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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특급무용예술가 최옥주녀사를 찾아서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5월8일 22시32분    조회:7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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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언어로 쓰는 서사시 

무용은 인류사회 최초의 예술이다. 무용, 음악, 문학이 미분화상태로 있던 원시사회 무용은 음악, 문학과 더불어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반영하였다. 몸짓으로 풀어가는 기쁨과 애환, 바로 이런 무용의 언어로 인생의 서사시를 써가는 예술가가 있으니 그가 바로 73세에 나는 저명한 조선족예술가 최옥주녀사이다.

1980년, 중국소수민족 회보공연에 참가할 무용 "쌀함박춤"
을 창작하면서

못난 새끼오리가 백조로

최옥주란 이름은 우리들한테 낯설지 않다. 무용가로, 무용교육가로, 안무가로 널리 이름을 떨친 그의 무용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사람들은 무용가나 가수는 타고난 천재라고 한다. 그러나 최옥주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1950년, 도문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 16세에 이르도록 황홀한 무대는 물론 학교무용대에도 들어보지 못했다.춤을 출줄 모르는 그였으나 춤을 구경하기를 무척 즐겼다.

1950년말 연변가무단에서는 도문중학교로 무용배우모집을 내려갔다. 춤구경을 좋아하는 최옥주인지라 호기심을 누를길 없어 시험장으로 구경하러 갔다. 무용대의 아이들이 하나하나 앞에 나가 반주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었다. 옥주는 저도모르게 시험관앞에 나섰다. 춤을 출줄 아느냐는 시험관의 물음에 옥주는 “모릅니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얼마나 황당한 대답인가? 춤 출줄 모른다는 사람이 무용배우를 뽑는 시험관앞에 나섰으니 말이다. 시험관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참으며 격려의 차원에서 “그럼 도약이라도 해보오”라고 하였다. 최옥주는 부끄러움도 잊고 당돌하게 올리뛰고 내리뛰면서 “체조”를 하였다. 장내에는 삽시에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그는 그 웃음소리도 듣지 못하고 계속 열심히 뛰였다. 시험관이 손을 흔들어 제지시켜서야 멈춰선 그는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었음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시험결과는 너무나 상상밖이였다. 유치원때부터 춤을 익혀온 아이들을 제쳐놓고 이 “체조선수”가 무용배우로 뽑혔던것이다. 그를 뽑은 시험관은 당시 연변가무단 단장이였던 김태희선생이였다. 김태희선생은 나중에 최옥주의 무용가다운 신체소질과 진지하고 이악스러운 정신력을 보고 선발했다고 고백했다.

독무 "씨뿌리는 처녀"를 추고있는 최옥주

하늘을 얻은듯했던 최옥주는 단발머리를 하고 가무단으로 찾아갔다. 무용배우는 머리를 길러야 한다는 상식조차 몰랐던 그는 또 한번 웃음거리로 되였다. 당시 가무단의 30여명의 배우들중 유독 최옥주만이 춤 출줄을 몰랐다.

그는 참으로 “못난 새끼오리”였다. 그는 두달동안 동료들의 조소만 받다가 되돌아가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런데 운명이 달라질려고 그랬는지 마침 도장을 책임진 문서가 출장가고 없어서 그는 며칠 더 묵는수밖에 없었다. 때를 같이하여 가무단에서는 두달동안 순회공연을 나갔다. 옥주는 이것을 기회라 여기고 홀로 남아 무용동작을 익히기 시작했다.북풍이 휘몰아치는 밤에 그는 두려움에 가슴을 졸이면서도 눈가루가 날려드는 련습실을 찾았다…

두달만에 순회공연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그때까지 남아있는 옥주를 보고 놀랐다. 뿐만 아니라 조용히 얼굴을 붉히며 그사이 홀로 남아 련습했다는 옥주의 말에 모두들 또 한번 놀랐었다. 김태희단장이 춤을 춰보라고 하자 옥주는 이를 악물고 익혔던 무용동작들을 진지하게 표현하였다. 모두 놀라운 눈길로 보았다. 재간없는 “미련둥이”로만 보였던 그가 이처럼 놀라운 진보를 가져올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것이다. 옥주의 이악스러운 정신에 감동된 김태희단장은 옥주가 가무단에 남는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옥주에 대한 조소와 기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련습실에서도 계속 한쪽 구석으로만 몰렸다. 그러나 옥주는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련습실에서 무용훈련을 하면서 남들보다 가배의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1년반이 되도록 그는 한번도 무대에 올라보지 못하였다. 이는 무용배우에게 있어서 더없이 부끄러운 일이였다. 옥주는 그저 무대뒤에서 독무건 쌍무건 녀자역이건 남자역이건 할것없이 부지런히 남의 무용동작을 따라할뿐이였다. 닥치는대로 무용동작을 익히는 그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군무에도 끼우지 못하는 주제에 독무를 탐낸다고 비웃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익힌 무용이 옥주의 무용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소수민족참관단이 연변에 왔을 때 오르쳔쌍무를 추던 녀배우가 갑자기 앓아서 춤을 추지 못하게 되였다. 그 무용을 꼭 무대에 올려야했는데 녀배우가 앓아눕자 상황은 급하게 되였다. 이때 누군가 옥주가 그 춤을 출줄 안다고 하였다. 그 녀배우를 흉내내여 뒤에서 따라 췄던 옥주였으니까. 한번 춰보라는 조득현선생(연변가무단 안무가)의 제의에 옥주는 몹시 긴장하였으나 최선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처음으로 무대에 나서게 된 옥주는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저도 모르게 무용의 경지에 빠져들어갔다. 이윽고 박수소리가 터졌다. 연기자에게 있어서 박수보다 더 큰 긍정이 없으며 박수보다 더 큰 영광이 없다.

“못난 새끼오리”는 마침내 “백조”로 되여 “호수”우에서 자유롭게 춤추게 되였다.

무용언어로 풀어가는 인생

1957년 여름, 연변예술학교가 설립되였다. 당시 교장을 맡았던 김태희선생은 가무단에서 12명의 배우를 골라 무용교원으로 데려갔는데 그속엔 최옥주도 끼여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춤은 잘 추지만 교수경험이 없고 발레무교수를 못한다고 남들의 말밥에 올랐던 옥주는 북경무용학원 졸업생들에게 밀리게 되였다. 자신의 단점을 알고 곤혹속에 빠졌던 그는 어느 연회석상에서 당시 연변자치주 주장이였던 주덕해동지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가무단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청을 들었다. 주덕해주장의 도움으로 1960년 최옥주는 북경무용학원에서 연수하게 되였다.

그때 북경무용학원에서는 쏘련 모스크바대극장의 무용대사 구세예프를 청해 발레를 가르치게 하였다. “백조의 호수”를 배워줄 때 이 전문가는 자신의 학생외에는 누구도 련습장에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슨 일이 있어도 배워야겠다고 다짐한 옥주는 “얼굴이 두터운” 학생이 되여 몰래 련습장에 숨어들어갔다. 그러다 발각되면 쫓겨나오기도 하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숨어들어가서 배우군 하였다. 나중에 구세예프도 지쳤는지 더는 내쫓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때론 자신의 옆에 와서 구경하라고 손짓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구세예프의 교수법을 배운 옥주는 구세예프처럼 무대설계, 조명, 복장, 소도구, 음악, 무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능숙하게 다를줄 아는 다면수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한번은 모스크바대극장 발레무단이 북경에서 공연하게 되였는데 표를 얻을수 없었던 옥주는 빵을 사서 호주머니에 넣은후 대낮에 극장에 들어간 다음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조명등밑에 숨어서 책을 보다가 저녁이 되면 공연을 구경하군 하였다.

기자의 취재를 받으면서

북경에서의 공부는 불과 2년밖에 안되였지만 최옥주의 예술생에에 한차례의 비약을 가져다주었다.

1962년 다시 가무단으로 돌아온 그는 독무 “양모는 처녀”, “긴수건춤”, 쌍무”목가”를 추어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10돐 기념콩쿠르에서 우수배우상을 탔다.

그후 최옥주는 조직의 수요로 무용창작에 몰입하게 되였다.

1966년, 최옥주는 연길현의 동성, 조양천 등지의 농촌에 내려가 생활체험을 하면서 “쌀함박춤”을 창작하여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고 장춘영화촬영소에서 영사막에 올리기까지 하였다.

무용 “논물관리원”은 그가 장장 16년동안 창작, 수정, 재창작하여 성공한 작품이다. 무용의 재창작을 위하여 그는 두달동안 농촌에 내려가 맨발로 논밭을 다니면서 논물관리원을 관찰하였다.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작품은 건국 30돌기념 전국예술축전에서 창작 1등상을 수여받았다.

1983년, 중국무용단의 성원으로 일본에서 열린 세계 “비단의 길”음악회에 참석한 그는 “중국혁명의 노래”(제4,5장), “금파도 설레인다”, “도라지”등 무용을 창작하여 일본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최옥주는 무용을 한층 높은 차원에로 끌어올릴 웅심을 품고 독특한 예술구사로 단순한 무용창작으로부터 “무용”으로 “극”의 맥락을 이어가는 무극창작의 새로운 길을 탐색해나갔다.

무용은 표정이나 몸짓, 동작 등으로 표현하고저 하는 심층의 정서를 표현해야 한다.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이러한 몸짓, 동작, 표정 등 무용언어로 내심의 정서를 표현한다는 것은 비교적 추상적인 예술활동이다.

최옥주는 많은 곤난에 부딪칠 각오를 하면서 문학작품인 “춘향전”을 무극으로 표현하고저 1986년에 구상하기 시작하여 1988년부터 본격적인 창작에 들어갔다.

때는 한창 “현대무용”이 “전통무용”을 압도하던 때라 1986년 남경에서 열린 전국무용창작토론모임에서 민족전통무용연구자들은 고립되였다.

“민족의 력사를 파헤치고 거기서 인간을 찾고 민족의 넋을 찾으리라.”

무극 "춘향전"

“춘향전”은 그번 모임이 있은후 옥주의 일종 오기로 시작된 무극이였다.

하지만 이 무극의 진행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기성된 가사가 있는것도 아니고 순수 몸동작과 음악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완성한다는 것은 난이도가 아주 높은 작업이였다. 게다가 이름있는 작곡가들마저 무극의 작곡에 선뜻 나서주지 않았다. 옥주는 록음테프를 한아름 안아다 자신의 정서에 알맞은 곡을 뽑아내여 17분동안의 단편무극-광한루에서 춘향과 리몽룡이 만나는 장면의 무용곡을 조합해 내였다.

작품의 완성가능성이 보여지자 작품의 정서를 파악한 작곡가들이 무용곡을 창작해주었다.

그리고 하나의 대형무극이 무대에 선보이려면 적지 않은 자금도 필요하였다. 옥주가 부지런히 여러 유관부문들을 찾아다니며 노력한 덕분에 “춘향전”을 위한 전 민족적인 자금후원활동이 벌어졌다. 이리하여 도합 30여만원의 거금이 모여졌다.

최옥주의 곡절많고 끈질긴 노력은 마침내 사회 각 계층의 지지를 얻게 되였으며 잇달아 무극은 완성되였다.

1990년 10월 2일, 5막 8장으로 된 대형무극 “춘향전”이 북경 중국극장에서 첫선을 보였다. 서막에서만도 박수갈채가 여섯차례나 터졌다. 공연이 전부 끝나자 장내는 10여분간이나 열렬한 박수가 계속되였다.

문화부의 하경지부장대리는 이 무극을 본후 “한부의 훌륭한 무극, 훌륭한 예술을 보아서 기쁩니다. 조금만 세절수정을 거치면 우리 나라에서 일류로 꼽히는 성공적인 무극으로 될수 있습니다.”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최옥주의 혼백이 스며있는 무극 “춘향전”은 영예롭게도 1990년 북경아시아예술축제에서 1등상을, 1991년에는 중국예술의 최고상인 문화대상을 수상하였다…

무용에 넋을 빼앗긴 최옥주.

73세 고령에 이르렀으나 무용에 대한 그의 열정은 조금도 사그러들줄 모른다. 1989년, 연변조선족무용연구소를 세우고 소장직을 맡아왔던 그는 1995년 연변에 조선족무용학교를, 2001년에는 북경에 조선족무용학교를, 2002년에는 최옥주무용예술단을 세워 많은 조선족무용인재를 양성해내였을뿐만아니라 최승희전통무용을 계승, 발전시키는것을 일생의 사업으로 간주하고 또 그것을 줄곧 실천에 옮겨왔다. 그는 2008년 북경올림픽을 계기로 최승희전통무용을 국외에도 전파할 예정이다.

무용언어로 적어가는 그의 서사시, 이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글/사진  전혜흔 김성기 리옥화 ‘민족단결’기자

최옥주 프로필:

1935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출생.

선후로 길림성무용가협회 부주석,

연변가무단 부단장, 중국무용가협회 상무리사,

연변무용가협회 주석, 연변문련 부주석 등 력임.

국가특급예술가로 국가특수공헌수당금 향수.

주요작품으로 대형무극 “춘향전”등 다수.

중국문화부 문화대상, 한국문화대상 등 수십차 수상.

《중국예술가사전》, 《중화문화명인사전》등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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