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봄, 김 철은 귀향한다. 그가 맨 배낭에는 전쟁의 초연 속에서 쓴 '전선 시초'1백 여 편이 들어 있었다.
해란 강변엔느 새움이 돋고 있었다. 연변 땅을 밟으며 가슴이 벅찼다. 즉흥시가 떠올랐다.
"이른 봄 해란 강에 아지랑이 피는 데/귀환병과 처녀는 고향 길을 거닐었네/담벽 같은 앞가슴에 주렁진 훈장은/결결한 싸움의 공훈을 빛내주네."
우연찮게 이 시를 작곡가 동희철에세 줬는게, 그가 이 시를 신춘문예에 응모, 입
선이 된다. 이게 실상 문단 데뷔작이다. 동북조선인민보 신춘문예 시 지경석(地境
石)'이 1등 상에 뽑혔다. 스물 한 살이었다. 동북조선인민보사 기자가 된다. 문학
성 있는 기사를 개척했다. 러시아의 풍자문학을 구사해 사회를 고발했다. '기자 김 철'이 떴다. 그는 '암행서사'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부정하다 그에게 걸러면 '
죽는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이후 10년 간, 기자 생활이 계속된다.
본명은 김용섭(金龍燮). 김 철은 필명. 시도 쓰고 기사도 열심히 썼다. '무지개 시인'으로 불렸다. 날고 뛰었다. 정작 그가 문단에 첫 발표한 것은 시가 아니었다
. 소설 '낟가리'였다.
그 해 가을. '9.3명절(연변 자치주 성립 긴며일 9월 3일을 기념하는 날)에 마라톤
대회에 나가 1등을 한다. 연변은 '문학의 삼각주'. 여러 사조(思潮)가 엉켜 돌았
다.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가 합세했다.
'탈출기'의 최서해, '인간 문제'의 강경애 등의 소설가와 시인 윤동주 박팔양 김
달진 등이 필명을 날렸다.
동북조선인민보에는 당초 '문예조'라는 부서기가 없었다. 김철, 회학윤, 최용건이
셋이서 문예조를 발족했다. 1957년. 김 철이 낸 첫 시집 '변강의 마을'중 '찢어 버린 편지'와 그 다음해에 쓴 서시 '앵두 네 알'등이 비판받는다. '앵두~'는 소자
산 계급 사상의 정서를 토로했다는 것이고 '찍어~'는 사회주의의 암흑을 폭로했다
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원군 전사였고 신문기자여서 그냥 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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