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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런 작가였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12월8일 10시47분    조회:2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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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인생담]
김룡운―그는 이런 작가였다

김춘택
 
 
 

 
 
프롤로그. 녀자복이 없는 작가
 
2003년도 전까지 나는 김룡운이란 작가에 대해 잘 몰랐다. 지금이야 늘 ‘김룡운선생님’이라 부르며 내 문학인생이 메마를 때면 선술 상대로 문담(文談)을 나누며 허물없이 지내는 망년지교이지만 초면부지던 그때는 진짜 김룡운 작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다만 김룡운 작가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은 귀동냥으로 적지 않게 들었기에 그에 대한 호감보다는 나쁜 인상이 더 많았다. 
 
그러다가 2003년 어느 날, 화가친구의 자취방에 함께 동거하고 있을 때 화가친구를 찾아온 김룡운 작가를 만나게 되였고, 나의 고얀 심태로 꽤 유쾌하지 못한 술자리까지 이어가게 되였다. 가만히 눈치를 보니 나의 화가친구는 벌써 김룡운 작가와 자별한 사이이고, 그 분의 은혜까지 무척 입고 있는 듯했다.
 
“참 좋은 분이야!”
 
화가친구는 나에게 김룡운 작가를 소개하면서 감개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래, 참 좋은 분이겠다! 사모님을 집에 두시고, 밖에서 애인을 보신다는 분이?…’
 
나는 김룡운 작가에 대한 좋지 않은 풍문―스캔들을 떠올리면서 비뚠 심성을 갈았다. 하지만 나는 김룡운 작가를 초면강산에 만나면 한번 톡톡히 망신 주려던 그 고얀 심태를 직접 풀 수는 없었다. 아직은 술기운이 오르지 않아 차마 그럴 엄두가 나지 못했다.
 
술이 몇순배 돌면서 나는 어느새 초면강산인 김룡운 작가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끌려 “선생님, 선생님!”하면서 너스레를 떨기까지 했다.
 
그렇게 술이 또 몇순배 돌자 나의 고얀 심기는 드디여 터지고 말았다. 금방까지 김룡운 작가의 요상한 매력에 끌려 별의별 례의요, 존중이요를 잔뜩 게바르다가 결국은 소인배의 속성을 터치고 만 것이다.
 
“선생님, 집에 사모님을 두시고, 애인 집 문턱에 불을 붙이신다면서요?”
 
취중에 실언 같았지만 실언은 아니고 나의 비뚠 마음의 적라라한 질주였다. 
 
“야, 임마! 안 그러면 내 첫사랑이 간암으로 죽는다고 하는데 어쩐단 말이냐? 자식들도 다 로씨야로 가서 소식이 없고, 남편도 없이 혼자 죽음의 문턱에서 헤맨다는데 나라도 안 들여다보면 어쩐단 말이냐? 내 첫사랑이기 먼저에 내 학생이기도 했던 그 불쌍한 녀자를 세간의 눈길이 무서워서, 륜리도덕이 무서워서 나 몰라라 한다면 이 내 김룡운이 그래 사람새끼냐?”
 
김룡운 작가는 왈칵 했다. 나에 대한 분노가 아니였다. 그는 세간이 눈길이나 륜리도덕의 자대 따위는 버린 지 오래된 것 같았다. 
 
그때 당시 우리 문단에 풍문으로 떠돌았던 ‘김룡운 작가의 스캔’의 전후사연은 이러했다.
 
김룡운 작가가 흑룡강에서 고중선생으로 있을 때 예쁘고 똑똑한 녀학생이 하나 있었다. 김룡운 작가는 이 학생을 많이 아꼈다고 한다. 거기에 일말의 첫사랑의 감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그 학생은 부모가 지주성분이라 해서 학교에서 비판대상이 되였다. 그때 김룡운 작가가 나서서 학생들의 행위를 단호히 제지시켰다. 그러자 투쟁의 예봉이 김룡운 작가에게로 돌려졌다.
 
판이 이렇게 뒤엎어지자 김룡운 작가는 불똥을 피해 잠시 연변으로 피신하게 되였다. 연변에서 몇달을 지낸 김룡운 작가는 형세가 조금 조용해지자 다시 오상현으로 갔다. 다행으로 그 학생은 무사했다. 그 학생은 촌에서 성분이 좋은 민병련장과 약혼을 하고 타도대상에서 해방되였던 것이였다. 김룡운 작가는 안도의 숨을 내시고 진심으로 그 녀학생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1989년에 김룡운 작가는 안도현 문화관으로 전근되여왔고 1993년에는 연변사회과학원 문학과 예술연구소로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연길의 어느 골목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를 만났다. 그가 바로 옛날 자기가 사랑했던 녀인의 오빠였다. 녀인의 오빠를 통해 녀인이 마음에 없는 결혼을 했다는 것과 여러 해 전에 연길에 와서‘김삿갓 개장집’을 운영하다가 남편을 잃고 지금 홀로 살고 있는데 간암으로 앓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김룡운 작가가 그녀의 병문안을 시작으로 그녀네 집으로 드나들며 병수발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여 그 당시 연변문단에서는 “모 작가는 본처를 내치고 애인을 섬긴다.”는 풍문이 나돌게 되였다. 결국 김룡운 작가는 나이 50이 넘어 여론의 팔매질이 거세참에도 불구하고 본처와 갈라지고 이미 생명의 등불이 간들간들하는 녀자와 결혼하였다.
 
그후로 썩 몇해 후였다. 내가 몇년 동안 연해지구에 떠돌다가 김룡운 작가를 다시 만났을 때 “박선생님은 지금도 생전인가요?”하고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어떻게 살겠니? 간암말기였으니…” 네가 상해로 가던 그 해를 못 넘기고 하늘로 갔느니라. 병이 완치되면 자기 언니가 계시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보내주자고 했더니…”였다.
 
김룡운 작가에게는 녀인과 관계되는 해프닝도 둬개 있는데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은 몇몇 안된다. 김룡운 작가가 시골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때의 일이다. 한번은 저녁에 회의가 있었다. 소대회의실에 들어서니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희미한 람프등불 아래 검은 개털모자 하나가 고개를 수그린 채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김룡운 작가는 다짜고짜로 캉(炕:구들)으로 뛰여올라가 개털모자의 목덜미에 올라타고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너 어제 술 산다고 해놓고 왜 도망쳤어?” 개털모자가 묵묵부답이자 김룡운 작가는 장난으로 귀쌈을 둬대 갈겼다. 그러자 잠잠하던 개털모자의 입에서 무서운 소리가 튕겨나왔다. “이 죽일 놈, 눈에 똥이 폈느냐?” 김룡운 작가는 기절초풍하여 개털모자의 목덜미에서 후닥닥 뛰여내렸다. 개털모자의 주인은 그의 친구 리경춘이 아니라 그와 한창 련애하던 지경애의 아버지였다. 두 사람이 쓰고 있는 개털모자가 심통히도 빼닮았는데 빼갈 한잔 얼근히 한데다가 등불이 희미하고 거기다 워낙 김룡운 작가의 성격이 데면데면하여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결국 개털모자사건으로 혼사가 틀어지고 말았다. 5~6년 전에  김룡운 작가가 한국에 갔다가 그녀를 만나 그때의 이야기를 했더니 히끗히끗 흰옷을 입기 시작한 귀밑머리를 어루만지며 그녀가 쓸쓸하게 웃더라는 것이였다. 
 
김룡운 작가에게는 중국어를 몰라서 예쁜 녀자를 떼운 이야기도 있다. 조선에서 오던 해, 김룡운 작가가 살고 있는 시골마을로 할빈에서 최씨라는 처녀애가 놀러 왔다. 그 마을에 친척이 있었던 것이다. 처녀는 예쁘고 똑똑하였다. 한달가량 함께 지내는 동안 두 사람은 저도 몰래 정이 들어 사랑하게 되였다. 한달 후 할빈으로 떠날 때 그녀가 김룡운 작가를 보고 중국어로 “給我相片”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의 가련한 작가선생은 그때 중국어가 너무 형편 없어 사진을 달라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역전까지 배웅하면서도 사진을 주지 못했다. 그녀와 함께 할빈까지 동행했던 조씨라는 처녀의 말에 의하면 최씨라는 처녀애는 김룡운 작가가 자기가 싫어서 사진을 주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고 배음하역으로부터 할빈으로 가는 동안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후 며칠 만에 김룡운 작가는 조선특무로 몰려 투쟁을 받았고 얼마 후에 그 곳에서 도망치여 떠돌이생활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최씨라는 처녀의 주소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김룡운 작가는 몇년의 품을 들여 그 녀자를 찾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자 결국 다른 녀자한테 장가를 갔다고 한다. 김룡운 작가는 지금도 그녀를 잊지 못해 늘 외우군 한다. 하여튼 김룡운 작가는 녀자복만은 없는 것 같다. 
 
다재다능한 작가 
 
세월이 흐르면서 나와 김룡운 작가의 인연은 점점 깊어지게 되였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나이 차이를 넘어선 망년지교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술자리도 자주 이어졌고 그런 와중에 김룡운 작가의 인생도 많이 알게 되였다.
 
김룡운 선생님은 1948년에 조선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출생했다. 태여난 지 10일 만에 아버지를 잃고 여섯살 되던 해에 재가하는 어머니를 따라 중국 화룡현 동성향 홍성촌에 이주해오게 된다. 중국에서 동년을 보내고 소학과정을 마친 그는 16세에 자신의 학구열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고, 청진대학에서 일년간 공부까지 했다.
 
그 시기, 김룡운 작가는 청진대학 도서관에서 수많은 독서를 했다고 한다. 이때의 ‘물 마를 줄 모르는 샘’의 ‘독서 삼매경’을 통해 그는 인생 전반생을 좌우지 할 지성적인 기초를 닦게 된다.
 
“그때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아마 그때 내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작가인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술맛을 모르는 ‘술독’이였지만 김룡운 선생님은 술에 문학인생을 담구는 애주가였다. 나는 한생 노래와 춤을 모르는 등신이였지만 김룡운 작가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딴따라’였다. 때론 술주정도 잘했다. 
 
김룡운 작가와 마주앉는 술상재미는 세가지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술을 빈 문담이였고, 두번째는 술을 빈 행복한 ‘인생한탄’이였고, 세번째는 술을 빈 ‘딴따라표현’이였다.     
 
김룡운 작가의 ‘딴따라표현’에는 웬만해서는 듣기 힘든 18번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본인이 작사하고, 작곡했다는 〈개구리〉였다.
 
〈개구리〉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온 노래 중에서 불후의 명곡이라고 떠들어줄만한 노래였다. 지금은 그 가사의 일절밖에 기억할 수 없지만은 그것은 에누리 없는 김룡운 작가의 신세타령이였고 기구했던 삶이 압축이였다.    
 
깊은 밤 여름밤에
 
개구리 개굴개굴
 
왜 우느냐 물어도
 
말없이 개굴개굴 개굴개굴 
 
왜 우느냐 왜 우느냐 
 
물어도 물어도
 
말없이 개굴개굴
 
      
 
조선에서 공부하다가 20살에 중국에 온 김룡운 작가는 조선특무로 몰려 투쟁을 당했고 그 사랑하던 녀자와의 사랑도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오래 동안 시골에서 고생스레 살았기에 그의 몸에서는 가난의 냄새가 나고 흙냄새가 풍기고 탁배기향내가 진하다. 그는 평생에 이사를 무려 스물다섯번 한 사람이다. 이렇게 그 자신이 불우하게 살았기에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아첨을 모르고 강직하다. 그의 언사(言事)는 그 어떤 례의에 구속되지도 않고, 그 어떤 신분에 구애되지도 않는다. 때론 언사가 거칠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인정과 진정이 넘친다.
 
김룡운 작가는 또 무서운 책벌레이기도 하다. 그는 고달픈 인생살이를 하면서도 무척이나 많은 책을 읽었다.  
 
체계적으로 공부를 아니하고 순 자습으로 성공한 사람을 우리는 천재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천재적인 사람은 끈질긴 노력이 바탕으로 되여야지만 우선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김룡운 작가가 바로 그러하다. 한번 들으면 술에 아무리 취한 상태라도 다 기억을 한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의 총명은 하여튼 남달랐다. 그것은 그의 문장에서도 력력히 나타난다. 그의 문장을 보면 연박한 지식과 지혜가 용처럼 글맥을 꿈틀거리고 있음을 보아내게 된다. 성숙된 작가라면 다 그러할 테지만 그래도 김룡운 작가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김룡운 작가가 지금까지 발표해온 문학작품을 한번 모아보면 그의 다재다능성과 천재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우리 문단에서 시와 소설과 수필과 평론 모두를 쓰는 몇몇 안되는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물론 글을 많이 쓴다고 하여 모두 천재적인 작가인 것은 아니다. 수량이 많아도 익은 글이 적으면 천재적인 작가라고 말할 수 없다. 김룡운 작가의 글들은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평론이든 모두 땅땅하고 향기로운 글이 많고 쭉정이 글이 적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그를 천재적인 작가라고 말한다.
 
김룡운 작가는 늦둥이작가이다. 민락중학교 재직시기 나이 설흔 두살이 넘어서야 문학에 데뷔하였다. 그는 문학에 발을 들여놓은 초기부터 시와 수필, 평론을 동시에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그 위치를 인정받게 된다. 그는 글을 많이 발표하기 시작한 1993년부터 필명을 김몽이라고 달았고 본명보다 필명을 더 많이 쓰기에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김룡운이라면 몰라도 김몽이라면 다 안다.  
 
그는 지금까지〈장세근 영감 약전〉,〈별이 떨어지는 밤〉,〈식후여담〉등 20여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찰나의 섬광〉,〈허물어진 둥지 곁에서〉등 백여수의 시를 발표했고,〈포도원〉,〈끌려가는 삶 끌고 가는 삶〉 등 수필 10여편을 발표했다. 이 외에 500여 편의 평론을 발표했는데 그 자수는 500여만자에 달한다. 김룡운 작가는 여러 쟝르의 글을 두루 썼지만 작가로서의 인지도와 주요한 성취는 주로 평론에 있다. 그는 조선족문단에서 평론을 가장 많이 창작한 평론가중의 한 사람이다. 
 
발표한 작품집으로는 《시의 맛과 향기(시평집)》, 《중국에서의 백범 김구(장편실화소설 상, 하)》, 《중국부자동네 이야기(장편실화 공저)》, 《김운룡소설연구(편저)》, 《한석윤론―6월을 위한 5월의 노래》등이 있다.  
 
김룡운 작가는 국내외 문학상 20여차를 수상하였으며 현재 김룡운 문집 14권을 탈고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풍각쟁이 작가
 
김룡운 작가는 조선에서 청진대학 1학년을 다니다가 방학에 잠간 어머님 만나러 중국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마침 부모들이 흑룡강성 오상현으로 이사가 있어서 그 곳에 눌러앉아 살게 되였다.
 
오상현 란초개향 북성촌에 있을 때 ‘문학대혁명’이 이미 터져 있어 촌의 소학교는 풍지박산 나 있었다. 학교에 학생들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고, 학교의 시설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여 김룡운 작가는 학교의 발풍금을 집에 메여다 놓고, 쏘련음악교과서를 가지고 혼자서 발풍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한테는 음악적인 천부가 있어 일년 만에 발풍금을 비롯해 손풍금과 기타를 비교적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였고 그것이 밑천이 되여 소학교 음악교원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교원사업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몇년 만에 고중교원으로 발탁되였다. 
 
나는 김룡운 작가에게 컴퓨터를 배워드린다는 리유로 그의 집에서 달포를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 김룡운 선생님은 아침과 저녁으로 “우리 컴퓨터 스승님께서 수고 많으신데 그 보답으로 피아노 곡 한곡 쳐드리리다.”라고 롱을 하면서 피아노로 곡을 쳐주었는데 그 실력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거기다가 전자풍금, 바이올린, 기타 연주까지 해주었는데 김룡운 작가의 음악천부에 대한 나의 상상은 기어코 무너지고 말았다. 전문 작곡하는 사람들이 악기 몇개씩은 다루는 것이 기본이란 소린 들어보았지만 작가선생이 악기를 이렇게 많이 잘 다룬다는 것은 내 상상밖의 일이였던 것이다.  
 
전에 김룡운 작가의 피아노실력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모 작가를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김룡운 작가에게 미안한 소리지만 김룡운 선생님의 인물이야 남자들 치고 별로 잘생긴 처지는 아니다. 체구가 왜소하고, 깡마르고, 얼굴에서 예지로 빛나는 눈빛 외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 김룡운 작가는 솔직히 말해 준수한 인물의 소유자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 그가 모 작가와 함께 다방행차를 하셨는데 게다가 복색까지 신경 쓰지 않아 그냥 잠실에서나 입는 런닝구 바람에 끌신을 끌고 갔으니 다방마담의 눈에 멋지게 보일 리가 없었다. 아마도 김룡운 작가가 다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다방마담의 눈꼴이 아니꼬웠을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니 다방마담의 손님접대도 여간 푸대접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 기미를 김룡운 작가가 눈치 챘던 모양으로 다방 한쪽 구석에 장식용으로 놓여있는 피아노에 눈길이 가자 그 다방마담에게“저 피아노 건반을 한번 두드려보아도 될까요?”라고 넌지시 청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다방마담은 “선생님께서 진짜로 피아노를 칠 줄 아세요? 만약 피아노를 잘 치신다면 오늘 드시는 술값은 서비스 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더란 것이다.
 
허허! 어험! 이렇게 헛기침을 뗀 김룡운 작가는 피아노 곁으로 다가가더니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는데 다방에서 장식용으로 박제해둔 피아노에서 고운 선률이 터져 나와 다방마담은 그 선률에 넋을 빼앗겨 살뜰하게 모셨다고 한다. 공으로 술을 거나하게 마신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요즘 김룡운 작가가 70이 넘어 색스폰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연주수준이 상당하다. 언젠가 필자가 운영하는 작가촌 행사에서 독주를 했는데 수많은 작가들의 절찬을 받았다.
 
“음(音)을 알아야 하니라. 음을 모르는 인생은 너무 무미건조하다. 음도 모르는 작가가 무슨 작가이냐? 허허!”
 
김룡운 작가는 이렇게 늘 자신의 특기에 대해 너스레를 떠시곤 한다.
 
나를 보고 음을 모르는 작가라고 하니깐 기분이 상하지만 어쩌겠는가. 음을 모르니 그 수모를 고스란히 당할 수 밖에…
 
알고 보니 음악평론과 무용평론도 드믄드믄 쓰신다고 한다.  
 
나는 또다시 김룡운 작가에게 머리가 숙여지고 말았다. 김룡운 작가는 우리 문단에서 유일하게 ‘풍각쟁이 작가’이다. 
 
민족저항시인 심련수를 발굴한 작가   
 
심련수는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는 우리 민족의 저명한 민족저항시인이다. 심련수는 룡정에서 동흥소학과 동흥중학을 졸입하고 일본에서 대학공부를 했으며 1945년에 왕청현 춘양진에서 피살되였다. 그는 27세란 짧은 인생에 시 280여수와 소설 3편, 평론 2편, 만단 3편을 발표하였다. 윤동주는 1980년대 중기에 우리에게 알려졌지만 심련수는 그보다 썩 후인 2000년에야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였다.
 
민족저항시인 심련수를 발굴함에 있어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김룡운 작가이다. 김룡운 작가가 연변사회과학원 문학과 예술연구소에 있을 때 우연한 기회에(2000년 3월) 심련수의 동생 심호수씨를 알게 되였고 그를 통해 심호수씨에게 55년간 보존해온 심련수의 문학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위대한 발견에 스스로도 놀란 김룡운 작가는 유고작품을 확인하기 위해 심호수씨네 집에 친히 갔었고 그 작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여러모로 애썼다. 김룡운 작가는 이 사실을 연구소에 알렸고 연구소에서는 연변출판사의 류연산 작가에게 소식을 알렸다. 결국 심련수의 유고를 책으로 찍기로 하였다. 출판사의 창탁을 받고 김룡운 작가가 원고를 정리했는데 옹군 석달이 걸렸다. 이리하여 2000년 7월에 《20세기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 제1권《심련수문학편》이 마침내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이 책의 뒤부분에 김룡운 작가가 〈문단에 나타난 또 하나의 혜성〉이란 표제로 평론을 썼다.  
 
이 책이 세상에 나간 후 큰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모든 조선문 신문사와 잡지에서 대서특필로 이 신문을 실었다. 한국에서는 더구나 떠들썩하였다. 심련수가 우리에게 알려진 지도 어언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중국과 한국에서 심련수문학을 조명하고 연구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여왔고 현재 심련수는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는 시인으로, 일제치하의 암흑의 40년대를 시의 홰불로 밝혀준 민족저항시인으로 당당하게 자리를 굳혔다.
 
지금까지 한국의 대학들과 중국의 대학들에서 심련수문학을 연구테마로 하여 석사, 박사학위를 탄 연구생들이 40명을 웃돌며 현재 심련수문학을 연구테마로 잡고 석사, 박사 공부를 하고 있는 연구생이 100여명에 이른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심련수기념축제와 심련수문학 연구세미나가 거의 해마다 열렸다. 김룡운 작가는 해마다 열리는 심련수세미나에 거의 매번 참가하였으며 그 와중에 2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인 글들로는 〈문단에 나타난 또 하나의 혜성〉, 〈심련수문학의 사상경향성〉, 〈심련수 후기문학고찰〉 등이 있다. 이런 연구성과들로 하여 그는 2012년에 심련수문학상을 수여받았다. 그는 지금 20여편의 론문과 평론들로 《심련수론》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지금 심련수선양위원회 중국 측 고문의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룡운 작가는 심련수를 처음으로 발굴하고 원고를 정리하고 심련수에 대해 첫 평론을 쓴 사람이므로 심련수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도 두텁다. 그는 “내 문학생애에서 가장 큰 자랑이 심련수를 발굴한 것이고 가장 큰 성취가 심련수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에필로그, 평론의 문턱이 낮은 평론가
 
지금도 우리 문단에서 김룡운 작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뒤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보면 “김룡운 평론가는 평론 대상에 대한 문턱이 너무 낮다. 문단의 중견도 아닌데 평론이란 리유로 너무 높이 춰준다.”는 것이다. 나도 한때는 이런 뒤공론에 대해 동조한 적이 있었다. 나도 가끔 언감생심  평론이란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나는 문단에서 유명세를 타는 작가들에 한해서만 평론의 상대를 정한다. 이는 나의 그릇된 립장에서 출발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나는 순리적으로 생감을 먹지 않고 언감을 먹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한때는 20대 30대였지만 지금은 어엿한 중견작가로 된 많은 사람들중에 사실  김룡운 작가의 평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김룡운 작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론을 하면서 후배들을 더 사랑한 것 같고, 선배들을 적게 존중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과 좋은 관계가 많지만 오히려 선배들과의 사이가 모호한 적이 더 많다. 나는 문학비평을 신진작가들을 위주로 써주었다. 그들의 문학우수성을 발굴해 주려는 것이 나의 속셈이였다. 나는 지금도 이런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는 나의 부끄러운 해석에 불과하다. 수적으로 내 비평의 다수가 유명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이기 때문이다. 본시 문턱이 낮아야 건너다니기 쉬운 것이다.”
 
그제야 나는 김룡운 작가의 문턱이 낮은 문학비평에 대해 리해하게 되였다. 하긴 나의 신진시절의 형편 없는 문학작품도 김룡운 작가의 문턱이 낮은 비평 덕에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의 비평 덕에 내 문학에 더 정진할 수 있었다. 다만 나는 그런 고마움을 오래 동안 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문학비평을 시작하게 된 것도 김룡운 작가의 추동과 고무에 힘입은 것이다. 본래 우물을 마실 때 우물 판 이를 잊는 것이 인지상정이 되기라도 하듯이. 자식은 부모를 닮고, 제자는 스승을 닮는다고 했던가. 나 역시 요즘 신진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심심풀이로 비평의 짓거리를 즐기는 것이 어쩜 김룡운 작가의 평론 립장에 전염된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적어도 그런 자세를 가지고 싶다.
 
이 글을 두서없이 마무리 하면서 김룡운 작가의 건필을 비는 바이다. 요즘 김룡운 작가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듯하여 더욱 조심스런 마음이다.
 
《도라지》2020년 5기(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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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변가무단 원 부단장, 국가급지휘가 안국민   2001년 7월, 중국음악가협회에서 주최한 중국공산당 창건 80돐 기념 중국교향악작품음악회에서 한 안국민이 창작한 관현악 〈내가 살던 고향〉이 중국교향악단에 의해 힘차게 연주되였다. 연주는 중국조선족 전통민간악기인 횡적, 단소, 장새납, 장고 등을 포함하였기에...
  • 2021-05-20
  •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지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을 거치며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인 한락연, 양림, 리홍광, 리복림, 마덕산, 배치운, 서광해 등을 필두로 수많은 렬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민, 문정일, 리영태, 김인섭,...
  • 2021-05-10
  • 장춘시전염병병원 부원장이고 주임의사인 조선족 최문옥(59)씨가 2021년 전국 5.1 로동상장을 수상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4월 27일, 중화전국총공회는 대회를 소집하고 '5.1' 국제로동절을 열렬히 경축하는 한편 2891개 단체와 개인을 표창하였다.    최문옥씨가 조선족으로서 유일...
  • 2021-05-07
  • 불우아이들의〈꿈터〉를 지켜가는 원장엄마  ◈ 최미화     나와 그녀의 인연은 ‘애심’이라는 단어가 가교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퇴직후 연변애심어머니협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협회 부회장 겸〈꿈터〉원장인 한수영을 알게 되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현재 아홉 ‘자식...
  • 2021-05-06
  • 박옥란 변호사       장기간 상법, 행정법, 국제법과 국제 비즈니스관례 법률자문에 종사하며 탄탄한 실력을 다져온 할빈시의 박옥란 변호사가 최근 북경DOCVIT(할빈)로펌 파트너로 취임했다.               1996년 흑룡강대학 법률학부를 졸업하고 선후로 동북...
  • 2021-04-23
  • - 시인 최기자선생님을 만나다   허련순   그때는 그랬다. 기회만 있으면 최기자선생님을 졸졸 따라 다녔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작가가 되고 싶었던 철없던 시절이였다. 고중을 졸업하고 귀향하여 신풍촌에 내려왔던 1972년 그해,  나는 대대 문예선전대에서 문자창작을 전담하시는 최기자선생님을...
  • 2021-04-16
  • 자료사진 4월 13일, 중화전국총공회에서는 2021년 전국5.1로동상과 전국로동자선봉호 표창 예정 인선(집단)을 공시했다. 길림성에서 40개 집단과 28명의 개인이 이름을 올렸는데 그중 장춘시전염병병원 부원장이며 주임의사인 최문옥이 전국5.1로동상 명단에 입선되였다. 장춘시전염병병원 부원장인 최문옥은 전염병예방퇴...
  • 2021-04-15
  • 북의 왕 진경수와의 인터뷰 진경수가 맨 처음 살았던 동네는 사면이 산에 빙 둘려 있었다. 실제로 초기의 이주민들은 꽁꽁 쌓인 보루와 같다는 의미로 동네를 위자구라고 불렀다고 한다. 위자구는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에서 서쪽으로 꽤나 떨어진 시골이다. 에울 위가 동음의 갈대 위로 바뀌어 쓰인 것은 후날의 이야기이다...
  • 2021-04-14
  •        한동안 우리의 안방을 뜨겁게 달구었던 '트롯 전국체전'이 드디어 끝났다. 다재다능 실력파 엔터테이너 김윤길 가수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감성으로 수많은 팬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이번에는 '불후의 명곡'500회에 출연해 또 한 번 만능 싱어송라이터의 실...
  • 2021-04-13
  • 이송 박사     이송 박사 이력은 누가 봐도 화려하다. 천진외국어대학교 일본어학과 학사, 천진중의약대학교 임상의학 학사 및 석사, 대전대학교 한의학과 대학원 박사, 한국연구재단 박사 후 거기다 얼마 전 상명대학교 사진영상콘텐츠학과 학위까지 수여받았다.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들이 엿보인다. 그런데 사진영...
  • 2021-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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