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비행기 추락사고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 7월 30일, 실크로드에 세워진 도시 우루무치를 떠나 란저우로 향하던 국민당소속 257호 비행기가 자위관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광활한 중국대륙의 오지에서 일어난 추락 사고는 자칫 긴박한 내전 상황 속에서 중국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영원히 묻힐 뻔했다. 하지만 그 비행기에 한낙연이 탑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중국문화계는 큰 슬픔에 잠겼다.
당시 한낙연의 나이는 49세. 예술가로서 한창 성숙된 작업을 선보일 나이에 당한 그의 조난 소식은 중국 언론뿐만 아니라 영국의 ‘더 타임스’등 외신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할 정도였다고 한다. 얼마 후 수색대가 비행기의 잔해를 발견했으나 그의 주검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았으나 그는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실크로드에 남아 있는 고대유적발굴에 전심전력을 쏟아 부은 그의 염원대로 자신이 사랑하던 그 땅에 영원히 묻힌 것이다.
주검도 없이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평소 그를 알고 지내던 많은 인사가 참여했다. 화가이던 그의 장례식에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석하는 것이야 당연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의 인물들까지 참석하자 자세한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장례식에는 당시 국민당서북행영의 주임이던 張治中과 부주임 陶峙岳장군이 보낸 만장이 걸려있었고, 한낙연이 불의의 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을 접한 周恩來도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어버렸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렇듯 어느 한쪽이 아니고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양쪽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그의 죽음에 슬픔을 표시했다는 것은 꽤나 의례적이다. 더구나 당시 정국이 중국대륙의 주인이 누가 되냐를 두고 국공내전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무렵이란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중국의 유명한 교수인 盛成은 한낙연을 가리켜 ‘중국의 피카소’라고 했다. 그것은 그만큼 중국 미술계에서 한낙연의 공적이 크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쏟아진 찬사와 달리 그는 살아있을 때 중국 중앙화단에서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 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고 항일운동과 혁명 사업에 투신해 혁명가로서의 임무에 더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림 자체에만 몰두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아니, 자신이 발 디디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려 했던 사실에 비춰볼 때 더 넓은 의미의 화가라고 부를 수고 있을 것이다. 젊을 때부터 혁명 사업에 뛰어 든 그를 두고 현재 중국역사학자들은 ‘동북지구 중국공산당 초기 창시자의 한사람’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예술평론가들은 그를 ‘조선족을 대표하는 위대한 세계적인 예술가’라는 또 다른 호칭으로 되새긴다.
한 사람을 두고 이렇듯 평가가 다른 까닭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그만큼 다채롭다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이런 호평과 달리 정작 그의 모국인 이 땅에 그의 이름이 전해지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1993년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된 ‘한낙연 유작전’이 그가 화가로서 이 땅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나 마찬가지다. 살아서는 단 한 번도 해방된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한낙연, 대신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유작이 이 땅을 밟아본 것으로도 그는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다. 청춘을 조국의 광복에 바쳤지만 일제 패망이후에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는 대신 중국대륙에 머물렀던 한낙연,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실크로드의 모래먼지 속에서 잠자코 있던 고대 석굴 벽화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던 것이다. (계속)
[*신동아] 통권5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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