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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룡해-촬영가에서 사업가,사회활동가로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7월20일 15시24분    조회:6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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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연변촬영가협회의 직원으로부터 부비서장,부주석,주석을 거쳐 길림성촬영가협회 부주석직을 련임한 촬영가 남룡해씨가 연해지구인 청도시에 진출한후 우리 민족을 위한 사업에 적극 투신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룩하고있다.지난 주일에 휴가차로 청도에 잠간 다녀온 기자는 남룡해씨와 대화를 나눌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아래에 우수한 조선족촬영가로 이름을 날린 남룡해씨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사진에 빠져있던 나날

1954년,도문에서 4형제중 둘째로 태여난 남룡해씨는 어려서부터 연변일보사에서 촬영기자로 근무하는 황범송외삼촌을 무척 따랐다.그때로부터 사진작가의 꿈이 싹트고있었는지 그는 거의 매일이다싶이 외삼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고 외삼촌만 나타나면 그가 메고다니는 독일제카메라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그러는 조카가 보기 딱했는지 외삼촌은 드디여 카메라를 만져볼수 있도록 허락을 했고 어린 남룡해는 또 카메라를 조심스레 만져보던데로부터 어머니나 외삼촌을 세워놓고 빈 샤타를 누르며 사진을 찍는 시늉을 했고 어느날엔가는 대담하게 샤타를 눌렀다.

이렇게 찍은것이 암실에서 사진이 되여 나오는것을 보며 흥분을 걷잡지 못하던 그는 그후부터 야단을 맞으면서도 쩍하면 외삼촌의 카메라를 가만히 훔쳐내다가 친구들을 찍었고 사진종이며 약을 절로 사다가 밤이 되면 캄캄한 방에서 붉은등을 켜놓고 사진을 씻었다.

1970년에 초중을 졸업하고 연변농기구공장에 견습공으로 들어간 남룡해씨는 공장에서 가장 힘든 부서인 주물직장에서 일하면서도 휴식시간이면 주위의 모든것을 렌즈에 담았다.이런 작품들이 하나둘 신문에 실리면서 사진예술에 완전히 매료된 그는 밤대거리를 할 때면 낮에 사진을 찍었고 낮대거리를 할 때면 밤에 사진을 현상하군 했다.
그후 외삼촌이 연변박물관으로 전근하게 되자 그는 신비한 암실에서 외삼촌의 강의를 귀담아 들으면서 사진작품의 수준을 제고하기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이때로부터 그의 작품들은 질적으로 승화를 가져와 자치주급의 전시회에 전시되는 행운을 누리게 되였고 그자신은 또 사진업계의 화제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로 되였다.
               
         촬영계의 행운아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남룡해씨는 자기에게 너무 많은 행운이 차례진것 같아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있다고 터놓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경축행사를 준비하던 1978년에 남룡해씨는 연변촬영가협회 주석의 신분으로 사진전시회의 주임직을 겸임하게 된 강찬혁선생님의 주선으로 사진전시회 사무실의 림시직원으로 채용되고 길림화보사에 가서 3개월간 천연색사진현상기술을 배울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연변력사연구소의 사진편집으로 초빙된 그는 1980년대에 강서대학 신문학부 사진전업에 입학,사진리론을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이 세계에 대한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꿈으로써 예술감각과 사진기교면에서 놀라운 진보를 이룩할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복은 쌍으로 날아든다고 하더니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운명은 재차 그를 향해 손짓하고있었다.그동안 연변문학예술련합회산하의 촬영가협회에서 지도사업을 맡고있던 강찬혁선생님이 본과대학에서 촬영을 전공하고 촬영예술을 생명처럼 사랑하며 연변촬영예술계의 사업을 이끌어갈수 있는 후계자를 물색하던중 남룡해씨를 적임자로 점찍었던것이다.

이렇게 촬영예술분야의 중요한 작가로,조직자로 부상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 남룡해씨는 불타는 정열로 사업을 전개,신인들을 양성하고 촬영가들의 활동을 조직하며 촬영작품전시회를 비롯한 여러가지 행사들을 마련하느라 땀동이를 쏟는 한편 개인적으로도 긍정을 받을만한 촬영정품을 창작하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전직촬영가의 보람찬 인생

전직촬영가로서의 남룡해씨는 작품창작에서 부드러움과 강인함,밝은 심성과 다감한 정서를 고유한 우리 민족의 령혼을 남김없이 보여줄수 있는 고차원의 예술정품을 창작하는데 정력을 몰부었다.이런 집착이 있었기에 그는 1년사계절 시간만 있으면 장백산에 올라 민족의 성산 장백산의 아름다운 모습,웅위로운 기백,거칠고 호방한 성격 및 섬세한 변화를 렌즈에 담을수 있었고 촬영작품을 매개로 우리 민족의 진실한 모습을 세인들에게 보여줄수 있었다.그는 또 황산,태산 등 명산은 물론 귀주,사천,운남 등 편벽한 소수민족지구를 주름잡으며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북경,상해,광주 등 대도시들의 수풀을 이루는 고층루각과 현대인들의 생활절주에서 삶의 고뇌와 인생의 깊이를 감지하면서 수백점의 작품을 창작해냈다.그중 많은 작품들은 국내외의 촬영전시회에 전시되거나 신문잡지에 실리여 절찬을 받았고 여러급별의 상을  따내였다.그리고 남룡해씨 본인은 연변촬영예술분야에서의 뛰여난 성과로 전국덕예겸비촬영가로 표창을 받고 중국촬영가협회로부터 국제문화교류기여상을 타기도 했다.

이밖에 그는 수십차나 조선,한국에 드나들며 작품전시회를 펼치고 문화예술교류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상,한국의 문화공로상 등 묵직한 영예를 따내고 한국사진작가협회 명예작가대오에 가담함으로써 진정 촬영예술의 정상에 올랐다는 평판을 듣기도 했다.

        좋은 일엔 방해도 많건만

1993년에 연해도시 청도에 진출한 남룡해씨는 촬영예술가로부터 기업인으로의 탈바꿈을 실현한데 만족하지 않고 우리 민족을 위한 일들에 발벗고 나서면서 사회활동가의 이미지를 심어가고있다.

선후로 청도에 고려수정실업유한회사 등 3개의 개인기업을 설립한 남룡해씨는 산하의 기업을 잘 경영하여 청도시의 경제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함과 동시에 수십개의 한국기업이 청도에 발을 붙이고 인민페로 수십억원을 투자하도록 다리를 놓아주면서 청도의 건설과 투자환경개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청도시에 살고있는 조선족이 20만명을 웃돌고 청도에 진출한 한국인이 10만명을 초과하는 현실에서 남룡해씨는 청도시소수민족경제발전촉진회 제1분회인 조선족분회를 설립하고 제2임 회장을 력임하였으며 지금은 명예회장직을 맡고 민족을 위한 사업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있다.

좋은 일엔 방해도 많다고 소수민족사업이 전부 공백으로 되여있는 무풍지대에서 민족사업을 펼쳐가는데는 어려움이 너무나 많았다.그러나 그는 해당 일군들과 힘을 합쳐 모든 난관을 이겨나가면서 무릇 계획했던 일이라면 꼭 성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002년에 청도시에서 규모가 상당한 조선족운동회를 처음으로 조직할 때였다.조선족기업인들을 동원하여 40∼50만원의 경비를 얻어놓고 씨름경기 1등획득자에게 내줄 황소까지 준비했는데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계획했던 9월에 운동회를 진행할수 없게 되였다.안타까움을 달랠수 없게 된 남룡해씨와 해당 책임자들은 일루의 희망을 안고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편지를 띄워 자초지종을 회보하였다.편지를 읽고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주임은 그길로 의견을 발부하여 정부적인 차원에서 적극 협조할것을 청도시에 요구하였다.덕분에  운동회는 그해 11월에 성공적으로 진행되였고 지금까지 해마다 펼쳐지고있다.

2006년에 국가체육국의 비준까지 얻고 전국조선족축구대회 준비사업에 착수하게 되였는데 지방정부에서 관심해주지 않아 제시간에 행사를 추진시킬수 없었다. 이때에도 남룡해씨는 지방정부와의 교섭을 거쳐 끝내는 행사가 연기진행될수 있게끔 담보하였다. 

이밖에도 세계해외한인경제무역협회 상무리사직을 담당하면서 해마다 세계각지에 가서 회의에 참석할랴,골프협회 회장으로서 국내외 사업가들과 골프를 즐기며 친목을 도모할랴,부녀회,로인회의 사업을 협조해줄랴 팽이처럼 돌아치지만 남룡해씨는 시간을 짜내여 작품창작활동을 진행하고 촬영작품집 《지나칠수 없는 순간들》을 출간하며 작품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전공과 관련된 일들을 추진시켰다.

10여년간의 실천에서 민족사업의 차원을 한층 제고할 필요성을 감안한 남룡해씨는 2006년에 박사이상의 고급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문화인협회를 조직하여 여러가지 학술활동과 문화행사를 마련함과 동시에 차세대무육학원을 꾸리고 우리 말과 글을 잘 모르는 20∼35살 젊은이들을 상대로 무료강화교육을 실시하고있다.
최근에도 중앙인민방송국과 한국MBC방송과 손잡고 전국 12개 지역의 조선족전국노래자랑을 조직하고 청도에서 살고있는 동포들이 연변에서 방송하는 조선말텔레비죤프로를 시청할수 있도록 하고저 많은 사업을 하고있는 남룡해씨는 앞으로의 타산에 대해 일정한 규모를 갖춘 문화중심을 일떠세우는것이라고 피력하였다.

조선족들이 조직한 각 협회의 사무실은 물론 로인들을 위한 활동장소도 있고 혼례,환갑,생일 등 행사도 자급자족으로 운영하며 청소년문화교육을 통해 우리 말과 글을 보급하고 자라나는 후대들이 여기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가정을 뭇고 아들딸을 낳아키우며 민족사업을 이어받도록 하는것이 촬영예술가→기업인→사회활동가 남룡해씨의 간절한 소망이였다. 남룡해씨의 아름다운 소망이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기대해본다.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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