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전통무술의 화려한 탄생과 명분
제11회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경기대회(올 9월,정주)에서 길림성 무술팀 감독 맡은 김봉진 감독(66세)
김봉진 감독은 중국 조선족 전통 무술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지만 전통 무술의 력사는 그의 가문이 조선반도에 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중국무술이 조선반도에 전해진 력사는 근 500년이 되지만 체계적이고 특색 있는 민족무술이 탄생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반도 이북, 할어버지를 일찍 여읜 김봉진의 가족은 할머니가 직접 나서 집을 지켜야 했다. 김봉진의 추억 속에 할머니는 다듬이 방망이를 늘 배게 밑에 숨겨놓고 강도나 일본인들이 쳐들어올 때면 용감히 싸워 그들을 몰아냈다. 날이 갈수록 할머니는 다듬이뿐만아니라 기타 농기구를 무기로 다루는 요령을 숙지하였고 적들을 정밀하게 타격할수 있는 동작들을 창작했다. 그후 김봉진의 할머니는 동네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자타공인 조선족무술의 제1대 창시자로 인정받았다. 그후 김봉진의 할머니와 아버지(제2대)는 울라지보스또크로 피난갔다가 훈춘을 경유해1943년부터 화룡 복동에 정착하였는데 다니는 곳마다 무술가문으 명성을 떨쳤다.
청년시절의 김봉진
무술은 흔히 권법과 무기 두가지로 나뉜다. 그중 조선족 전통 무술은 무기를 위주로 하는 전통 무술로서 도리깨, 떡메, 다듬이, 지게, 칼을 비롯하여 생산과정에서 자주 사용하는 농기구를 무기로 삼고 권법은 무기동작을 맨손으로 재연시키는 동작이 많다. (이를테면 도리깨권법连极拳).
조선반도 시절부터 유래한 전통 무술이 생산과정에서전변한 민족전통체육이라고 한다면 진정으로 규범화되고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은 중국 조선족 전통 무술은 사 제3대 전승자인 김봉진으로부터 탄생된것이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은 김봉진의 가문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구현되였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봉진은 무술에 대한 할머니와 아버지의 열애를 그대로 본받았다. 9살부터 그는 민간 사부들로부터 태극권 등 중국무술을배웠고 20대 초반에는 아버지의 영향하에 실제로 농사일을 하면서 도리깨, 떡메 등 무기를 다루고 무기제작하는 법까지 습득했다. 1978년 사업참가후 체육교원을 맡으면서 최초로 무술대를 꾸린 그는 조선족무술과 중국무술을 결합시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후 더 좋은 교수를 위해 김봉진은 북경체육학원에 입학하여 진수하면서중국무술명가로부터 “查拳”, “形意拳” 등을 배웠다. 이에힘입어 그가 가르친 아마추어팀의 수준은 성급 프로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고 전국대회에서까지 이름을 올리며 명성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김봉진과 무술제자들
지난 세기 80년대초, 우리나라에서는 전통무술을 발굴하고 무술문화유산을 구조하기 위해 전국무술발굴정리사업(全国武术挖掘整理工作)을 전개하였다. 조선족 전통 무술은 그때에야 비로소 중국 전통 무술의 한가지로,조선족병기는 중국 무술 18병기 이외의 기타 병기로, 김봉진은 조선족전통무술의 창시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중국무술 18병기(十八般兵器)
이로써 조선족전통무술은 단지 농업생산으로부터 전변한 민족체육종목에서 국가급 인정을 받은 체계화된 민족전통무술로 거듭났다.
대대로 이어진 30년의 분투
김봉진은 체육교육에 몰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운동선수로도 활약을 펼쳤다. 1986년 제3회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경기대회가 신강 우룸치에서 펼쳐졌다. 당시 대회에 참가한 소수민족 전통 무술은 종류가 너무 복잡한원인으로 경기규칙을 정하기 어려워 경기종목이 아닌 공연종목에 편입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봉진은 첫등장부터 최고상인 우수상을 수여받았다.
이 성적은 다만 조선족무술을 널리 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김봉진은 소수민족 무술이 공식 경기종목으로 정해지고 조선족 무술을 전통 소수민족 무술 1위의 시상대까지 끌어올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제4회부터중국 무술은 공식 경기종목으로 지정되였지만 소수민족무술의 경기화는 까마득하기만 하였다.
김봉진은 20년후 딸이 대신 자신의 꿈을 이루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2011년 제9회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경기대회 때부터 전통 무술은 공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되였다. 2011년과 2015년 귀양과 올도스에서 열린 두차례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경기대회에서 김봉진의 딸 김홍란 선수는 2등상 3개, 3등상 1개를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지난 대회에서 떡메 무술로 2등상을 받은 김홍란 선수
김홍란은 녀자인데다가 체구가 왜소하여 처음에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어린 나이에 포기할법도 하였지만 가문의 완강한 의지를 본받은 그는 어릴적부터 아버지따라 무술훈련에 땀동이를 쏟았다.
“저는 동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학에도 아버지를 따라 훈련기지에 가서 프로선수들과 훈련을 진행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도 할수 있는 무술을 왜 나는 안될가 하는 생각에 이심전심으로 훈련에 몰두할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불굴의 정신은 20년후 전국대회에서 훌륭한 성적을 받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였던 것이다.
김홍란의 경력은 아버지와 매우 흡사하다. 9살부터 중국 무술을 시작으로 20대 초반에 북경체육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후 연변대학 체육학원에서 무술교원을 맡으면서 역시 조선족 전통 무술 고양에 힘을 이바지하고 있다. 한편 김봉진은 퇴직후 연길시 중앙소학교에서 무술교원을 맡고 있다.
어깨가 무거운 조선족 전통 무술의 앞날
제11회 전국체육경기대회 길림성대표단의 최년소 선수인 김현건 선수(12세)는 김봉진 감독의 지도하에 지난 성급대회에서 훌륭한 성적을 받았던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그러나 9월9일에 있은 녀자 쌍무기경기(双器械比赛)에서 아쉽게도 다듬이가 부러져 상을 놓치게 되였다. 경비부족 때문에 김현건 선수는 부득이하게 4년전 대회에서 썼던 낡은 도구를 재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김봉진 감독이 직접 사비로 제료를 구입해 일부 도구를 손수 제작하였지만 병기 종류가 많고 크기가 각이해 모든 구멍을 메울 수는 없었다.
조선족전통무술이 직면한 도전은 이뿐이 아니다. 김봉진 감독이 가르치고 있는 6명의 무술꿈나무중 이번 데회에 출전한 선수는 김현건 선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경기에 불참했다. 평소 훈련도 옛날보다 훨씬 강도를 줄였지만 학부모들은 고달픈 무술보다는 보다 쉬운 다른 지름길을 선택하군 한다.물론 리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조선족무술을 이어나가는 중임은 모두 김봉진 가문의 어깨에 놓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 자체는 의미가 없고 조선족전통무술을 널리 알리고 사회적인 관심을 받게 하는 것이 진정 상보다 값진 의미라고 김봉진 감독은 말하고 있다. 올해 66세의 김봉진 감독은 앞으로 두기의 대회에서 감독을 맡겠다고 언약했다. 적어도 75세까지 조선족 전통 무술을 위하여 자신을 불태우겠다는 뜻이다. 김봉진 감독은 해남에서 열린 다음기 대회에 로년조가 생긴다면 모든 곤난을 무릅쓰고 스스로 출전하겠다고 다짐했다.
좌로부터 김홍란 선수, 김봉진 감독, 김현건 선수
김봉진 감독의 외손녀는 겨우 네살밖에 되지 않지만 가문의 영향으로 벌써부터 무술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다음 대회에서 딸, 외손녀와 함께 한무대에 올라 조선족 전통 무술을 빛내는 정겹고 자랑스러운광경을 전국인민에게 선사할 기대에 김봉진 감독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프로필:
무술사업을 열애하는 김봉진 감독은 무술사업에 32년,무술교육에 53년간 종사하면서 체계적이고 규범화된 중국 무술 각파 권법과 무기를 숙지하였고 중국무술의 발전 특히 중국 조선족 전통 무술의 발전을 위하여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중국조선어방송넷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