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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떼떼》 좌우충돌 배우의 길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6월15일 15시50분    조회:8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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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떼부부》가 며느리를 보게 되였다. 즉 《작은 떼떼》가 사귀는 녀자친구를 데리고 부모님께 인사시키러 온다. 그런데 귀가 어두운 어머니는 며느리감을 보고 왕청같은 말들을 늘여놓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는 며느리감을 보고 말한다는것이 로친한테 대고 말한다. 그래서 김광철은 난처하기 그지없다. 다행히 사리밝고 례모있는 녀자친구는 이런 시부모님을 꺼리지 않고 시어머님께는 보청기를, 시아버님께는 은형안경을 선물한다.
곧 선보일 《떼떼부부》와 며느리감의 첫만남을 희극적으로 그린 소품 《새 며느리 오던 날(리동훈, 오선옥, 김광철, 한예화 출연)》로 관람객들에게 폭소를 안기고저 배우 김광철씨는 요즘 연기연습으로 아주 분망히 보내고있다.

    학생시절에는 인기있는 손풍금수

1996년 소품 《칼 가는 사람》으로 혜성같이 데뷔하여 시청자들에게 많은 웃음을 안겨준 김광철씨한테는 또다른 예술적재질이 있다. 그것은 바로 건반반주이다.
1975년 왕청현 하마탕향 후하촌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김광철은 동년시절을 하마탕향 영안촌에서 보냈다. 음악을 좋아해서 여러가지 악기를 소일거리로 다룬 그의 아버지는 소학교 4학년에 다니는 김광철씨에게 강창현선생(현 왕청소년궁 주임)을 스승으로 모시고 손풍금을 배우게 하였다. 그때 농촌에서 단독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배운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래서인지 김광철씨는 학창시절 줄곧 학급에서 문예위원으로 활약하였고 크고작은 활동에서 손풍금연주 또는 손풍금반주를 하여 학교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럼에도 앞으로 커서 음악으로 성공하고싶다는 생각을 크게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진학하여서는 희극배우로 되고싶다는 명확한 꿈을 가지게 되였다. 어려서부터 소품을 특별히 즐겨보면서 희극배우들이 참 멋지고 부러웠던 김광철씨는 매번 구연단에서 공연을 오면 한번도 빠뜨리지 않고 관람하였다.
《그때 소품에 점점 빠져드는것을 걷잡을수 없었다. 매번 공연을 관람하고는 아쉬운 마음에서 배우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구연단뻐스가 떠나갈 때까지 지켜보았다》고 말문을 연 김광철씨는 《어디 그뿐인가, 일요일이면 〈요청무대〉프로그램의 소품을 볼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종일 흥분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솔직히 털어놓았다.
김광철씨는 소품을 보는데만 그치지 않고 본후에는 꼭 집에서 슬그머니 모방해보았다. 처음에는 리영근선배를 모방하였는데 소품 《사위감점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사를 전부 다 외우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리동훈선생의 《통졸임사건》을 본후로는 리동훈선생을 많이 모방하였다. 어찌나 열심히 모방하였는지 한때는 보통말까지 더듬는 현상이 나타나서 부모한테 많은 꾸지람을 들었다.

      교원생활중에도 계속된 소품배우꿈 

중학교를 졸업하고 왕청연수학교에서 2년간 연수한 김광철씨는 졸업후 왕청현 중안중심소학교의 음악교원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교원사업을 하면서도 그는 계속 손풍금을 배웠지만 마음속으로는 꼭 소품배우로 되고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연변구연단에서 배초구로 공연을 왔다. 중안에서 배초구까지 걸어가 공연을 관람한 김광철씨는 관람객들이 배를 끌어안고 웃을 때에도 크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그날 소품이 웃기지 않아서가 아니였다. 다만 《나도 저렇게 웃음을 안겨줄수 있지 않을가》는 생각에 골똘하다보니 그만 웃는것마저도 잊었던것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잠을 이룰수 없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당시 구연단의 강동춘단장한테 《구연배우로 되고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다 쓰고나니 이미 새벽 2시가 넘었다.
후날 김광철씨가 구연단 소품배우로 된후에 강동춘단장은 웃으면서 그때의 편지를 꺼내보였다. 우스운것은 그때 김광철씨가 쓴 주소였다. 《연길시조선족구연단》의 《구연단(曲  )》을 《구연단(口演 )》으로 썼던것이다. 그래도 편지는 용케 구연단에 갔지만 소식은 감감했다. 5년 넘게 지나 자기의 편지를 다시 본 김광철씨는 무조건 밀어붙이고싶었던 그때의 열정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생활의 기로에서

《어떻게 하면 소품배우로 될수 있을가?》하고 날마다 고민하던 김광철씨는 우선 돈을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한달에 겨우 로임 110원을 받았던 그는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왕청의 한 나이트클럽(酒 )에서 전자풍금반주를 하였다. 처음에는 한달에 로임 400원을 받았는데 교원로임보다 엄청 높았다. 그래서 방학이 끝나 개학이 돌아오자 단연 교원직을 버리고 큰돈을 벌어보려고 하였다. 건반반주라면 원래부터 신심있는 일이였기에 얼마 안지나 인기가 상승했고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서로 로임을 올려주면서 초청하였다. 덕분에 로임은 인차 1500원까지 치달아올랐다. 그런데 높은 로임에도 그는 결코 돈을 모으지 못했다. 여기저기 친구가 늘어나자 끊기지 않는 부조와 매일이다싶은 술놀이에 남들의 10배도 넘는 로임이 늘 모자랐던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걷고있는 길이 정확한가》는 생각이 든 김광철씨는 가정이 연길로 이사하자 단연히 왕청을 떠나 연길에 왔다. 다시는 나이트클럽에 발을 담그고싶지 않았던 김광철씨는 연길에 와서 1년남짓이 놀면서 다시 새로운 도약을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하루는 구연단의 공연표를 사러 연변대학구락부에 갔다. 마침 강동춘단장이 표파는 곳에 있었다. 김광철씨는 기회를 만났다는 생각에 강동춘단장을 붙잡고 《어떻게 하면 구연단에 들어갈수 있나요?》하고 물었다.
《동무가 날쌔면 들어올수 있지 않을가? 동무만 잘하면 임자가 다 있는 법이네.》
표를 끊고 집으로 돌아온 김광철씨는 강동춘단장의 애매한 한마디를 되새기고 또 되새기면서 그 의미를 음미해보았다. 어쩌면 알듯하면서도 딱히 짚이지 않았다.

         인기소품배우 리동훈선생의 제자로 

당시 김광철씨는 자신이 주로 연기를 모방했던 리동훈선생님만은 꼭 만나보고싶었지만 전화번호를 알길이 없었다. 하루는 밤 9시가 넘어서 한 상점에 찾아가 공공전화로 《114》에 문의했는데 리동훈이라는 이름으로 된 전화가 엄청 많았다. 한집한집 전화해보았는데 4번째만에 저쪽켠에서 《여보세요》하는 그토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해나 할말을 잃은 그는 인차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상점에서 작은 병의 술을 사서 단숨에 마셔버린후에야 겨우 마음을 눅잦혔다. 그는 술기운을 빌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리동훈선생이 전화를 받자 그는 인차 《저는 선생님을 모방해온 사람인데 한번만 만나서 배우감이 되겠는가만 보아주십시오》라고 청을 들었다.
리동훈선생은 《밤이 깊었으니 나중에 다시 보자》고 거절했다. 그러자 김광철씨는 《제발 5분간만 만나주십시오》하며 간청했다. 결국 리동훈선생은 집위치를 알려주었다. 그가 도착해보니 리동훈선생이 우산을 들고 큰길에서 기다리고계셨다. 꾸벅 인사를 드리고 《시간나면 선생님한테서 가르침받고싶다》며 졸랐지만 역시 거절당한 김광철씨는 《한번만 보아주십시오. 선생님께서 본후에도 안된다면 이 길을 포기하겠습니다》고 부탁하였다.
리동훈선생은 그의 진지한 모습에 《그럼 래일 아침 9시에 다시 보자. 그러나 래일 올 때에는 절대 술냄새를 풍기지 말고 오라》고 승낙했다.
이튿날 리동훈선생을 정식으로 만나 《배우고싶다》는 뜻을 밝히자 리동훈선생은 《구연단에서 련습하거나 공연하는것을 자꾸 보노라면 배울수 있을것이니 우선 구연단에 와서 보는게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리동훈선생의 소개로 그는 구연단에 자주 다녔고 순회공연도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1996년에는 연길시조선족구연단에 학원으로 들어가게 되였고 행운스럽게 극본 《칼 가는 사람들》을 손에 쥐게 되였다. 이미 제자로 인정한 리동훈선생은 날마다 김광철을 집에 불러 함께 연기를 맞추어보면서 열심히 배워주었다. 얼마 안지나 순회공연에서 두 사람은 《칼 가는 사람들》을 선보였고 그 소품으로 김광철씨는 정식으로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당시 《떼떼》로 이름높은 리동훈선생과는 너무나 판이한 생김새였지만 얼굴표정과 행동 그리고 말까지 똑같은 김광철에게 사람들은 《작은 떼떼》라는 친근한 별명을 달아주었다. 그 소품은 1998년 길림성희극소품콩클에서 연기 1등상을 수상했고 연변TV방송국 《9.3》맞이문예프로를 통해 방송되면서 김광철의 인기도는 더 높이 상승하였다.

         평탄치 않은 소품배우의 길

1997년도에 정식으로 연길시조선족구연단의 소품배우로 입사한 김광철은 날듯이 기쁜 한편 근심도 태산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한다하는 로배우들과 또 다른 신인배우일지라도 정규적인 학교를 졸업하였으니 그들앞에서 자꾸만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더 노력에 박차를 가하였고 연기련습을 할 때거나 공연이 끝난후에는 꼭꼭 선배님들을 찾아 가르침을 부탁하였다.
《많은 선배님들이 차근차근 잘 배워준덕분에 소품을 더 잘할수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보귀한 조언을 주신 선배님들이 너무나 감사하다.》
김광철씨는 선후로 《누구를 속여(전영호, 김광철 출연)》, 《철없는 가정(리동훈, 오선옥, 김광철 출연. 2002년 길림성희극소품콩클 연기 1등상)》, 《추억의 종소리(리동훈, 오선옥, 김광철 출연.)》, 《가짜혼인소개소(김문혁, 리향화, 김광철 출연)》, 《못말리는 코미디언(강동춘, 리동훈, 박성룡, 김광철 출연)》, 《샅샅이 뒤져라(리동훈, 오선옥, 김광철, 전영호, 김광철 출연. 2007년 길림성희극소품콩클 연기 1등상)》 등 수십편의 소품에서 다양한 배역을 맡으면서 희극배우로서의 립지를 굳혔다.
이외에도 전국소수민족구연콩클 국가문화부 종합 1등상, 연변제2기구연절 최고신인상 등 수많은 영예를 안아온 김광철씨는 지금 국가구연가협회 회원, 길림성구연가협회 회원, 연변구연가협회 회원으로, 연길시조선족예술단 구연부 부부장으로 넓은 활약을 펼치고있다.
현직 연길시조선족예술단 구연부 김문혁단장은 김광철씨를 두고 높이 평가하였다.
《함께 10년간 사업해왔는데 성장이 빠른 배우이다. 비록 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해 처음에는 로배우들을 모방하는것으로 시작하였지만 배가의 노력으로 자기자신만의 개성을 갖추었다. 물론 연기에서 천부적인 자질이 필요하지만 고심한 연구와 노력이 더 중요하다. 김광철부부장은 일생을 연기에 바치겠다는 애착심으로 집요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배우이다. 지도부에서는 그를 우리 구연단에서의 앞길로 생각하고 그 자신 또한 앞길로 될 각오로 부지런히 노력하고있다.》

          행복한 가정의 가장

2003년 음력설야회에서 소품 《김치아줌마》의 기계사람역을 맡았을 때 그의 분장을 맡았던 박해영에게 호감을 가졌던 김광철씨는 분장을 받으면서 두루 얘기를 나누던중 《우리 교제해보는것이 어떠한가》고 넉살좋게 물었다. 연분이였던지 두 사람은 묘하게도 다 후하촌에서 태여났고 김광철씨는 3살에, 박해영은 6살에 후하에서 이사를 갔다. 거기에 량가 부친이 서로 형님, 동생하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래서 두 사람의 교제는 량가부모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고 2005년에는 결혼에 골인하였으며 지금은 3살난 아들을 두고있다.
결혼후 김광철씨는 《행복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였다》면서 《결혼전에는 하고싶은 사업을 하는것이 하냥 즐겁기만 했는데 결혼해보니 가정 또한 행복한 보금자리이다》며 입버릇처럼 외운다.
《안해가 착한가보다》는 말에 그는 기다리기라도 한듯 《그럼요, 얼마나 무던하다구요. 나의 사업을 잘 리해해주는것도 좋지만 시부모한테 각별해서 더 좋습니다. 슬그머니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장에 가서 옷을 사드리고 시아버지한테 자주 맛나는 술안주에 술을 사드리며 조금만 편찮아도 병원에 모시고간답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들은 크고작은 일에 며느리부터 찾군 하죠》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행복한 가정의 가장인 김광철씨는 《앞으로 이런 행복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련다》면서 사업에서 또한 《대중들이 싫다고 할 때까지 연기를 계속할것이다. 그리고 연기에 대해 파고들어 대중들의 제일 사랑받는 배우가 되고싶다. 예술의 길을 끝까지 걸어나갈것이다》고 경건하게 말한다.
앞으로 대중에게 더 큰 웃음을 안겨주는 김광철씨의 성숙된 모습을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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