송국, 텔레비죤방송국, 영화관 등 층집건물이 륙속 일어서게 되였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 현장의 손 잡다

장백현에 대한 백지경 현장의 기여는 이뿐만이 아니다. 몇년간의 노력을 거쳐 장백의 우세인 규조토 산량을 1000톤에서 1만 5000톤으로 늘여 당시 아시아에서 제일 큰 구조토려과제공장을 세웠으며 수력발전소, 제약공장, 목재가공공장을 세워 취업문제를 해결하고 재정수입을 올렸다.

또한 장백-송강하도로 건설로 이틀이 수요되는 거리를 2시간 30분으로 줄였고 현성의 상수도, 가로등, 하수도, 아스팔트길, 행인보도, 록화 등을 5년만에 완수해 장백의 백성들에게 편리를 도모해주었다.

장백현의 백성들은 장백현을 위해 로고를 아끼지 않은 백지경 현장을 잊지 않고 있다. 백지경 현장이 장백현 어디를 가나 백성들이 반겼다. 한번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길거리를 누비던 한 사람이 백지경 현장을 보더니 그의 손을 덥썩 잡고 “백현장님은 장백의 인민들을 위해 좋은 일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저는 로동자로 일하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당신은 어디라도 가지 마세요.”라고 마음속의 말을 터놓았다.

아직도 백성들은“장백에 많은 인재가 나왔는데 백현장의 공로가 아주 큽니다.”,“현성으로부터 농촌까지, 압록강으로부터 산골짜기에 이르기까지 훤칠하게 자라난 몇십만무를 헤아리는 나무들은 백현장이 장백의 자손후대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훌륭한 유산입니다.”라며 백지경 현장에 대해 치하를 아끼지 않고 있다. 

나라의 돈 한푼 아껴 입원도 거부

장백현 인민들을 위해 밤낮없이 사업에만 몰두한 백지경 현장의 몸은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졌다. 면역력이 낮아 감기에 자주 걸렸고 감기에 걸리기만 하면 페염이 오군 했다.

맏딸 백정숙녀사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억하며《아버님은 3년동안 페염에 걸렸댔는데 신체가 너무 허약하다보니 퇴근하여 200-300메터밖에 안되는 집까지 오는데도 힘들어했다. 신과 솜옷마저 무거워 발을 옮기기 힘들 정도였다.》며 《휴식을 취하라는 자식들의 권유는 전혀 듣지 않는 <고집불통>이였다.》며 목이 메여 말한다.

그후에도 백지경은 선후로 직장암으로 대수술과 함께 약물치료를 받았으며 당뇨병까지 겹치면서 치료를 계속 받아야만 했다.

그 당시 백지경은 장춘을 오가며 병 치료를 할 때도 단위 차를 타고 다녀도 무방했지만 번마다 8-9시간이나 걸리는 먼길을 장도뻐스를 타고 다녔다.

퇴직후 의료보험으로 입원수속을 하고 편안하게 병치료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수술을 마친 이튿날이면 나라의 돈을 더 쓴다고 자식들한테 퇴원수속을 할 것을 끝까지 고집한 백지경이였다.

“당, 정부, 조직에 부담주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가 생전에 철칙같이 지키온 원칙이였던 것이다.

중환자실에서도 정부사업보고 전문(全文)을 학습

퇴직후에도 백지경은 해마다 나라의‘정부사업보고’, 인민대표대회와 정협회의의 정신 등을 학습했는데 열심히 적어둔 두툼한 필기책만 다섯권이 된다.

백지경은 ICU(중환자실)에 누워서까지도 딸한테 부탁해 한글자도 빠뜨리지 않은 정부사업보고 전문(全文) 판을 가져오게 해서 읽었다. 백정숙녀사는“우리 자녀들은 이 책을 유산으로 남겨 대대손손 후대들에게 물려주겠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백씨 집안 모두가 우리 나라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

생전에 백지경은 설마다 자식들을 앞에 앉혀놓고 이렇게 일깨워주군 했다.

“우리는 항상 중국공산당에 감사해야 한다. 이 같은 행복한 삶을 살수 있는것은 모두 공산당의 덕분이다.”며 “간부직에 있으면 돈을 벌려 하지 말고 돈을 벌고 싶으면 간부로 되지 말라”는것이 그가 자녀들과 자주 당부하는 말이다.

지난해 12월에 자식들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간소한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에는 가족과 지인 몇분 그리고 장백현정부 대표 몇명 밖에 참가안했다. 장백현 정부 대표는 장례식에서 백지경 현장의 고매한 품격과 장백현에 대한 그의 업적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평생을 당과 인민에 충성한 백지경 현장의 우수한 업적과 감동적인 사연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다.

 

/글 길림신문 최화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나의 새납도 새 주인 찾아야 할텐데. 문화예술이 빠르고도 자연스럽게 국경을 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그러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있다. 이제 누군가는 전통을 외면한다. 전통 자체가 현대인의 정서에 공감을&nbs...
  • 2017-03-23
  • (흑룡강신문=하얼빈) 지난 12일 습근평주석이 제12기 전국인대 5차회의 해방군대표단 전체회의에 출석해 발언을 했다.   이 회의에서 9명 대표가 선후로 군사분야에 관한 발언을 했는데 드물게 한 녀성 소장(少将)이 유난히 눈에 띄였다. 로켓군장비연구원 모 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조선족 리현옥대표였다.   1964년에...
  • 2017-03-22
  • “춤은 내 운명”, 습근평총서기께 장고춤을 선보인 23세 조선족 청년 지난 2월 24일,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제3채널 “무용세계” 프로에서 소고춤을 추는 한 청년의 무대를 우연히 접했다. 조선족인듯한 모습에 이끌려 자막정보에 따라 중앙민족대학교 무용학원을 찾았다. 그리고 취재중에 알게 된 또...
  • 2017-03-22
  • 연변범서방플라스틱유한회사 총경리 조광훈의‘인생사전’ 1986년에 도문시민족비닐공장을 시작으로 오늘까지 30여년 간을 드팀없이 공장장(경리)직을 지키고 있는 연변범서방플라스틱유한회사(미국독자) 조광훈(63) 총경리는 불가능에 도전하며 성공을 이룩한 사나이로 그의 인생사전에는 ‘안된다’...
  • 2017-03-21
  • 제자를 가르치고있는 김성삼선생. 손끝이 선우에서 춤을 춘다. 둥기당당 둥당당… 아름다운 선률은 이내 공간을 가득 메운다. 15일, 국가급무형문화재 가야금전승인 김성삼선생(62세)을 만나 우리의 전통악기 가야금의 흥미로운 세계를 엿볼수 있었다. ■ 우리의 정서를 품은 악기 김성삼선생은 모든 민족악기가 그러...
  • 2017-03-16
  • 길림성조선족기업가협회,길림신문사 공동주최 계렬보도-길림성조선족기업인탐방 (1) 길림성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 리송미회장 인터뷰 리송미 프로필: 1973년생. 신생활그룹(중국)유한회사 화동지역 총경리 길림성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 회장 전국조선족기업가협회회장단 상무부회장 길림성조선족기업가협회 상무부회장 연변사...
  • 2017-03-09
  • 동북항일련군 로전사 리민녀사 (흑룡강신문=하얼빈) 박해연 기자= “중국의 항일투쟁사는 8년이 아니라 14년이다. 이번 학기부터 중소학교의 력사교재에 이 부분을 새로 수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쁘다. 수많은 렬사들의 피로 물든 이 6년도 우리 후대들은 알아야 하고 또 잊어서는 안된다.” 동북항일련군...
  • 2017-03-07
  • 자연과의 만남은 늘 경이로워서 때론 바람 한점, 구름 한폭에도 온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때가 있다. 연변은 특히나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 푸근한 향토풍정을 느끼게 만든다. 박청운화가(54세...
  • 2017-03-02
  • -고 전청송화백의 유언을 두고  지난세기 90년대초의 고 전청송화백 일전 필자는 한국 《연합뉴스》 왕길환기자가 쓴 “24억원 아래로는 팔지 말라…기회가 되면 그림을 팔아 좋은 일에 써달라”는 제목의 고 전청송화백(1946-2013, 연변일보사 미술편집) 유작전시회 관련 기사를 읽었다. ...
  • 2017-02-28
  • 종이에 자신들의 언어와 기억을 저장한 외에도 우리의 조상들은 종이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물건들을 만들어 썼다. 종이가운데서도 흔히들 “한지”라고 부르는 조선종이는 질기고 오래 보존할수 있는 장점때문에 명품종이로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이처럼 질 좋은 한지로 만들어낸 일상 도구들은 보기에...
  • 2017-02-25
‹처음  이전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