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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문의 원조 CEO는 어머님이셨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5월9일 08시47분    조회:4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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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황정자
삭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어머니를 회억하여

프롤로그
 
2020년 5월 4일, 23시 30분 경에 어머님께서 9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평생 학교문에 가보지도 못한 ‘까막눈’이지만 누구보다 생존철학이 뚜렷했던 어머님이,삭바느질 하나만으로 의령 남씨 가문의 가세를 일으켜세우신 ‘알부자’ 어머님이, 자나깨나 내 새끼, 내 가족만을 념려하면서 살아오신 분 같지만 주변사람들한테도 엄청나게 나눔을 실천하면서 살아오신 ‘통’ 큰 어머님이 속절없는 인생을 원없이 사시다가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다들 그만하면 장수하셨다고, 또복하게 돌아가셨다고 위로해주지만 자식된 마음은 그게 아닌가부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나면서 웬 눈물이 그리도 많이 흘러나오는지… 슬픈 내색을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면 쓸수록 가슴 속 한가운데로부터 오열이 터져나옴을 어찌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자식으로 태여난 이상 누구나 한두번은 겪게 되는 일이여서 공손히 받아들여야 하는데 왜 도무지 진정이 아니되는지? 생로병사가 인지상정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왜 그 자명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밤새도록 머리속에서 수만개의 의문부호들을 떠올리다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하고 어머님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보게 되였다.
어머님은 참으로 유별난 분이셨지! 체질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이 세상 여느 어머님들 하고 비교가 아니될 정도로 색갈이 다른 분이셨지. 자나깨나 내 자식을 생각하는 모성애도 유별났고 가문의 세대주인 아버님을 끔찍이 사랑하는 내조도 남달랐고 내 형제 내 친척을 보듬어안는 가족애도 남달랐고 내 친구, 내 고향, 내 민족, 내 나라를 사랑하는 포용력이나 생각의 스케일도 남달랐다. 거기에다 뭔 일을 시도함에 있어서 끈기도, 리더십도, 추진력도 남달랐다.
 
어머니는 키는 작아도 강자였다. 강자중에서도 아주 못말리는 ‘괴력’을 가진 초강자였다. 그런 강자였기에 그 다사다난했던 세월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이루고저 했던 소원을 거의다 이루시고 여한이 없는 삶을 마감하셨다. 돈도 벌 만큼 벌었고 자식농사도 남부럽잖게 하셨고 또 주위사람들한테도 베풀 만치 베풀었다. 자식의 립장에서 ‘위대한 어머니’니 ‘영웅어머니’니 하는 표현은 안하겠지만 한 가정부녀로 말하면 아주 성공한 삶을 살아온 것만은 철두철미한 사실이다. 그저 유감이라면 자신한테만은 너무나도 린색하게 살아오신 ‘짠돌이’셨다.
그래서, 아마도 그래서 그 원없는 인생을 살아오신 어머님을 문득 떠나보내기가 이다지도 힘든가부다. 이제 마음을 진정하고 그 유별난 어머니의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한 글자 두 글자 적어보려고 펜을 들었다. 작가도 아닌 내가 누구를 감동시키는 글을 쓸 수는 없겠지만 그냥 거짓이나 허구가 아닌 사실 그대로의 어머니를 그려보고저 한다. 그게 단편이 될지? 장편이 될지? 대하드라마가 될지는 나중에 판단할 일이다!!!
 
 

어머니의 유산
 
그런 유별난 어머님이 림종을 앞두고 깜짝 놀랄 만한 유산을 공개해 화제가 되였다. 이제 더는 말할 힘조차 없어 모기소리 만한 귀속말로 막내아들에게 저기 장농 속에 넣어둔 뭔가를 꺼내오라고 한다.
이윽고 장농 속 깊은 곳에서 비단으로 감싼 보자기가 나왔다. 헤쳐보니 그 속에서 웬 저축통장이 무더기로 나왔다. 세여보니 저그만치 37개다. 90 고령을 넘겨서부터 본인의 명의로 된 부동산을 자손들의 이름으로 명의변경을 해주어 ‘유산분활’은 이제 끝난 줄로 알았는데 이게 또 무슨 변이란 말인가.
“이것이 나의 마지막 유산일세. 나름대로 열심히 사느라 했는데 요지경뿐이여서 부끄럽네, 자네가 알아서 네몫으로 똑같이 나누어 가지도록 하게. 그리고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잘살아준다면 더 바라는 게 없겠네. 나는 아마도 아범 곁으로 가야겠네…”
“엄—마--!”
60 고개를 넘긴 막내가 젖먹이 때처럼 엄마를 부르며 눈굽을 찍는다.
한식경이나 울다가 눈물을 닦고 엉거주춤 꿇앉아 수판을 튕겨본다. 모진 세월의 풍상을 악으로 버텨오면서 꼬깃꼬깃 모아온 돈이라 통장싸이즈도 각각, 저금액, 적금일시도 제마끔이였다. 어떤 통장은 손때가 묻어 글씨마저 희미하다. 애오라지 자식들의 장래를 념려해 악착같이 돈을 모아온 어머님의 고달팠던 바느질인생이 저금통장 갈피마다에 아라비아수자로 또렷이 기입되여있다.
한식경이 지나서야 계산이 끝났다. 합산총액이 예상을 초월한 천문수자(액수는 상상에 맞김)다. 맙소사! 그 다사다난했던 세월을 버텨오면서 바느질 하나로 네 아들을 남부럽잖게 먹이고 입히고 또 나란히 대학생으로 키워낸 것만도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뭐가 부족해 림종을 앞두고 또 이런 거금까지 내놓아 자식들을 놀라게 하는지 참으로 못말리는 어머님이시다.
실은 그 네 아들도 어머니 유전자를 물려받아 세상 부러울 게 없이 잘살아가고 있는 조선족기업계의 CEO들이다. 맏이는 광주에서, 둘째는 청도에서, 셋째는 북경에서, 막내는 연길에서 내노라 하는 실체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제아무리 잘 나가는 기업인이기로니 한생을 삭바느질로 연길서시장의 력사를 써온 로모 앞에서만은 영낙없는 ‘새비’임을 페부로 느껴보는 순간이다. 어머니의 유산은 돈만이 아니였다. 어머니의 진정한 ‘유산’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백절불굴의 정신, 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주저앉지 않는 견인분발한 정신, 자신의 안일보다는 가족과 이웃을 생각하는 자아희생정신이였다. 그 아름다운 ‘유산’이 기강이 선 남씨 가문의 ‘가훈’을 만들었고 오늘날 남부럽잖게 잘 나가는 남씨 네 형제를 비롯한 자손들의 번성을 이끌어왔다. 
 
비운의 년대를 넘어
 
나의 어머니 황정자는 1927년에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여났다. 3살 나던 해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해 다섯 식솔이 두만강을 건너 왕청 팔과수라는데로 이민을 왔다.
외할머니는 팔과수에서 어머니 손아래로 외삼촌 황범송을 낳고 27살 젊은 나이에 페결핵으로 돌아가셨다. 젊은 나이에 안해를 잃은 외할아버지 황화순은 어린 남매를 하마탕에 사는 동생네 집에 맡겨두고 자기는 천교령쪽 목재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떼목운반공으로 일하면서 종자돈을 마련해가지고 다시 동경성 하마허재라는 곳으로 갔다. 그 하마허재 하면 석두역에서 30여리 떨어진 중쏘국경지대인데 외할아버지는 그곳에서 논도 일구고 적미소에 잡화점까지 운영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렇게 삶에 여유가 생기니 새장가도 들었다. 자식복이 많았던 외할아버지는 후실을 맞아 자식도 여럿을 낳았다.
집안에 잔밥들이 많아지자 외할아버지는 다시 하마탕에 건너와 큰딸만 데려다 집안 살림을 맡아보게 하면서 의복동생들을 돌보게 하였다. 그 때 어머님 나이가 고작 11살이였으니 고생문은 거기서부터 열린 것이다.
워낙에 활동적이고 모험을 좋아했던 외할아버지는 그후 도박에 빠져 하루아침에 가산을 다 말아먹고 빈털터리가 되였다. 더는 하마허재에서 살 수 없게 되자 화김에 그곳을 

떠나려 했다. 그러던 차 만몽회사에서 집단이민모집을 강행했다.외할아버지는 가족을 거느리고 그 이민행렬에 끼여들었다. 그렇게 이민을 간 곳이 흑룡강성 태래현 오묘자라는 곳이다.
그곳은 땅이 흔해 빠진 곳이라 밭갈이도 하지 않고 그냥 물을 듬뿍 대여서 씨만 뿌려도 농사가 잘되였다. 이렇게 몇년간 농사를 지었는데 늦가을에 만몽회사가 걷어가고 나면 남는 건 민식뿐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태극기를 든 젊은이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만세!”를 불러댔다. 일제가 투항하면서 광복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제 살맛 나는 세상이 온 거라고 다들 기뻐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무장을 한 지방토비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토비들은 “일본놈이건조선인이건 이참에 다 족쳐야 한다.”면서 마을에 불을 지르고 쌀마대를 메여가고 가축들을 략탈해갔다. 황씨일가는 오밤중에 쫓겨나 새밭에서 여러날째 숨어 지내다가 다 익어가는 곡식을 패대기치고 울며 겨자먹기로 야간도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찾아온 곳이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연변이다. 그 때 어머니 나이 18세였다. 어머니는 꽃다운 나이에 풍류인 아버지를 따라 동북산천을 전전하면 너무도 많은 고생을 하셨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문정일이 거느린 조선의용군 선견대가 연길에 진주하여 조양천에다 교도대를 설립했다. 그 지긋지긋한 ‘부엌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어머니는 선참으로 교도대에 입대지원을 했다. 교도대 산하에 선전대가 있었는데 주로는 토지개혁선전을 다니다보니 ‘토개선전대’라고도 불렀다. 어머니는 토지개혁선전원으로 연변지역을 많이 떠돌아다녔다. ‘노비’나 다름없는 삶을 살다가 선전원이 되여 혁명사업을 하러 다녔으니 얼마나 신이 났으랴.
그뒤 선전대가 길동군구에 편입이 되면서 어머니는 본의 아니게 군구 산하 피복공장에 들어가 일하게 되였다. 본의 아니게 총을 메지 않은 군인이 된 것이다. 피복공장에서 처음에는 실을 뽑는 일을 하다가 나중에 방직기가 들어오면서 천이며 수건 같은 걸 짜는 일을 했다. 매일과 같이 물레를 자아 실을 뽑아 천을 짰고 노오란 나무진액을 뽑아 염색한 천으로 군복을 지었다.
그후 길동군구가 심양, 길림으로 옮겨가면서 피복공장이 잠시 해산되였다가 다시 연변군분구 산하에 피복공장이 서게 되면서 계속해서 바느질과 연을 맺게 되였다.
 
어머니의 야망
 
공화국 설립을 한해 앞둔 어느 날 연길에서 길동군구 모범인물 표창대회가 있었다. 어머니는 피복공장 모범이 되여 대회에 참석했고 당시 도문자동차공회의 모범으로 남영철군이 참석하였다. 표창대회에서 두 청춘남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뒤 주변 지인들의 소개로 두 사람의 사랑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연변대학이 설립되여 장안에 화제가 되였고 뒤이어 새 중국이 탄생되여 온 나라가 환희로 들끓었다.
새 중국이 탄생된 바로 이듬해 봄에 어머니는 24살 꽃나이로 당시 이미 삼십대 중반을 넘긴 아버지와 결혼식을 올렸다. 북에서 건너온 남원 황씨 황정자양과 남에서 건너온 의령 남씨 남영철군이 남남북녀로 백년해로하기로 사랑의 서약을 맺은 것이다. 두분의 신혼은 이렇게 도문에서 시작되였다.
 
결혼한 이듬해에 맏아들 룡운이가 태여나자 어머님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여보, 우리 연길로 이사 갑시다. 앞으로 애들을 대학에 보내려거든 대학이 있는 곳에 가서 살아야지 않겠어요?”
어버지는 들었는지 먹었는지 잠자코 있다.
3년이 지나 둘째 룡해가 태여나자 어머니는 전에 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묵묵부답이다. 그 때까지 아버지는 그냥 기층에 내려가 사무를 보면서 한달에 고작 한번 정도 집에 들렸다.
그뒤 또 3년이 지나 셋째 남룡이가 태여났다. 이제나 저제나 연길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어머님이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용단을 내렸다.보아하니 아범을 기다리다가는 애들이 나이를 다 먹어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떡 정신을 차린 것이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새끼 셋을 낳도록 이게 무슨 꼴이지?…)
 
어머니는 생각이 굳어지자 곧장 도문의 집부터 경매에 내놓았다. 당시 3형제가 태여난 그 집이 도문에서는 상당히 으리으리한 단독주택이였다. 마당에 아버지가 몰고 다니는 쏘련제 카스차도 있고 또 어머니가 새끼들 건강 때문에 키우는 염소도 두마리 있었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 그 염소젖을 많이 먹었다. 집은 경매에 내놓자 바람으로 임자가 나졌다.
온 나라가 대약진의 열풍으로 끓어번지고 있는 그해 여름에 어머니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젖먹이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요긴하게 써야 할 가장집물들만 한보따리 챙겨 이고 큰아들과 둘째아들을 앞세워가지고 도문역에서 연길행 기차에 올랐다. 새끼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무작정 대학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게 공부 못한 어머니의 단순한 이사 동기였다.
그 때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난 세기 70년대말부터 80년대 초반까지의 사이에 어머니의 그 허황된 ‘야망’이 귀신같이 현실로 찾아왔다. 맏아들 룡운이는 안산강철대학에 붙어갔고 둘째 룡해는 강서대학에 붙어갔고 셋째 남룡은 중산대학에 붙어갔고 막내 룡일이는 연변대학에 붙어갔다.
 
창업
 
1958년도에 연길에 와서 첫번째로 장만한 집이 신화서점 부근에 위치한 30평짜리 단층집이다. 길역집은 아니지만 ‘책냄새’가 풍겨오는 집이여서 좋았다고 한다. 집 사고 남은 돈으로 어머니는 재봉침을 한대 구입했다. 재봉침만 있으면 적어도 새끼들을 헐벗게 하지는 아니할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그 당시 재봉침은 가정집들에서 가장 선호하는 귀한 가장집물이였다.
그 재봉침을 가지고 창업을 해보려는 의도는 아니였다. 워낙에 바느질에 애착이 있었던 터라 처음에는 아는 지인의 소개를 받아 어느 복장점에 기능공으로 들어가 일했다. 손부리가 여무진 데다 바느질에는 경력자이다보니 차차 어머님을 찾아오는 고객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찾아오는 손님들마다 만족한 웃음을 짓고 돌아갔다. 그러다보니 서서히 단골이 생겨났다. 후에 적지 않은 손님들이 리유불문하고 어머니한테만 바느질을 의뢰하는 일이 많아졌다. 복장점 주인을 대하기가 면구할 정도로 말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차츰 자기 점포를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1960년도에 어머니는 살던 집을 340원에 팔고 680원을 주고 영업에 주거가 가능한 보다 쾌적한 집을사들였다. 바로 연길시 번화가 서시장 길목에다 말이다. 어머니는 거기에서 처음으로 복장점을 시작했다.  
 
가게이자 사는 집이다보니 밤에 낮을 이어 시끌벅적했다. 저녁이 되면 어머니는 더 바삐 돌아쳤다. 식구들의 끼니도 챙겨줘야 하고 밀린 일감 때문에 밤을 새울 때도 많아졌다. 그럴 때면 우리 형제들이 비자루를 들고 청소당번으로 나서줬고 간혹 눈치를 봐가면서 설겆이도 했다. 어머니는 1년 365일 휴식일이 없었다. 매일 14시간 이상 재봉침을 마주하고 채바퀴처럼 돌아쳤다. 그러다 단체주문이 들어오면 련며칠 밤을 새우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때로는 재봉침을 돌리다 그 자리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는 극도로 피로한 상태에서 끄덕끄덕 졸면서도 바느질을 하다보니 바늘에 손끝이 찔리기도 했다. 엄마 손끝은 늘 피멍이 들어있었다. 바른손 중지는 바늘에 수백번 찔리여 보기 흉할 정도로 손톱이 다 무드러지다보니 손가락 길이도 한삼지나 짧았다.
바쁜 만큼 돈도 많이 벌었다. 그 때문에 우리 자식들은 학교 다니면서 해진 옷 입어본 적이 없었고 돈 그리운 줄 모르고 살았다. 대신 삼시 세끼 따뜻한 밥은 먹지 못했다. 그만큼 어머님이 일손이 딸렸으니 자식들의 끼니를 신경 써 챙겨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개체공상호를 제한하고 공사합영을 주도했다. 가도판사처에서 주변의 크고 작은 복장점포들을 규합하여〈신흥복장점〉이라는 대집체기업을 내왔다. 경력자인 어머님이 점장 겸 재단사로 선임이 된 것이다. 어머니 수하에 20여명 기능공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70년대말 신흥복장점 재단사로 있던 시절의 어머님)
 
70년대말에 접어들면서 우리 집 문앞이 보행거리로 바뀌였다. 비즈니스에 촉이 있는 어머님이 그 기회를 지나칠 리 만무했다. 어머니는 곧바로 사는 집을 상업용으로 용도변경을 하여 임대를 주었다. 그 바람에 집값이 껑충 뛰여오르자 아주 근사한 가격대에 팔아넘기고 보다 쾌적한 공간의 집을 사들였다. 새롭게 산 집 역시 원래 집에서 70메터도 아니되는 상권이다. 집도 컸고 해볕도 잘 들어오는 데다가 길역집이였다. 거주용으로도 제격이지만 비즈니스용으로는 더더욱 안성맞춤이였다. 어머니는 다시 확장공사를 들이대 거주환경을 극대화하였다.
그 당시〈신흥복장점〉에서 맞춤양복 한벌 주문하면 30~40일이 걸렸다. 명절 때가 되면 가정을 단위로, 또는 직장을 단위로 단체주문까지 들어와 어머니는 밤에 낮을 이어 바느질을 했다. 점장이다보니 늘 솔선수범이 되여 밀린 일거리를 집에 가지고 와서 작업하는 때도 많았다.
어머니는 이렇게 지난 세기 80년대말까지〈신흥복장점〉에서 점장 겸 재단사로 근무하다가 정년이 넘은 나이로 퇴임했다.
 
2차 창업
 
1980년대에 접어들어 중한관계의 물고가 트이기 시작했다. 셋째 남룡의 집착으로 KBS ‘리산가족찾기’프로를 통해 반세기 넘게 련락이 두절되였던 한국에 사는 옛 가족들과 련락이 닿았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나들이를 하게 되였다. 반세기가 넘도록 아빠 얼굴이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고 살아온 따님이 공항에 아버지 마중을 나왔다.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분단의 아픔이 재현되는 순간이였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 가족 분들은 매일과 같이 울고불고 야단인데 어머니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기분이다. 어머니는 서울땅을 밟는 순간 전신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심한 충동을 느꼈다. 한국과 중국의 의류시장 격차를 실감한 것이다. 어머니는 이튿날부터 홀로 시장조사에 나섰다. 마음이 급해졌다. 매일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다. 활성화된 한국의류시장은 어머니의 눈을 황홀하게 했다. 이번 기회에 뭔가 한건 해내고야 말 거라는 다짐을 한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구석진 곳을 지나다 우뚝 발길을 멈춰섰다. 골목상권인데 상당히 붐비였다. 찾아 들어가보니 입던 한복에 빤짝이도장을 찍어 새 한복 못지 않게 개량하는 복장재활점포였다. 순간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이거다! ”
 
어머니는 나름대로 이 프로젝트를 중국에 인입하기로 작심했다. 원가도 적게 들고 실용성이 짙은 데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조선족녀인들의 구미에 딱 들어맞을상 싶었다. 200만 조선족에 반 이상이 녀성임을 감안할 때 상당히 락관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한물이 간 한복을 새것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좋았고 성본을 따져볼 여지가 없어서 더 좋았다. 하지만 사업이라는 게 그냥 생각대로 척척 풀리는 게 아니였다. 많은 사전 점검이 필요했다. 우선은 본인이 그 기술을 투철히 장악했어야 했다. 그 다음 신용이 있는 원자재 공급상을 찾아야 했다.
밤에 낮을 이어 동분서주하던 어느 날 늦은 저녁 공공뻐스에서 내리다가 넘어져 발목을 크게 상했다. 발목골절상이란다. 이제 곧 귀국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말이다. 며칠간 치료를 받고 절뚝거리며 쌍지팽이에 의지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 몸에 샘플 몇트렁크 챙겨가지고 말이다. 어머님의 제2차 창업꿈이 서서히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때 어머니 나이 60세 후반이였다. 귀국후 어머니는 안정을 취할 여유도 없이 곧장 점포가동에 들어갔다. 우선은 예전에 함께 일했던 멤버들을 하나하나 불러들였다. 시험제작에 들어간 것이다. 반응이 아주 좋았다. 한복코팅사업은 한입 건너 두입 건너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나갔다. 연변은 물론 동북삼성에까지 순식간에 뻗어져나갔다. 한달도 안되여 가지고 온 원자재가 꽝이 났다. 가게며 집이 다 한복재가공 부서로 탈바꿈했다. 어머니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작업공간도 늘이고 기능공도 더 모집했다. 나중에는 여러 가공분점에 대리상을 두면서 본인은기술지도에 자료공급상으로만 일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시장이 오픈돼있는 것도 아니고 물류가 지금처럼 활성화돼있는 것도 아니여서 아이템만 제대로 잡으면 이상하리 만치 돈벌이가 잘되였다. 낡은 한복에 빤짝이를 찍어대는 건지 아니면 그냥 돈종이에 돈을 찍어내는 건지 헛갈릴 정도로 돈벌이가 잘되였다. 어머니는 고래희를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엄청난 부를 창출하셨다.
 
에필로그
 
어머니의 일터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그냥 반세기 넘게 재봉침 하고만 싱갱이질해오면서 살아온 인생, 그 바느질 하나로 어마어마한 부를 창출했고 또한 그 바느질 하나로 네 아들들을 의젓한 대학생으로, 사회인으로 키워냈다. 어찌 보면 어머니는 아주 평범한 일터에서 평범하지 않은 기적을 창출한 연길서시장의 살아있는 전설, 근대 중국조선족어머니의 롤모델이다.
그런 CEO 어머니의 DNA를 물려받은 네 아들의 비즈니스 후일담 또한 전설에 가깝다. 큰형님은 심수에서, 둘째는 청도에서, 셋째는 북경에서, 넷째는 연길에서 다들 부동한 분야에서 자기의 끼를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이 제아무리 날고 뛴다 한들 원초적으로 따지고 보면 그건 다 어머니의 영향과 갈라놓을 수 없다. 어머님이야말로 우리 남씨 가문의 진정한 CEO이다.
 
그래서 자고로 어머니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했던가. 정녕 그래서 어머님의 사랑은 경제학의 원리로는 도저히 해명이 불가한 무대가의 순수한 인간본능의 맹목적인 사랑이라 했는가. 그래서 …
사실 나의 어머니는 가렬처절한 전쟁년대에 목숨 걸고 싸운 군인도 아니다. 게다가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진 3.8붉은기수나 5.1로력모범 수훈자는 더구나 아니다. 그저 삭바느질 하나로 자수성가하여 한 가족을 멋지게 리드해온 수많은 조선족어머니들 중의 조금은 유별난 어머니일 뿐이다.
일제시대에 태여나 때이르게 어미 잃은 ‘아기새’가 되여 피눈물 나는 인생의 ‘보리고개’를 넘어온 어머니, 그뒤에는 계급투쟁만 부르짖는 눈물과 회한으로 얼룩진 ‘편견의 년대’를 용케 버텨온 어머니, 그런 어머니 사랑을 어떻게 경제학의 원리로 따져서 가격을 매길 수 있단 말인가? 혹여 매길 수 있다면 그건 무한대일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 어떤 천평으로서도 계량할 수 없다. 혹여 계량이 가능하다면 역시 무한량일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순위를 매길 수도 없다. 혹여 순위를 매긴다면 그건 초등급이여야 할 것이다.
“어-머-니!!!”
오늘 이 아들이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에 대고 어머니를 불러본다. 부디 천국에가셔서만은 안달복달 하지 마시고 평안하게 자신만의 삶을 즐기면서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버님과 함께 힐링의 여유를 보내면서 오손도손 아기자기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주: 우의 문장은 어머님의 림종을 며칠 앞두고 《연변녀성》5월호에 발표된 문장인데 다시 수정하여 온라인을 통해 여러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어머님을 하늘나라에 보내놓고 네 아들 내외가 모여서 가족회의를 했다. 가족회의 쟁점의 하나가 어머님이 남긴 유산을 어떻게 의미있게 쓸 것인가였다. 합의 끝에 어머님의 명의로 남씨 가문의 후세들을 위한 <교육장학금>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다음 쟁점의 하나는 어머님의 그 범상치 않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책으로 펴내 후세에 남기자는 것이였다. 

<연변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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