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윤동주시인의 동생 윤혜원할머니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3월2일 09시00분    조회:916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유민들이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면서 고단한 삶을 꾸렸던 북간도. 북간도가 낳은 '영원한 청년시인' 윤동주가 뜬금없이 시드니로 온 까닭이 도요새를 닮은 그 할머니에게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윤동주 시인 만큼이나 정갈하게 한 평생을 살아오신 할머니가 2005년부터 아프시다. 심장수술과 뇌수술을 몇 차례씩 할 정도로 많이 아프시다. 그런 할머니가 지난 2월 중순 중국 길림성 룽징(龍井)으로 떠났다. 떠나면서 "이번이 마지막 중국여행일 것 같다"고 쓸쓸하게 말했다.

윤동주 시인의 무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8회째를 맞고 있는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할머니는 10여 년 동안 윤동주 무덤의 봉분을 새로 단장하고, 남편과 함께 <윤동주문학상>을 손수 제정하여 운영해오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할머니가 거주하는 시드니가 윤동주 연구의 중심지(?)가 된 느낌이다. 1995년에 열린 윤동주 50주기를 비롯하여, 2005년의 60주기 추모행사가 가장 큰 규모로 열린 곳도 시드니였다. 또한 윤동주에 관한 각종 소식이 전 세계로부터 시드니로 전해진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84. 시드니우리교회 권사)씨가 바로 그 할머니다. 윤씨는 윤동주의 형제 3남1녀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혈육이다. 일곱 살 터울이지만 바로 밑의 동생이어서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오빠의 짧은 생애를 곁에서 지켜본 장본인이기도 하다.

윤혜원씨한테 지난 13년 동안 윤동주 시인에 관한 얘기를 들어왔다. 가끔은 입을 꼭 다문 대학생, 흑백사진 속의 윤동주가 끼어들어 자기가 쓴 시를 읽어주기도 했다. 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 중에서 마지막 2년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한 날.

지난 2월 16일은 그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뜻 모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옥사한 62주기였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했던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간 윤동주, 그가 '영원한 청년시인'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 경향신문에 발표된 <쉽게 쓰여진 시>.
2월 16일 밤, 시드니에 거주하는 몇몇 한인동포 문인들이 스트라스필드의 한 카페에 모여서 윤동주를 추모하면서 그의 시를 낭송했다. 낭송된 시 중에는 그의 마지막 작품 '쉽게 쓰여진 시'도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시를 낭송하다보니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구절이 목에 걸렸다. 시대를 뛰어넘는 고뇌이기 때문이다. 카페의 뜰로 나가서 지구남반부의 별들이 총총하게 박혀있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고뇌를 되뇌어보았다.

60여 년 전, 그 당시의 민족적 절망과 뿌리 뽑힌 조선백성의 고단한 삶이 흑백영화 장면들처럼 스쳤다. 장장 13년 동안 들어왔던 얘기들이 영화장면처럼 되살아난 것. 그럼, 지금부터 60여년의 시공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증언해준 윤혜원씨를 소개한다. 

철들지 않는 84세의 '윤少女'



"마음에 티끌 하나 없는 만년 소녀다." 윤혜원(84)씨를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하물며 60년 넘게 함께 살아온 남편 오형범(84. 시드니우리교회 장로)씨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도무지 철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윤혜원씨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항상 똑 같은 말로 자신을 소개한다. "윤동주 시인 동생이고요, 나이는 열여덟 살!"하면서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을 웃는다.

그래서 "나이 드는 게 싫으시냐?"고 물어보면 "동주 오빠가 나이 먹는 걸 스톱 했으니까 나도 덩달아서 중단시켜버린 거야. 동생이 오빠보다 더 늙으면 안 되잖아. 난 늙으면 안돼!"

기자는 같은 파평 윤씨라는 이유로 윤혜원씨 가족들과 가까운 친척처럼 지낸다. 윤씨의 80세 생일날, 기자는 '윤소녀(尹少女)'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윤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별명 값으로 한 턱 내겠다"며 북간도식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거의 소금수준인 짜디짠 달걀찜(뒷맛이 아주 고소하다)과 국물이 거의 없는 된장찌개, 하얀 무김치와 옥수수 등이 식탁에 올랐다. "음식이 짜다"고 했더니, "일제 강점기의 북간도 음식이니 그냥 참고 먹어 달라"면서 "우린 평생 이렇게 먹었다"고 말했다.

부엌 쪽으로 식탁이 놓여있는 거실의 벽에는 윤동주 관련 사진들이 걸려있다. 그 유명한 학사모 사진 주변에는 해마다 중국 연길에서 열리는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 문학상> 행사사진이 여러 장 걸려있다.

지난 2005년 12월 박철 시인이 한국에서 방문했을 때, 그에게 고구마와 옥수수를 삶아주면서 "마치 오빠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면서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오누이처럼 도란거렸다. 박철 시인의 '고요한 분위기'가 오빠의 생전모습으로 오버랩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항상 윤동주 분위기에 묻혀서 지내는 탓인지, 윤혜원씨는 오빠에 대해서 얘기할 때 마치 오빠 옆에 앉아서 얘기하듯 한다. "항상 골똘히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어, 그러다가 나를 만나면 장난을 걸어오고... 그러니 나한테는 그냥 오빠이지 뭐!" 이런 식이다.

13년 동안 진행된 인터뷰

윤혜원씨와의 인터뷰는 주로 윤씨가 윤동주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국이나 중국, 일본을 다녀온 다음이나 윤동주에 관한 새로운 뉴스가 전해졌을 때 이루어졌다. 만나는 장소는 대부분 윤씨의 집이나 윤씨가 출석하는 교회, 그리고 호주한인동포 문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철마다 한두 차례 만났으니 윤동주 시인에 관한 얘기는 거의 다 들은 셈이다. 그래서일까? 윤씨는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쯤이면 "우리 윤동주 얘기 그만하자!"면서 화제를 바꾸곤 했다. 대개는 가슴 아픈 대목으로 넘어가면서.

사실 윤동주 스토리는 여러 권의 <윤동주 평전>과 관련기사 등으로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하여, 오늘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 그중에서도 답변하기 껄끄러운 내용 중심으로 13년 동안 이어져온 인터뷰를 1문1답 형식으로 재구성 해본다. 인터뷰엔 꼭 남편 오형범씨가 동석했다. 그의 답변도 함께 담았다.

▲ 작년 연변에서 열린 제7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 장면.
-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지금까지 오빠가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아요. 동주오빠는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늘 무슨 생각인가에 골똘히 빠져있고 밤새워 책을 읽고 뭔가를 대학노트에 쓰던 사람이었으니 삶의 모습이 바뀐들 얼마나 바뀌었겠어요. 다만 교사나 목사가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시를 쓰는 조용한 모습의 교사나 목사말예요. 단짝이었던 문익환 목사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한국의 한 시인단체가 매년 실시하는 설문조사에서 20년 가까이 윤동주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서시(序詩)'가 가장 애송되는 시로 선정됐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싶지만, 한동안은 잘 믿기지 않았고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나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오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빠의 고결한 성품이나, 한 인간의 결연한 의지가 읽히는 <서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일부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과대평가 됐다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윤혜원) "나는 문학의 문외한이라서 잘 모르지만 그런 평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게 평가하면 그게 어디 문학작품인가요? 종교의 경전쯤 되겠지요. 또한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오형범) "그렇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이 세상에 머문 기간은 정확하게 27년 2개월입니다. 1943년 7월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시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 '쉽게 쓰여진 시'인데 그 시를 1942년 6월 3일에 썼습니다. 정확하게 25살 때였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시가 모두 25살 이전에 쓴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대평가 운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동주오빠가 미워져요"

-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뚜렷한 항일활동의 흔적이 없는데.
(윤혜원)"당시의 북간도는 항일운동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난 어리고 여자라서(?) 잘 몰랐지만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1940년 이후엔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됐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오빠라고 해서 뭐가 달랐겠습니까. 나는 지금도 오빠의 꼭 다문 입술과 고뇌에 찬 표정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다만 오빠가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소극적인 성격이라서 그랬을 겁니다."

(오형범)"적극적인 항일활동은 아니었지만 삼엄한 분위기의 일본에서 계속해서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것은 윤동주 항일정신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아닐까요? 특히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고종사촌 송몽규와는 운명적인 삶을 공유했기 때문에(동갑내기로 같은 집에서 태어나고 같은 감옥에서 사망함) 항일에 대한 많은 교감이 있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는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 중에서 마지막 2년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한 사람입니다."

- 윤동주, 일주, 광주 3형제가 모두 시인인데 왜 시를 쓰지 않는지요?
"그게 참 속상해요. 남자들은 다 똑똑하고 잘 생겼는데, 왜 나만 시도 못 쓰고 못난이로 태어났는지.(웃음) 그런데 동주오빠가 나에게 아동 문학지를 읽게 하고 동화를 들려준 것은 나의 글쓰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 재작년 연길의 동포학생들이 연 윤동주 시인 60주기 행사.
- 그동안 1942년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졌다가 1942년 6월 3일 쓴 '쉽게 쓰여진 시'가 마지막 작품으로 정정됐는데.
(윤혜원)"'쉽게 쓰여진 시'가 오빠의 마지막 작품이라기보다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오빠는 그 시를 쓴 후에 바로 체포되어서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비록 감옥이지만 오빠가 2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을 리 만무입니다."

(오형범)"우리 부부가 1947년에 남쪽으로 내려오던중 청진에 머물다가 윤동주의 일본유학생 친구들인 박춘애와 김윤립을 만났는데, 그들이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시 한 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해방공간의 혼란이라서 다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시를 전해 받았다면 그게 마지막 작품이 됐을 텐데."

- 오빠가 가끔 미워진다고 말씀하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해준 것도 없이 나를 평생 귀찮게 하니까 그렇지~.(웃음) 어쩔 수 없었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미워요. 눈치껏 일본경찰을 피해서 좀 더 일찍 고향으로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를 썼겠습니까."

- 오빠의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빠도 자신의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감히 한 말씀 드린다면, 오빠의 시를 읽으면서 문학의 향기에 젖어보기도 하고, 너나없이 고단한 삶을 위로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오빠의 동시를 많이 사랑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길시 인대대표와 당대표의 중임을 한몸에 지니고 밤낮이 따로 없이 휴식일에도 항상 주민들의 질고가 있는 곳이면 남먼저 나서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연길시 건공가두 장신사회구역당총지 서기이며 주임인 오영숙녀성이다.그녀는 안정단결된 조화로운 장신사회구역을 건설하고 주민들이 마음에 드는 5호사회구역을 창...
  • 2008-05-28
  • 5월 17일, 심양성보백화 한국상품전시회 참석차로 갔다가 성보백화공사현지에서 만두에 좁쌀죽에 짠지 하나로 아침을 건늬는 정영채회장의 모습이 물컥 가슴에 다가와 카메라에 담았다. 15년전 연길에서 고난의 창업을 시작했던 그때를 련상케 하는 정경이였다. 그의 간촐한 아침상에는 새로 일떠설 심양백화의 설계도가 곁...
  • 2008-05-27
  • 병은 무엇보다 정확한 진단이 중요만성페쇄성페질환, 기관지천식, 페부감염성질병, 페부악성종양, 흉막병리변화 등 질병의 진단치료에 탁월한 실력을 갖고있는 연변병원 호흡내과의 안창선주임은 "병은 무엇보다 정확한 진단에 조기치료가 중요하다"고 표한다. 안창선주임은 "흡연인구의 증가, 평균수명의 연...
  • 2008-05-22
  • 5월 15일, 길림성위생청과 길림성중의약관리국에서는 전 성 위생계통 표창대회를 열고 의료기구에서 돌출한 공헌을 한 단체와 개인을 표창, 장려했다. 대회에서 연변대학부속병원 등 22개 의료기구가 의덕건설기준병단위로, 김향숙 등 16명이 길림성의덕본보기로, 김향숙, 김옥녀, 리미화, 장애영, 전춘화, 최향란 등 64명...
  • 2008-05-22
  • 정상인들을 위해 로심초사하는 장애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연길시 “장희관 맹인안마원”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 필자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허리나 목덜미를 잡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서는 손님들마다 안마사의 로련한 안마와 교정을 거쳐 십여분만에 거짓처럼 나아져 만면에 웃음을 띠고 문을 나서...
  • 2008-05-20
  • "중국 증시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실력을 갈고 닦고 있습니다."조선족 출신의 여성이 국내 유명 증권사의 핵심 부서에서 당당히 활약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대우증권 리서치센터 글로벌팀에서 중국 경제 및 증시 담당 애널리스트로 근무하고 있는 정향빈(27.여) 연구원이 주인공이다....
  • 2008-05-19
  • 연길시김인권치과의 김정숙(38살)원장은 이 몇년간 장애인이거나 사회에 공헌이 많은 영예군인들에게는 치료비를 감면해주거나 무상으로 치료를 해주는 등 사회공익사업에 발벗고나서고있다. 얼마전 그녀는 18번째 전국 “장애인돕기의 날”을 맞아 도문시 장안진에 사는 시력장애인에게 6000원어치에 달하는 치아...
  • 2008-05-15
  • 무뚝뚝한 첫 인상과는 달리 알고 보면 털털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 구홍 (66세)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기자의 취재를 접수하면서도 "정해진 시간은 딱 20분이라고 한다." 더 이상 말할 게 없단다.   이구홍 이사장은 늘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가 있다. "범을 잡으려면 범의 굴에 들어가라고." 하...
  • 2008-05-12
  • "판매도 예술이다"심양삼흠교과학기술발전회사 김영신 총경리의 창업행보지난 1994년에 교단을 떠나 식당경영, 복장장사, 보일러판매 등에 종사해왔던 심양산흠교과학기술발전회사 김영신총경리는 2004년부터 한국, 대만의 여러종 건축자재총판을 맡아오며 우리 성 나아가 길림지역의 시장개척에서 큰 성공을 가져...
  • 2008-05-10
  • 신임 주상하이 한국총영사관 총영사에 김정기 전 베이징대 연구교수를 임명했다. 청와대는 지난 14일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 서울필승대회준비위원장을 지낸 김정기 전 중국북경대 연구교수를 상하이 총영사로 발탁, 5월 중 부임 예정이다. 김정기 신임 총영사는 1960년 경남 거제시 동부면 오송리에서 태어나 동...
  • 2008-05-1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