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민은 1924년 흑룡강성 라북현 오동하촌의 한 애국자 가정에서 태여났다.
부친 리석원은 일제에게 빼앗긴 땅에서 살기싫어 20세기 20년대에 중국 동북에 망명해왔으며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겪으면서 민족독립과 항일의 뜻을 굳혔다. 그러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련군 제6군 제1사에 참가해 후근처 처장까지 지냈고 1938년에 희생된 것으로 전해진다.
리민의 오빠 리운봉 역시 항일련군 제6군 제1사 6퇀의 정치부 주임으로 있었고 1942년에 희생되였다.
1936년 동북의 항일전쟁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 겨우 13살인 리민은 항일련군에 참가했다. 그는 리조린 장군이 거느린 항일련군 대오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녀전사였다.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리민은 취사원, 보급원, 선전원 등 많은 일을 했다.
1937년,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항일의 의지를 불태우던 리민은 중국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고 1939년에는 중국공산당원이 되였다.
항일련군 녀전사들
1로군 경비려 부분 장병들
그 어려웠던 시기를 회억하면서 리민은, 세상에 그 어느 전쟁도 동북의 전장처럼 처절하고 참혹한 전쟁은 없을 것이라며 동북항일련군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수십만 일본침략군과 14년동안이나 생사판가리 싸움을 전개해왔다고 말했다.
1941년 리민은 쏘련의 동북항일련군 주둔지에서 의학을 배웠고 또 특종병 훈련을 받았다. 특히 녀병으로 가장 일찍 락하산부대에서 락하산 훈련을 받았다.
쏘련에서 특종병훈련을 하던 시절 리민은 오빠 리운봉의 전우인 진뢰를 알게 되였고 얼마후 그들은 혁명적 부부로 되였다.
해방후 이들 부부는 계속 흑룡강에서 당 조직의 령도사업에 종사하였으며 진뢰는 흑룡강성 당위원회 부서기, 흑룡강성 성장까지 지냈고 리민은 리직전 흑룡강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으로 있었다.
쏘련 경내 주둔지에서
부분적 항일련군 장병들
리민 진뢰 부부
해방후에도 리민은 항일련군의 빛나는 사적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 힘썼고 항일련군의 사적을 후대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항일전쟁이라하면 우리는 흔히 과거 력사교재에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8년 항전이라고 배웠다. 이런 표현이 정확하지 않다고 판단한 리민은 수차 관련부문에 요구하여 항일전쟁은 1931년 9.18사변후부터 계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그의 주장은 접수되여 중국의 항일전쟁은 8년이 아니라 14년이라는 공식 표현을 쓰고있다.
그외에도 리민은 퇴직후에도 항일련군 렬사들이 싸웠던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기념비를 찾아보면서 항일련군의 정신을 후대들에게 전수하고 선전하였다.
리민은, 전쟁에서 희생된 병사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많다면서 중국인민은 이들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아야하고 또 이들이 적어놓은 피어린 항쟁의 력사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2018년 7월 21일 리민은 95세로 빛나는 한생을 마쳤다.
중국조선어방송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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