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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송철-제2의 전성기를 꿈꾼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10월29일 10시30분    조회:1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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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중반부터 무대우에서 특유의 목소리,특유의 감정몰입으로 관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전도유망한 청년가수의 한사람으로 자랑을 떨치던  림송철가수는 21세기에 들어와서 몇년간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2006년 4월 《가요생애 20돐기념 특별음악회》를 계기로 새로운 노래인생을 선언한 그는 최근에 제2의 전성기를 맞아올 꿈을 안고 부지런히 뛰고있다.

힘들었던 동년시절

《저의 원래 이름은 박시철입니다.림씨네 집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림송철이라는 이름을 가졌구요.》

이렇게 서두를 뗀 림송철은 성인이 된후 고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터놓았다.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룡정시 로투구진의 자그마한 농촌소학교에서 교장으로 사업하던 아버지가 비판투쟁을 받고 외양간에 갇히게 되였다.부농의 딸과 결혼했다는 죄명으로 더구나 난처해진 남편을 위해서 어머니마저 집을 떠나다보니 박씨네 여섯남매는 아이들끼리 힘들게 살아가는 불쌍한 신세로 되였는데 그중에서도 막내인 시철이의 처지가 제일 가긍스러웠다.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 엄중한 영양실조에 걸린 막내가 잘못되기라도 할가봐 아버지는 면회를 온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남의 집에 양자로 보내주도록 하였다.  

마침 개산툰팔프공장에서 사업하는 림씨네가 양자를 들이려고 사처에 수소문하고있었다.아들딸 여러명을 낳았지만 홍역으로 죄다 잃고 딸 하나를 요행 살려낸 그 집에서는 남의 자식을 키워주면서 덕을 쌓지 않으면 하나 남은 딸애까지 잃게 된다는 말에 지레 겁을 먹고 같은값이면 아들을 키우려 하고있었던것이다…

5살에 림씨네 가문에 들어간 박시철은 림송철로 이름을 바꾸고 양부모님 그리고 손우 누님의 귀여움을 받으며 근심걱정을 모르고 살아가게 되였다.사과를 주어도 먹을줄 몰라 뽈처럼 차고다니면서도 자기가 남의 집에 와서 산다는것만은 알고있은 송철이는 어린 나이에도 생각이 많았고 어쩌다 꾸지람이라도 들으면 걸상밑에 기여들어가 나올념을 안했다.

소학교에 들어간후 송철이는 동학들한테 업신당할가봐 무척이나 신경을 곤두세웠다. 10살나던 해,둘째형님 박시욱이 학교에까지 찾아왔을 때였다.형님은 몇년만에 만난 동생이 반갑다고 손을 잡아끌었지만 송철이는 다리를 제대로 운신하지 못하는 형님이 있다는것이 쪽팔리는것 같아 동학들의 눈치부터 살폈다.

그날 동생을 데리고나가 얼음과자며 그림책을 사주고 사진관에 가서 사진도 찍고 콩알총도 만들어준 형님은 림씨네 집에까지 따라가 동생을 집에 데리고가게 해달라고 어른들에게 지청구를 들이댔다.그날 저녁 양부모님들은 박시욱을 앉혀놓고 어른이 없이는 어린 동생을 제대로 키울수 없다고 인내성있게 설복했다.이리하여 박시욱은 동생곁에서 하루밤을 잔후 새로 탄 작업복 한벌을 얻어가지고 귀로에 오르고말았다.

제1의 전성기를 맞이하기까지

《전문음악교육을 받은적 없는 제가 비행기를 빨리 탈수 있게 된데는 형님 박시욱의 도움이 컸습니다.》 노래로 성공을 한답시고 허둥대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림송철은 이렇게 고백한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무던히도 좋아했던 송철이는 중학교를 졸업한후 장차 가수로 될 목표를 세우고 노래공부에 집착했고 년로한 양부모님들은 그리 유족하지 못한 살림에서도 양아들을 연길에 보내여 림성호선생님한테서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그 시절 우연하게 연길2백화에서 둘째누님을 만나 형님 박시욱의 주소를 알게 된 송철이는 그후 예술학교시험을 치면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자 조양천에 있는 형님에게 편지를 띄웠고 형님은 다짜고짜 연길에 달려와 조금이라도 보태주느라 최선을 다했다. 비록 시험에 합격되지는 못했지만 송철이는 그때 친혈육의 따사로움을 진정으로 체험했다고 한다. 

1985년 송철이가 안도현문공단에 독창가수로 들어간후 음향록화사업에 몸을 담은 형님은 말없이 도와줄 구상을 무르익혔다.1987년 안도현문공단이 연변대학구락부에서 공연할 때 형님은 성가무단의 권태성지휘를 보내여 동생의 노래실력을 알아보게 하였고 장경옥,배화숙가수와 함께 《명곡련창》테프의 록음제작에 참가할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 테프의 판매량이 30만장을 초과하면서 송철이는 전집을 포함해서 록음테프 10여개를 출판,1990년에는 연변가무단으로 전근하고 1991년에 펼쳐진 제1차전국조선족성악콩클에서 통속창법 1등을 쟁취하는 영예를 안아오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화려한 전성기를 맞아오게 된 송철이는 1992년에 한국MBC의 초청으로 《토요일은 즐거워》생방송프로에 출연하고 한국의 이름난 가수들인 송대관,현철,태진아,설운도 등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영예를 지녔다.1994년에 연변가무단의 대형무극 《춘향전》에서 방창쏠로( 唱) 를 담당하고 한국방문공연에 참가한 송철이는 또 1995년 연변TV음력설야회에서 히트곡 《개구리칠형제》를 열창하여 최우수상을 따내기도 했다.

운명과의 도전

1990년대중반에 동북삼성을 주름잡으며 《아, 어머니》, 《서시장닐리리》, 《류랑아》, 《흰술쯤이야》, 《아, 별빛》 등 여러수의 노래를 불러 전도유망한 청년가수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던 림송철은 1997년 연변가무단의 대형무극 《장백정》에서 방창쏠로를 맡고 련습에 열중하던중 록음실에서 쓰러졌다. 

가슴아래가 전부 마비되여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된 그는 즉시로 연변병원에 호송되여 종합검진을 받았지만 누구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며칠후 장춘에 가서 검진을 받았지만 역시 확진을 하지 못하는지라 호르몬을 투여하는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과민이 와서 애를 먹었다.

이렇게 한달간 치료하여 좀씩 걸을수 있게 되자 림송철은 의사의 건의에 따라 적당한 운동도 하고 사우나에 드나들며 땀을 내기도 하였으며 노래방에 다니며 마음을 풀기도 했다. 그 보람으로 얼마후부터는 마음대로 걸어다닐수 있게 되고…
림송철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된 1998년의 어느날,박서성단장한테서 전화가 왔다.다짜고짜 《너 한국에 갈만하냐?》라고 물음을 제기한 박단장은 한국국립극장 창극단에 판소리연수를 갈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송철이가 꼭 적임자라서 그런다며 은근한 기대를 내비쳤다.

한국에 몇번 다녀오면서 판소리에 대해 호감을 가졌고 언제든 그걸 배워보고싶었던 림송철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수 없어 한국행을 강행할 용단을 내렸다.

한국의 창극대가 유수정선생님한테서 판소리를 배우면서 우리 민족의 음악에 대한 리해를 깊이하고 진짜 노래감각을 찾게 된 송철이는 석달간의 체류기한내에 보다 많은것들을 배우기 위해 땀을 철철 흘리며 뛰여다녔다.텔레비죤을 통해 윤충일선생님의 《각설이타령》을 듣고나서 자기의 특점에 꼭 맞는다고 생각한 송철이는 또 선생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요청, 창극단을 따라 지방공연에 참가하면서도끝내는 소원성취하고야말았다.

신기한것은 팽이처럼 돌아치는 가운데서 건강상태가 좋아져서 출국할 때보다 더욱 씩씩한 모습으로 귀국할수 있게 된것이였다.

지지리한 투병생활

귀국후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의 주내순회공연에 참가하여 《각설이타령》을 선보이던 림송철은 왕청에서 면풍(얼굴마비)에 걸려 또다시 병원신세를 지게 되였다.무더운  여름철이라 선풍기를 켜놓고 잠을 잤는데 태질을 하면서 선풍기를 넘어뜨린것이 그만 얼굴에 닿으면서 그렇게 되였던것이다.

변형된 얼굴을 관중들에게 《자랑》할수 없어 무대에 오르지 못한 송철이는 그후에도 재차 면풍을 맞았고 병세가 날로 중해지면서 다리까지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여 꼬박 1년이나 침대에 누워있었다. 육체적인 시달림과 심리적인 고통으로 안락사까지 생각했다니 그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나중에야 엄중한 영양실조로 인한 당뇨병으로 진단받고 치료를 해서 효과를 보게 되였지만 무려 30만~40만원의 거금을 치료에 쓰고 3년 남짓한 지루한 시간을 병치료에 허비해야 했다.

지지리한 투병생활을 뒤돌아보며 림송철은 가장 힘들 때 선뜻이 손을 내밀어 정신적 또는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친구들이 너무너무 고맙다고 속심을 터놓았다.형님 박시욱도 사업에서 좌절을 당해 별로 도와주지 못하는 형편에서 친구들이 사심없이 주머니를 털어 치료비를 대주었기에 늦게나마 병마의 고통에서 헤여나올수 있었다는것이다.

병세가 일정하게 차도를 보이자 림송철은 다문 한번이라도 무대에 올라 그렇게도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보는것이 제일 큰 소원이였다.그 소원을 하루속히 이루고저 그는 원기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 걷기운동도 하고 기구단련도 하면서 재활훈련에 열중했다.

제2의 전성기를 꿈꾸며

림송철은 2006년 4월 22일 연변대학구락부에서 《가요생애 20돐기념 독창음악회》를 선보이는것을 계기로 새로운 노래인생을 선언하였다. 그번에 현대음악과 판소리를 토대로, 림송철만의 특유한 기교로 우리 민요들을 불러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은 림송철은 그해 10월에 연변예술극장에서 독창음악회를 펼치였고 최근년에는 연변가무단에서 공연하는 《천년아리랑》에서는 민요련창과 독창 《감주타령》  이밖에 《풍년제》  등 무용종목에서의 방창쏠로로 장끼를 자랑하고있다.

대중가수의 한사람으로서 대중들의 환영을 받는 창법을 모색하기에 모지름을 쓰는 그는 새로운 노래를 접촉할 때면 작곡가들의 작품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정의견을 제기하면서 보다 우수한 작품으로 탈바꿈시키기에 최선을 다한다.

여러해전에 《국수타령》을 부를 때 림송철은 작곡가 김남호선생에게 여차여차하게 고치면 보다 우수한 작품으로 될수 있다는 건의를 제기한적 있다.그번에 림송철의 합리화건의를 받아들여 재미를 본 김남호선생은 지금도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면 림송철과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기를 즐긴다고 한다.덕분에 림송철 또한 《마시며 놀아보자》,《어곡전타령》 등을 성수나게 부르며 새로운 노래인생을 엮어가고…
지난 8월에 2명의 녀가수와 함께 《어곡전타령》을 불러 제4차 연변민들레생태문화예술절에서 금상을 따낸 뒤를 이어 그한테 새로운 작품을 맡기려는 작곡가들이 하나둘 늘어나고있다.최근에도 허도 작사, 김남호 작곡으로 된 《결혼축가》를 록음제작한 림송철은 연변뿐만아니라 북경, 료녕, 흑룡강, 산동 등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있는 지역에서도 활동을 펼치면서 제2의 전성기를 창조해갈 꿈을 무르익히고있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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