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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성 제3인민병원 진순옥 전 간호원 총관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12월17일 08시58분    조회:8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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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선 비오는 날 제외하곤 사시절 아침저녁으로 춤을 추고 체력단련을 할 수 있어 지금도 건강하답니다."

인생의 '고희'에 들어선 할머니, 고향과 민족을 떠나 머나먼 '이역'에서 생활한지 반세기 가까워 오지만 순수한  우리말 구사에는  막힘이 없다.

'동방의 하와이'로 불리는 오늘의 해남성은 가는 곳마다 명소들이 진을 치고  밤이면 네온등이 명멸하며 불야성을 이루지만 지난 60년대초, 이곳엔 변변한 도로가 몇갈래 없었으며 도처에 열대 식물이 숲을 이룬 태고연한 벌판이였다.

바로 이런 '섬나라'의 변천과 더불어 살아오며 백의동포  우수성을 알리고 뭇 사람의 애대를 받아온 겨레녀성 한분이 있다.

지난 50년대, 연변의 화룡에서 자라 중학을 마친 진순옥(70세)은 후에 목단강농간국 제2종합병원의 간호원모집시험에 합격하여 백의천사 생애를 시작하였다.

1962년, 100여명 종업원을 망라한 병원 전체가 변강지구, 소수민족지구를 지원하는데 관한 중앙의 지시에 따라 해남으로 이전되여 해남농간국 삼아병원을 설립했다. 당시 병원이라야 허름한 목조건물이었고 길이란  비가 조금만 내려도 자동차가 제자리서 요동을  쳐대는 수준이였다. 저녁이면 문밖은 어디에나 할 곳 없이 깜깜해서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마저 여린 신경을 무섭게 건드렸다고 한다.

기후가 무더운 데다 음식까지 전혀 입에 맞지 않아 사흘이 멀다하게 배탈이 생겼다. 20대 꽃나이에 부모형제를 아득히 멀리에  둔 그녀는 외로움이 찾아드는 밤이면 눈물로 베개를 적시기가 한두번 아니였다.

그래서 연변으로 돌아가겠다고 생트집을 여러번 써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병원 책임자측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맡겨준 일을 막힘 없이 능란하게 해나가는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 한편 여러모로 설득하여 점점 그녀의 마음을 달랬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렇다할 리유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의식한 그녀는 이곳에서 '조선족이 안된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냐며 마음을 다잡고 자신을 채찍질을 했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동정심이 많은 그녀는 간호원업무를  열심히 연찬하며  환자들마다 뜨겁게 대했으며 남들의 어려운 사정이 있으면 서슴없이  도와 날이 갈수록 병원 책임자측과 동료들의 환심을 사게 됐다.

또 어려서부터 무용, 체육에 남다른 자질을 가졌던 그는 해남에 간후 실력이 바로 드러나 명절행사때면 처녀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준 한복을 차려입고 자작종목을 선보여 좌중의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베트남, 일본, 태국  등 많은 나라의 정상이나 주덕 전인대위원장을 비롯한 중앙령도자들이 해남에 올 때마다 순옥이는 평소보다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병원무용팀을 결성해 련일 밤마다 공연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려 매번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해남의료계통 륙상경기에서도  선후로 여러차례 100미터, 1500미터 종목 경기에서 1등을 독차지함으로써 '재간둥이'란 별명이 따르기도 했다.

현지에 조선족이 없어 병원의 타민족 의사와 결혼한 후에도 그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두번이나 류산을 하고 서른이 넘어서야 아들형제를 보게 됐다.

애들을 키울 때 낮에는 탁아소에 보내지만 내외가 모두 야간당직을 서는 날이면 애들을 집안에 가둬 둔채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는 날도 비일비재했다. 애들을 핑계대거나 몸이 고달프다는 리유로 결근하는 법을 몰랐다고 한다.

자신의 실무능력이 점차 인정되자 삼아농간국병원에서 10여년간 간호장직을 맡아오던 그는 후에 1000여명 종업원을 둔 해남성 제3인민병원에 전근되여 퇴직전까지  300여명 간호원을 총관하는 중임을 맡게 됐다.방대한 대오를 거느린 그는 나름대로의 처세방식과 솔선수범역할로  간호수준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병원내 '미소봉사'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겨레녀성의 리더십을 과시하기도 했다.

직업에 대한 충성과 끈질긴 노력으로  여러차례 병원의 모범 간호사, 우수당원영예를 안았으며 해남농간총국 로력모범,선진공작자로 당선됐다.

그만큼 퇴직후에도 아침 저녁으로 병원내 무도장과 해변가 로천무도장을 다니며  사교춤과  로인들의 건강단련보급에 열성을 집중했으며 여러가지 로년공연행사에도 다년간 골간으로 활약했다.

'고군작전'이였지만 자신의 꾸준한 실천으로 병원에서 조선족의 위상을 수립하여 자부심을 갖게 되자 그는 남편과 상의하여 두 아들을 소학교 다닐 때 호적의 민족성분을 모두 조선족으로 고쳤다. 애들은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어설픈 솜씨로나마 통배추에 다진 마늘, 소금, 고춧가루 등을 버무려 만든 김치 맛에  길들여졌고 그동안 어머니를 따라 연변의 외가집에도 몇번 다녀오면서 자기 민족을 알게 됐다.

그리하여 후에 각기 외지에서 일을  보던 두 아들은 TV에서 연변이나 한국,조선관련 중요한 스포츠, 공연 등의 예고가 있으면 꼭꼭 전화로 알려 어머니더러 시청케했다.

지난 70년대 중반이래, 겨울철이면 연변에서 가끔 벼육종팀이 몇명씩 오곤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너무도 반가워 명절이 돌아오면 한집식구처럼 모셔다 련일 대접했다. 그들이 떠나는 날이면 부두가에 나가 눈시울을 적시며 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가지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해남이  개방된후 지금은 동북지구서 조선족로인들이 들어와 생활하며 자주 만날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말 오랜 세월 민족이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말이다.

현지의 부득이한 상황에 큰 아들이 타민족 녀성을 맞아들이자 그는 3년전 작은 아들 로가(卢珂, 33세)를 고향인 연변의 화룡에 보내어 정부기관에 있는 막내 동생의 주선으로 모 광석가공회사에 취직하게 했다.우리말과 풍속습관을 배우는 동시 조선족처녀를 사귀여 보라는 크나 큰 기대를 걸었었다.

하지만 연분이 닿지 않은 점도 있으려니와 그곳에서 대학을 지망하지 않은 처녀들은 거의 한국으로 시집을 가거나 아니면 대도시, 연해지역으로 떠나다보니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아 2년동안 있으면서 소원성취를 못하고 혼기를 늦춘 나이에 삼아로 되돌아 갔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흑룡강신문'을 통해 우리민족 처녀와 인연이 닿게 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내비쳤다.

"지난해 여름 13년만에 화룡에 갔습니다. 장백산 천지에도 오르고 아버지의 고향인 조선의 무산을 건너다 보며 두만강물에  무릎까지 적셔보았습니다.국내외에 관광지로 알려져 흥성하는 해남에 비해 연변은 발전이 좀 더디긴 하지만 가는곳 마다 우리말, 우리 노래를 들을수 있고 우리 고유의 풍속을 느낄 수 있어 정답기만 했습니다."  

야자림속의 한떨기 진달래, 세월의 앙금이  겹으로 가라앉아도 태여나서 자란 고향과 민족에 대한  애착은 식을줄 모르는  겨레녀성이였다.

/김명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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