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우리가 모르고 먹었던 풍무(丰茂)양꼬치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3월27일 09시29분    조회:965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윤룡철

북경에서 근무하면서 양꼬치 생각이 날 때면 우선 순위로 풍무양꼬치를 찾곤 한다. 일주일에 네번씩 풍무양꼬치를 약속 장소로 정하고 모일 때도 있었다. 한주일에 네번씩 가고 나면 몇달 동안은 양꼬치 생각이 날것 같지 않다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또 생각이 난다. 신기하다. 어쩌다 고향에 가도 양꼬치, 광주에 출장을 갔을 때도, 한국에 가서도 풍무양꼬치를 어김없이 찾았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다니면서도 연변에 뿌리를 둔 조선족 별미 양꼬치집이 누구의 경영력에 의해 세계 각지로 뻗어나갔는지 최근에야 관심을 가져보게 되였다. 그래서 이제라도 그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300원으로 시작한 구멍가게

  풍무는 29년전 30평방메터도 안되는 단칸방에서 시작됐다. 료식업 종사자들을 보면 대다수가 먹을줄 아는 입맛과 과감히 시도하는 담력을 갖고 있다. 풍무양꼬치의 리사장이자 창시자인 윤룡철도 례외가 아니였다.

  1991년 윤룡철 사장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모 저축소 직원이였다. 친구와 술 한잔 마음껏 기울일 수 있을만큼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으로 윤룡철 사장은 친구의 동생과 함께 자그마한 양꼬치 가게를 차렸다.

  다 그렇듯 창업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첫 한달사이에 벌써 손해를 가득 봤습니다. 그때 벌써 친구는 ‘거둬치우자’고 했습니다”

  윤룡철 사장에게는 찬물을 끼얹는 소리였다.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윤룡철은 지금의 안해, 당시의 녀자친구와 녀자친구의 언니, 동생들을 “모셔와” 정신을 차리고 운영에 정력을 쏟았다. 무작정 덤비기식이 아니라 운영 방식에 대해 처음 고민을 해보게 됐다.

  직원과 교류하고 있는 윤룡철 사장

  “그때는 길거리에서 파는 위생적이지 못한 양꼬치가 전부였습니다. 저희도 갓 개업했을 때는 쇠로 된 화덕 위에 구웠습니다. 연기가 어마어마 했지요. 연기 때문에 겨울에는 거의 먹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조선족은 원래 깨끗한 민족이잖아요, 그래서 연기를 아래로 배출하며 양꼬치를 구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연기를 아래로 흡입해들이는 지금의 구이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풍무가 처음이였습니다. 연기없는 가게로 바뀌자 고객들이 깨끗하다며 많이 찾아왔습니다.”

  환경과 설비 면의 개선 외에도 윤룡철 사장은 여러가지 양념들을 갖춰놓았다.

  “일반적으로 그때의 양꼬치집은 찍어 먹을 수 있는 양념이 단일했습니다. 저희는 아주 매운 양념, 참깨 양념, 일반 양꼬치 양념, 고추장 양념까지 갖추었지요”

  다양한 시도과 개선으로 풍무양꼬치를 찾는 고개들이 갈수록 늘어갔다. 1995년까지도 풍무양꼬치는 30평 규모였다. 매일 3만7천여개 꼬치를 팔았고 식사 시간대면 고객들이 줄지어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1998년 풍무양꼬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고객이 가장 많이 찾는 양꼬치 가게로 되였다.

  윤룡철 사장

  윤룡철 사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늘 배우며 리사장으로서의 자격을 충실히 다졌다.

  “아마도 3개 분점까지 차렸을 때였을 겁니다. 더 이상 경영해 나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계를 느낀 것이지요. 한차례 우연한 기회에 심수 료식업회사 강습반 초청장을 받게 됐습니다. 그때의 그 강습반이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 부딪힌 많은 난제들에 답을 제시해 주었고 강습을 계기로 저의 관리리념 자체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

  배우기에 게을리 하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혁신했기 때문에 풍무양꼬치가 오늘까지 견지해 올 수 있었다고 윤룡철 사장은 말한다. 오늘까지 이어오면서 윤룡철 사장은 풍무양꼬치 내부 인테리어를 여러 차례 바꾸며 변해가는 고객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도록 노력했다. 윤룡철 사장에 따르면 현재 풍무양꼬치는 1년에 강습비용만 수백만원을 투입한다.

  2008년 친구와의 식자자리에서 윤룡철 사장은 풍무양꼬치의 북경 진출 사항을 결정했다.

  북경 망경에 자리한 풍무양꼬치 카운터

  “제가 존경하는 형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저를 북경에 불러 식사자리에 초대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얘기가 나왔습니다. 북경 망경에 풍무를 세우면 어떻겠냐고요. 선뜻 응답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개업한지 10개월도 안돼 본전을 뽑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북경 망경점의 성공은 윤철룡 사장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 자신감으로 풍무양꼬치는 상해, 장춘, 소주, 무석, 상주, 울란호트 등 전국 도시로 빠르게 뻗어나갔다.

  견지가 답이다

  국내 료식업계에는 한가지 “저주식”의 규률이 있다. 각 지방 전통 특색 음식 이외의 기타 료식업 기업의 생명 주기는 3년에서 5년으로 보편적으로 비교적 짧다는 설이다. 실제로 이 “저주식”의 규률을 타파하는 료식업 기업이 적은 수에 불과하다. 풍무양꼬치는 그중의 하나이다.

  윤룡철 사장이 볼 때 28년의 시간을 지나온 풍무양꼬치가 오늘까지 견지해올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은 품질에 대한 엄격한 요구였다.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풍무양꼬치는 환경과 차림 종류 면에 정력을 들였다.

  먼저 환경 면에서 식객들의 립장이면 어떤 환경을 선호할가? 랑만적이고 도시적 느낌이면 좋겠다. 그리고 주방은? 고객들이 다 들여다 볼 수 있게 투명하면 좋겠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니까. 2013년 풍무양꼬치는 중고급 식당에서만 볼 수 있었던 투명주방을 대중적인 양꼬치 음식점에 옮겨다 놓고 식품안전에 대한 고객들의 우려를 최저한도로 낮추었다.

 

 

  윤룡철 사장이 “투명주방” 결단을 내린 건 2003년 품질 문제로 인해 닥친 위기 때문이였다. 고객이 급격히 줄더니 급기야 파산 직전까지 이르렀다.

  “위기가 닥치기전 풍무양꼬치는 이미 초보적인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당시 료식업계에는 중앙주방 건설을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풍무도 수천만원을 들여 연길에 중앙주방 시스템을 앉혔습니다. 그런데 중앙주방을 앉힌 뒤로 맛이 떨어졌습니다. 원인을 살펴봤더니 중앙주방 시스템으로 식자재를 포장하고 운송된 물건을 받고 나서 다시 랭장고에 넣어 보관해 사용하는 과정이 식자재 본연의 맛에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양꼬치맛이 많이 못해졌다는 고객들이 많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폐식용유’를 사용한다느니 양고기가 아닌 다른 고기를 사용한다느니... 이런 소문들이 돌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폭락했습니다.”

  서패유면촌 내부

  윤룡철 사장은 1년간을 북경에서 생활하면서 해법을 찾았다. 북경에는 서패유면촌(西贝莜面村)이라는 면집이 있다. 어느날 윤룡철 사장은 이 면집에서 계발을 받았다. 투명주방으로 고치면 떨어진 신뢰를 다시 주을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윤룡철 사장은 기존의 인테리어를 뒤엎고 새로운 인테리어 고안에 착수했다.

  “집 몇채를 담보로 3500만원을 대출받았습니다. 대출받은 돈을 들고 설계사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의 설계사 한분이 컨테이너풍에 투명 주방이 더해진 인테리어를 제안하더군요. 국내에는 그때까지 그런 인테리어의 구이집이 없었습니다”

  윤룡철 사장은 또 주방 바닥을 전부 흰색 대리석으로 고쳤다. 더러워지면 한눈에 보아낼 수 있고 관리도 편했다. 직원들에 대한 요구도 높혔다. 이로써 고객들은 식품안전에 대해 “직관적인” 보장을 얻게 됐다.

  차림 종류에 대해 풍무는 28년간 줄곧 현장에서 꿰여 식탁에 올리는 방식을 견지했다. 초창기 이런 방식은 작은 가게의 경영 방식이였다. 그러나 규모가 커지고 투명 주방이 생긴 뒤로 윤룡철 사장은 바로 꿰서 식탁에 올리는 방식이 고객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고 품질도 보장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임을 깨쳤다.

  “지금 저희는 아침에 문을 열어부터 양고기를 꿰는 작업을 합니다. 오전에는 점심에 팔 고기를 꿰지요. 모든 고기는 꿴 뒤로 6시간내로 반드시 팔아야 합니다. 팔지 못해도 나머지 고기는 식탁에 올리지 않습니다”

  20여년간 “양꼬치업”에 종사해 오면서 윤룡철 사장은 줄곧 가장 좋은 양고기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북경에 온 뒤로 그는 북경인들이 양고기를 즐겨 먹을뿐만 아니라 “수도인”답게 먹을 줄도 알고 좋은 양고기를 선택할 줄도 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북경 료식업계 지인이 누린내가 적고 느끼하지 않으면서도 고소한 식감의 소니드양을 윤철룡 사장에게 추천했다. 소니드양의 산지는 100여가지 중약재가 나는 내몽골자치구 소니드좌기이다.

  2015년부터 풍무양꼬치는 6개월에서 8개월 된 소니드 새끼양만 선택해 현지에서 전국 각 지의 풍무양꼬치 분점으로 운송했다. 최남단으로 상주, 상해, 무석에까지 소니드 양을 운송했다. 원가는 15% 이상 늘었지만 전국 어느 풍무양꼬치에서나 최상급의 양고기 식자재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확보했다.

  환경과 식자재 면에서 들인 노력이 효과를 나타냈다. 풍무양꼬치는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에 삼겹살 데이가 있다면

  풍무는 “8.18 꼬치구이의 날”

  강습, 무연 꼬치구이, 소니드양 공급, 인테리어도 좋지만 윤룡철 사장이 공을 들이는 부분이 또 한가지 있다. 바로 브랜드 건설과 혁신력이다. 자체 매체를 유용하게 활용하고 사회 군체의 력량을 충분히 리용한다. 틱톡과 같은 신생 미니영상 플랫폼을 통해서도 풍무양꼬치를 홍보한다. 그리고 풍무양꼬치의 브랜드 혁신 방식을 한가지 더 꼽자면 자체의 “8.18 꼬치구이의 날”을 만든 것이다.

  “8.18 꼬치구이의 날” 행사는 꼬치구이계에서 “11.11 할인 행사의 날”과 같은 효과를 형성하고 나아가 분점 규모를 더 늘려 818 꼬치구이의 날을 료식업계의 한가지 정기행사로 자리매김시키려는데 취지를 두고 있다. 지난해 818 전민 꼬치구이의 날, 풍무양꼬치의 영업액과 고객수 모두 크게 증가했고 브랜드 조회수는 10174594차례에 달했다.

  요즘 성행하고 있는 배달 방식을 풍무양꼬치도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배송기간 양꼬치가 식어서 맛이 떨어진다는 고객의 반응을 접하고 풍무는 즉각 배달서비스를 중단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해 식당에 올 수 없는 고객을 고려해 풍무는 집에서 구워먹을 수 있도록 모든 설비를 함께 제공하는 집배달 서비스를 개통해 양꼬치의 질과 맛을 보장했다. 집배달 서비스는 많은 기업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소주에서는 삼성그룹 신년회에 구이서비스를 요청했고 현장 2000명 직원들이 둘러앉아 양꼬치를 먹는 “양꼬치 파티”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윤룡철 사장은, 향후 풍무양꼬치가 본받아야 할 것은 해저로(海底捞)의 정신과 담력이라며 그 목적은 다름 아닌 샤브샤브처럼 꼬치구이를 신생 중국 음식의 한가지 상징으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조선어방송넷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강종호의 풍경유화 조명 역영(易英) 강종호의 유화작품은 인물, 정물과 풍경 등 다양한 방면을 아우르지만 가장 많이 그린 것은 역시 풍경이다. 그가 붓터치와 색채로 부각해낸 향토의 거친 자연미는 사람...
  • 2020-10-16
  • 연변가무단의 저명한 독창가수인 렴수원씨는 국가 1급성악가이다. 렴수원씨는 중학시절 음악선생님의 우연한 발견으로 중소학생문예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뜻밖에 독창 특등상을 따내게 되여 가수의 길을 걷게 되였다. 그후 렴수원씨는 연변대학 예술학부에서 전화자교수의 지도를 받았고 졸업후 상해음악대학성악학부에 가서...
  • 2020-10-15
  • 녕안시 조선족중학교 최화길 선생님 녕안시 조선족중학교에서 최화길(58세) 선생님이라면 그 누구나 엄지 손가락을 내보인다.  뜨거운 사업열정과 헌신정신, 독특한 조선어문 교수방법 등으로 유명한 분이다. 학생들을 잘 가르쳐서 정평이 나있는 외에도 최화길 선생님은 학생들로 하여금 푸근하고도 넉넉한 아버지와...
  • 2020-10-13
  • 제3회 ‘단군문학상’ 소설부분 수상자 림원춘소설가. 제3회 ‘단군문학상’ 소설부분 수상자 림원춘소설가는 1937년 태생으로서 올해 여든이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열정으로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1960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1982년부터 1996년까지 연변작가...
  • 2020-10-12
  • 경기민요가수 김순희는 연변은 물론 중국 전토와 한국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가수이며 우리 민족의 전통 민요의 맥을 잇기 위한 사명감을 갖고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전통민요를 가르치고 있는 교수이다.   전화자선생님과 함께    그는 1992년, 연변대학 예술학원 민족성악전업 본과반에 진학...
  • 2020-10-10
  •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관광산업은 전례없는 타격을 받았다. 비록 영업이 복구된지 여러달 되지만 사람들이 아직도 코로나19의 공포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관광업 회복속도는 어느 업종보다도 더디다. 완전히 일상으로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 많은 관광업체들은 잠시 휴업하거나 다...
  • 2020-10-09
  • "중·한방송교류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하는 것이 최대 소원"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한국사무소 리호국 전 대표 인터뷰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한국사무소 이호국 전 대표, 취재 현장에서   지난 2004년 4월부터한국에 체류하면서 한중간의 중·한방송교류 및 발전에 크게...
  • 2020-09-29
  •   북경사범대학 2018년 학술년회에 초청을 받고 연설하고 있는 북경대학 박세룡교수(자료사진) ○50명 청년과학자 1.5억원 상금 획득 ○국내 정상급 청년과학자 1,200여명 경쟁에 참가, 경쟁률 25: 1 ○중국과학원과 중국공정원 원사 800여명 평심에 참여 25일, 제2회 ‘과학탐색상’ 수상자 명단이 정식으...
  • 2020-09-28
  •     (부분) 랑송: 김형자  "학창시절 조선어문 과대표를 맡으면서 시만 보면 읊어보고 싶었고, 어려서부터 시만 보면 좋았습니다." 학창시절부터 긁읽기를 좋아했다는 김형자씨, 랑송이거나 강연이 있으면 앞장서 참여해 영예를 따냈습니다. 하지만 넉넉치 못한 집안 사정때문에, 또 남편과 자식 셋 뒤바라...
  • 2020-09-28
  •  커시안그룹 박걸 동사장의 어머니 이영희 여사​   ▲사진설명: 이영희 여사가 아들 박걸 동사장, 손녀 박리나, 증손녀 김샛별과 함께 4세동당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천고마비의 황금계절을 맞이하여 베이징 왕징(望京)에 위치한 하얏트(凯悦호텔 2층 연회청에서 베이징시 조선족 각 단체 대표들과 친척...
  • 2020-09-26
‹처음  이전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