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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이고 항일로전사인 최명세옹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10월8일 11시02분    조회:8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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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세옹은 어떤 분?

현재 연변에 생존해있는 의용군출신의 항일로전사는 두분, 그중 한분이 올해 91세 고령인 최명세옹이다. 기자는 국경절을 계기로 연길시 하남가두 신광 33조에 거주하는 최명세옹을 찾아  그의  근황과 흘러간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다. 최옹은 현재 부인 박경자(1934년 생)녀사와  아들 내외분과 함께 1990년에 입주했다는 73평방메터되는 허름한 아빠트에서 살고계셨다.  항일로간부이고 부청급(부지구급)대우를 향수받는다는 차원으로 보면 거주조건이 너무나  검소했다.

최옹은 고령이지만 50여년전의 일을  시간과 인명, 장소까지  기억하고있을만큼 기억력이 괜찮았다. 문화대혁명때 반란파들에게  얻어맞아 청신경이 파괴되면서 청각장애가 오지 않았더면 취재에 별 어려움이 없었을것이다. 다행히 부인 박녀사의 열성적인 도움으로 취재는 순조롭게 이어갈수 있었다.

최옹은 장기간 연변주수리부문에서  수십년간 근무하다 1983년에 정년리직했다.  리직후에는 전우들의 업적을 기리여 국내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156사(전 동북인민해방군 독립6사,조선인 위주로 조직됨)의 사적을  담은  력사저서 《156사 실전록》 주필을 담당하여 1997년 3월에 출판했고, 2002년에는 조문판으로 출판했다. 그리고 2005년 9월, 《항일전쟁승리 60주년》을 맞으며  호금도총서기가 친히 발급한 기념매달을  받아안기도 했다.

항일전쟁과 국내전쟁, 조선전쟁에서 희생된 전우들을 생각하고 문화대혁때 억울하게 세상뜬 분들을 생각하면 자신이 겪은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최옹, 현재 살아있다는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면서 지금도  희생된 전우들의 이름을 적은 명부를 소중히 간직하고있다고 한다.



결혼식때 기념사진, 최명세(앞)옹과 박경자녀사, 옆사람은 경위원이다.

태항산에서 연변으로, 연변에서 장강이남으로

최명세옹은 1918년 9월,조선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출생하여 19세에 중국에 건너와 북경지역에서 항일지하조직을 만나면서 항일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밝은 세상을 만든다》는 뜻에서 이름을 명세(明世)라고 개명했다. 1945년 4월, 조직의 추천으로 태항산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태항산항일군정학교를 찾아갔다 조선의용군에 입대했다. 당시 태항산에는 조선의용군이 약 350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45년 8월, 일본군의 패배와 더불어 태항산을 포함한 화북지역의 조선의용군 3000명은  전략적인 수요로 동북으로 진군했다.

최옹소속부대는 약 두달간의 행군끝에 금주에 도착했고 금주에서 기차로 심양에 도착했다. 부대는 1지대,3지대,5지대로 편성되였는데 최옹은 동만(연변)으로 들어오는 5지대에 편입됐다. 당시 쏘련홍군이 심양 입성을 불허하는 바람에 부대는 고력툰에 행장을 풀었다고 한다. 부대는 심양에서 길림까지는 마차를 타고 오고,  교하에서 선발대 100여명은 기차를 타고  조양천으로 떠났는데 최옹은 주력부대를 따라 행군하며 조양천으로 향했다. 행군도중 돈화 마호의 조선족보안부대와 손잡고 돈화시내로 쳐들어가 보안사령부를 쳐부시는 전투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이라는 루명을 쓰고 쏘련홍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등 일화도  있었다.

5지대가 조양천에 도착할 때는 12월 하순이였다.  최옹은  행군도중  솔선수범을 보인데서  만리행군모범칭호를 수여받았다.

당시 조양천에 집결된 병력은 1300여명이였는데 정돈과 편성을 거쳐 교도대대와 15퇀,16퇀,17퇀을 설립했다.

1946년 2월부터 최옹이 소속된 15퇀은 라자구, 로흑산 토비숙청에 참가했다. 토비숙청에서 돌출한 업적을 보인데서 최옹은 후에 156사 부사장이 된 전우(조선족)동지의 소개(보증인)로 천교령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때까지만해도 의용군출신들은 팔에 의용군표지의 완장을 끼고있었는데 길동군분구가 설립되고 15퇀이 독립3퇀으로 개편되면서 완장을 모두 벗어야 했다.  최옹은 당시 완장을 벗는다는것은  조선인의 상징을 버리는것과 같아 모두들 아주 아쉬워했다고 했다. 최옹은 그후 독립3퇀(후에 동만독립사에 편입)의 민운간사, 고장, 보위구장(부영급), 교도원(영급) 등 직에 있으면서 길림지역전투, 공주령방어전, 료심전역, 평진전역 등 전투에 참가했으며  국민당군대를 쫓아 장강이남까지 밀고나갔다.
특히 길림-장춘구간 전투에서  조선인 전우들을 650여명이나 잃는 큰  아픔을 겪었다.  후에 렬사기념비는 길림교외의 화피창에 세워졌다.

부인과 박경자녀사와 결혼, 중국에서의 파란많은 생활

최명세옹과 부인 박경자녀사는 조선전쟁때에서 만나 1953년 8월에 결혼했다. 박경자녀사 역시 조선 태생이였다.당시 최옹은  신병양성을 책임진 조선인민군 5군단직속 하사관 교도대대장(련대장)이였고  박경자(당시 18세)녀사는 이 부대의 간호사였다. 정전후 이들 부부는 조선 청진시 모 기업에 배치받았다 1956년 9월 중국으로 돌아(들어)왔는데 당시 군직은  퇀급이였다.

그후 최옹은 연변주수리국 등 부문에서 근무하면서  수리전람관 건설, 지질탐사,저수지공사, 저수지이민사업 등 조직에서 맡기는 업무이면 말없이 열심히 수행해나갔다. 하여 그에게는 《무임대사》, 《예비다이아》란 별명까지 붙었다고 한다.

1969년에는 온 가족이 한족마을인  돈화현 현유공사 흥농대대에 《하방》하여 3년 반 농사일을 하며 힘든 세월을 보냈고  후에는  7년간 안도저수지 행정과장, 관리처 주임으로 있으면서  기층수리사업에 혼신을  쏟았다.

박경자녀사는 그때의 상황을 회억하면서 저수지 건설시 알게 된 이민들이 연길에 왔다가는 10여명씩 찾아와 여덟식솔이 사는  비좁은 집에 며칠씩 묵으며 먹고자고 했는데 때거리가 없고 잠자리도 마땅치 않아 늘 속을 썩이였다고 했다. 특히 일본특무요, 조선특무요 하며 쩍 하면 반란파나 《좌파》들이 집을 수색하고 남편을 투쟁하고 때릴 때면 세상이 원망스럽기만 했다고 했다. 그간 이사도 10여번이나 했다.

박경자녀사는  최옹을 따라 조선에서 중국에 들어온후  연변부유보건소에서  조산사로 장기간 활약했다. 그러나 조선국적이라는 리유로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하고있다고 했다(후에 중국국적으로 변경했음) . 지금은  정부로부터 생활보조금을  얼마쯤 받고있어 위안이 된다고 했다.

언제나 대공무사하고 검소한 로당원의 본색 변함없어

현재 최옹의 행정급으로는 140평방메터되는  집을 요구해도  되지만 한번도 조직에 이런 요구를 제출하지 않았다. 최옹은 비록 허름하기는 해도 지금 거주조건도 괜찮다며 희생된 전우들을  생각하면 살아있다는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며...파란만장의 인생이였지만 여한은 없다고  담담히 말했다. 리직후 최옹은 《156사 실전록》 출판기획과 주필을 담당했을뿐아니라 많은 사료적회억록을 남기였다. 그리고 사료로 남기라며 자신의 군공메달과 증서를  전부 연변박물관에 기증했다.

한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분투하고서도 꿋꿋한 성정때문에 일가친척들에게 좋은 직장 하나 마련해주지 않아(현재 아들은 연길 모 회사의 로동자로 근무하고  며느리는 무직업자로 있음) 제노릇도 못하는 《바보》라는 《비난》도 받았다.

최옹은 현재 담낭염 등 여러가지 질병으로 고생하고있지만 나라의 돈을 망탕 허비해서는 안된다며 고급약이나 보건품을 쓰는것을 극구 반대하고있다고 한다. 현재 사용하고있는 보청기도 10여년전에 구입한 낡은 보청기다. 부인 박경자녀사의 전문가적인 간호와 며느리의 극진한 보살핌은 최옹이 지금도 건재할수 있는 바탕이다. 최옹은  거동도  스스로 할수 있을뿐아니라 신문과 잡지 구독도 문제없다고 한다. 

후대들에게 하고싶은 말은  나라와 인민들에게 충성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인간으로 됐으면 하는것이 바람이라고 했다.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력사서,최옹의 건강장수를 기원한다.

기자: [김창희 최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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