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38세 인생담-김옥금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4월11일 11시57분    조회:748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대학입학시험에 내가 몇점 맞았는가구요? 570점 아니면 571점일겁니다.》 3월 6일 저녁 상해포동의 불고기점에서 38세나는 김옥금은 기자를 마주하고 손가락을 꼽으며 옛날의 대학입학시험에서 자기가 따낸 점수를 세여보는것이였다. 《력사, 지리, 수학……》

김옥금은 1987년 료녕성문과 장원으로서 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를 졸업했다. 《대단히 미안해요. 진짜 몇점이였던지 생각나지 않는군요.》 김옥금은 게면쩍은 웃음을 머금었다.

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의 당안에 기재된데 의하면 김옥금의 대입성적은 570점이였으며 그해 시험총성적은 640점이였다.

중학교입학 작문시험에서 명제를 떠나

김옥금은 조선족으로서 신민시호태진4방전촌에서 태여났다. 《나는 소학교때부터 공부를 잘했어요. 수업시간에 강의를 들으면 들은 내용을 모두 기억할수 있었어요. 기억력이 좋았는가봐요.》 그녀를 학습에 노력하게 한 다른 원인은 농사일이 힘들었다는것이다. 그때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공부를 잘해야 했다. 김옥금은 어릴때부터 공부를 잘해 꼭 대학에 가리라 윽별렸다.

소학교때 그의 성적은 학급의 1.2위를 차지했기에 심양시조선족1중에 입학할 희망이 가장 큰 학생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런데 김옥금은 뜻밖의 실패를 맛보게 되였다. 중학교입학시험을 칠때 글짓기가 명제를 벗어나 점수가 깎이우는 바람에 홍기보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하게 된것이다. 그때의 실패를 두고 김옥금은 매우 후회했고 대단히 낯이 깎인다고 말했다. 《매번 마을에서 조1중에 붙은 아이들을 볼때면 특별히 부끄러웠는데 그들을 만날가봐 두려웠고 늘 그들을 피해다녔다.》 작년 김옥금의 웃학년을 다니던 동학이 상해에 왔을때 김옥금은 몇번이고 이일을 꺼냈었다. 김옥금은 그때 《아직도 고중시험이 남아있지 않는가?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면서 자기를 격려했다.

고중입시 《내가 못 붙으면 붙을 사람이 없어요.》

초중을 다니던 첫해가 김옥금에게는 고험이 아닐수 없었다. 집에서 5km 떨어진 학교까지 그는 걸어다녀야 했다. 일년도 안되여 한 마을에서 다니던 10여명 아이들중 옥금만 남았다. 《도보로 학교를 다닌다는것은 정말 힘들었어요. 열몇살 나이는 한창 놀음에 탐할때이지요. 다들 학교를 그만 두다보니 혼자서 얼마나 고독했는지 몰랐어요.》 김옥금은 그 시기의 경력을 회상하면서 한숨까지 후 쉬였다.

초중2학년을 다닐 때 그의 오빠 김수봉이 졸업하고 그한테 자전거가 넘겨졌다. 초중3학년을 마치고 그의 반급에서는 3명이 조1중에 입학하였다. 김옥금은 3년만에 뜻대로 조1중에 입학한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조1중 입학을 너무나 당연한것으로 자신했는데 《내가 못 붙으면 붙을 사람이 없어요.》라고 말할 정도였단다.

학습비결: 부호는 문자보다 기억하기 쉽다

그녀는 1993년도에 상해에 와서 한번도 조1중에 다녀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조1중의 선생님들은 매우 좋으며 교풍도 곧다고 강조해 말한다.

김옥금이 고중에 입학할때의 성적은 학급의 20몇등이였으나 고중1학년하학기에는 학급의 2등이였고 고중2학년때에는 학급의 1등으로 되였다. 《나보다 더 노력을 들인 학생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어떤 친구들은 노력만 했고 방법을 강구하지 않았기에 효과가 썩 좋지 않았지요.》

김옥금은 자기의 독특한 학습방법을 토로하였다. 수업시간에 그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밑줄, 동그라미, 밑점 등 부호로 표시해놓는다. 《부호가 있으면 책을 펼칠때 제일먼저 그곳을 보게 되죠. 부호는 문자보다 기억하기 쉽거든요. 시간이 오래 걸리면 나는 이런 부호만 봐도 그것이 무엇을 대표한다는것을 알게 되죠. 이렇게 배우면 매우 빨리 기억하게 되였는데 나한테는 매우 적합했어요.》 《한 친구가 늘 나의 과당필기장과 교과서를 빌려갔는데 내가 무슨 부호를 사용하면 그도 그 부호를 사용했지요. 그런데 효과는 그닥잖았어요. 사람마다 자기에게 적합한 학습방법을 찾아야지요. 다른 사람의 방법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꼭 자기에게 맞을수야 없죠.》

비평은 장원의 잠재능력을 격발시켜

김옥금이 고중시절 한번 운적이 있는데 리주석이라는 선생님이 그녀의 시험성적이 리상적이 되지 못했다고 비평했을때였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한 옥금이가 처음으로 그렇게 엄한 욕을 먹었다. 《내 꼭 저 선생님에게 보여주리라!》 선생님의 비평은 되려 김옥금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후에 김옥금이 대입시에서 570점을 따내고 료녕성문과장원의 성적으로 심양조1중을 들썩해놓았는데 이는 조1중에서 처음으로 나온 전 성, 전 시 장원이였다.

김옥금은 몇번이고 잠재능력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는데 그가 보기엔 사람들에게는 잠재능력이 있으며 학습이나 공작방면에 꼭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리주석선생님이 자기의 잠재능력을 깨워준데 대해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사직하고 집에서 놀기도 하였다

1987년 김옥금은 성장원의 신분으로 남개대학 경제학계 가격학전업에 입학했다.

대학지망을 쓸때 그는 자기주장대로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자주자립하는것은 김옥금성격중의 중요특점이였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한 김옥금은 공부하기 싫어졌다. 대학1학년때 장학금을 받아본후 김옥금의 대학생활은 별로 특별하다고 할 내용이 없다. 《사람은 매개 단계에 부동한 목표가 있기마련이죠. 그런데 대학시절 나는 갑자기 자기의 목표를 잃었지요. 방향감이 없었고 배워서 무슨 쓸모가 있는지도 몰랐으며 매우 고통스러웠어요.》 동력을 잃은 김옥금은 자기가 배우는 전업을 싫어하기까지 하였다.

1991년 대학을 졸업한후 김옥금은 심양시통계국성조대에 분배받았다. 후에 남편이 단동에가서 공작을 하게 되자 그녀는 사직하고 남편을 따라가 무직업인원으로 되였다. 이런 선례가 없다보니 인사부문에서조차 그의 사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하였다. 사직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말리고 그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했을뿐이다.《나는 자기의 일은 자기절로 결단하는 사람이다.》

김옥금은 단동에서 반년 있다가 심양에 돌아왔다. 1993년에 상해에 있는 한국기업에 취직하였는데 한달 로임이 2000원이였다. 그것은 당시 성조대의 로임의 10배에 해당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매우 좋은 직업도 김옥금은 1년반만에 그만두었다. 원인은 아주 간단했는데 공작압력이 너무 크고 인간관계를 처리하기 힘들었다는것이였다.

두번째로 실업한후 그는 집에 일년간 머물렀다. 그때 남편도 상해에 왔지만 남편이 벌어서 사는데 썩 만족할 김옥금이 아니였다.

심양에 있는 친척이 불고기점을 경영하는것을 보고 김옥금은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나도 할수있다면서 1996년 포동에 불고기점을 개업했다. 첫 석달은 장사가 잘 안되였지만 후에 장사가 불꽃이 튕겨 일년도 안되여 투자를 뽑아내고 지금은 분점까지 세웠다.

딸한테 대한 요구 높지 않다

지금 김옥금은 촌토가 금값인 상해에 140여 평방메터되는 아파트를 장만했으며 슬하에 7살, 4살짜리 두 딸을 두고있다. 장사가 온정하고 생활이 행복하다보니 그녀는 자기가 이전에 료녕성대입장원이였다는 사실까지 까마득하게 잊고있었다. 상해에서도 이일을 다른 사람들하고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한 보통사람일뿐이죠. 장원이 된것은 나의 후날 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일으키지 못했으며 미래를 의미하지도 않았구요. 나를 놓고보면 그저 그런 일이 이전에 있었다는것뿐이죠.》

김옥금은 지금 두딸의 소질교육을 매우 중시한다. 그는 두딸이 자기의 길을 걷지 말것을 바라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응시교육의 수익자이지만 그것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는 늘 두딸한테 백점을 맞지 말라고 부탁한다. 성적이 제일 중요한것이 아니며 자기의 재능을 발견하고 자기의 잠재능력을 발휘하는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늘 가르친다. 김옥금은 만약 자기의 딸들이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그들을 고무격려하여 다른 특장을 발전시키겠다고 말하군 한다.

김장호 기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2008年 내몽골자치구"다른사람돕기모범상" (蒙古自治区“助人为乐模范奖”) 2008年 "10대공익자선모범","전국백명도덕모범"   (“十佳公益慈善模范““全国百名道德模范”) 2007年 "2007년중국예술년...
  • 2009-01-06
  • 노력으로 인기를 창조해가는 박연아리랑 노래 함께 전해온 토장녀성들의 손으로 깨끗이 전해왔네민들레씨앗처럼 세상에 날려 민족의 슬기로 대를 이어가네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우리 민족 토장세월과 더불어 영원히 전해갈 민족의 자랑 2008년 8월 22일에 펼쳐진 제4회 연변민들레생태문화예술절에서 연변민들레생태산업유한...
  • 2009-01-04
  • 오리농법의 선두주자 건강식품의 주창자   —'전국농촌우수인재' 홍상표씨를 적으며    '이제 우리 조선족농민들의 벼농사는 유기농법, 오리농법의 재배를 토대로 록색식품, 건강식품의 생산으로 한차원 올라서야 합니다.' 최근  '전국농촌우수인재' 영예를 따낸 탕원현 탕왕조선족향 금성촌...
  • 2009-01-03
  • 생기발랄한 신진아나운서 최명옥연변인민방송국의 《이 밤을 함께 합니다》, 《살롱토크쇼》, 《건강 365》, 《도전퀴즈》 등 프로그램을 진행하고있는 아나운서 최명옥은 대학교를 졸업한지 4년밖에 안되는 신출내기아나운서이지만 특유의 생기와 순발력으로 맡은바 프로그램들을 능란하게 이끌어가면서 청취자들의 사랑을...
  • 2009-01-03
  • 조선족 전문화 코디 “의료관광 통해 한중 가교 역할 기뻐”[쿠키 건강] 국내외 경제상황의 악화로 미용성형업계도 불황을 겪고 있지만 원화가치의 급락으로 해외 의료관광사업을 준비해온 일부 병원들에게는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가 되고 있다.원화 대비 위안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지난 9월까지 한국을 방문...
  • 2008-12-30
  • —령수인물촬영사진기자 황범송씨 황범송씨의 저택 응접실 벽 한가운데는 등소평, 강택민 그리고 조남기장군과 함께 찍은 사진 석장이 각각 걸려있다. 사진기자로 일해온 황범송씨가 세월속에 남긴 큼직큼직한 자취들을 말해주는 사진들이다. 그는 1952년부터 선후로 연변일보사 사진기자, 연변박물관 사진기자 그...
  • 2008-12-26
  • 1《중국조선족아동문학작가사전》편집위원회에 추천한 작가의 프로필에는 아래와 같은 사항들이 기재되였다.전춘식, 녀, 1952년 2월 21일출생,현재 연변작가협회 리사.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창작위원회 부주임. 처녀작: 1979년 10월 동시“양어장의 누나”, 1982년 연변작가협회에 가입아동소설 《숲속의 하이얀...
  • 2008-12-26
  • 한국예술종합학교 판소리 석사과정 최려령씨(서울=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 중국 조선족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서 판소리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이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화제의 주인공은 최려령(崔麗玲.27) 씨로 2003년 한예종 학부 과정부터 2007년 대학원 과정까지 총 6년간 이 학교에서...
  • 2008-12-24
  • 연변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연변을 두번째로 찾았다는 청화대학 박사생도사인 손철교수는 장기간 미국에서 학습, 사업해왔다면서 도시의 규모 혹은 기초시설건설로 볼때 연변은 뉴욕 등 몇개 주요도시를 제외한 기타 주의 수부도시와 아름다움을 비길수 있다고 말했다. 연변의 구역우세와 무역발전에 대해 손철교수는 연변에...
  • 2008-12-21
  • 지난 12월 10일부터 15일까지 인도네시아 발리섬(것장뛳)에서 개막된 제2회세계청소년무술대회에서 심양의 조선족선수 려태동(19)이 태극권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내여 화제를 모았다. 10일, 개막식과 더불어 제일 먼저 진행된 태극권시합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를 이어 12일, 그는 검술시합에 참가하기로 예정돼있었으나...
  • 2008-12-1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