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저명한 조선족교육가 박규찬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11월17일 22시47분    조회:961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박규찬선생은 우수한 공산당원이며 저명한 중국조선족 교육가, 교육학가이며 연변대학 창시인의 주요한 일원이며 연변대학의 로교장이다.

1918년 7월 7일,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5남매중 셋째아들로 태여난 박규찬선생은 째지게 가난한 환경에서도 서당공부를 시작하여 항상 우수한 성적을 냈으며 대학교육과정을 마쳐 후에 교육사업에 종사하여 뛰여난 성과를 거두는데 토대를 닦았다.

1942년 2월, 룡정제1국민고등학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여 선후로 연길간도사도학교, 연변사범학교, 룡정동흥중학교, 룡정인민학원 등에서 교육사업에 열정을 쏟아부었고 1945년부터는 혁명사업에 참가, 1948년 5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48년 12월, 박규찬선생은 연변대학준비위원회에 전근되여 림민호, 김유훈 등 동지들과 함께 구체적인 준비사업에 몰입하였고 "연변대학건교방안", "연변대학 전업설치와 과정설치방안"등 주요한 문건의 초안을 작성하는 등 연변대학의 준비사업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건교초기 제반 사업이 다망했음에도 박규찬선생은 정치경제학, 경제학원리, 세계경제학설사 등 5개 과목의 교수를 담당하여 사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중국조선족 조기경제학 전문가의 한사람이다.

1949년 4월, 연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였고 1955년 박규찬선생은 부교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연변대학의 주요책임자로서 연변대학을 사회주의 신형의 대학교로 건설하는데 청춘을 이바지했다.

그는 "연변대학 학교운영강령 10조", "연변대학 12년 기획"등 교수, 과학연구, 행정관리 제반의 주요 건설기획과 제도를 작성하고 드팀없이 실행함으써 연변대학이 거족적인 발전을 이룩하는데 기여했다.

"문화대혁명"기간 엄중한 박해를 받은 박규찬선생은 "4인무리"가 타도된후 명예를 회복하고 연변대학 교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당의 11기 3차 전원회의이래의 로선, 방침, 정책을 견결히 옹호하면서 당의 교육방침을 전면적으로 관철시달하고 문화대혁명기간의 그릇된것들을 신속하게 바로잡았다. 하여 연변대학의 전면적인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80년 박규찬선생은 불행하게도 암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혁명적락관주의정신으로 병마와 완강하게 싸우면서 여생에 완수하려 했던 연변조선족교육사와 중국조선족교육사 편찬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는 국내외 해당 자료를 광범하게 찾았고 병들고 지친 로구를 간신히 지탱하면서 변강 5개 성, 자치구를 답사하고 10여개의 민족대학교를 탐방했다. 특히 암말기임에도 동북 3성의 대부분 조선족중학교를 방문하고 상세한 조사보고를 내놓았으며 연변대학사와 연변대학 대사기도 펴내였다.

박규찬선생의 10년간의 로고가 스며있는 《연변조선족교육사》와 《중국조선족교육사》가 끝내 볕을 보게 되였다. 이 두부의 저작은 중국조선족교육사연구의 공백을 메웠다.

그는 또 극심한 병마의 시달림속에서도 무려 1만 3600자에 달하는 "조선족문자체제를 건립할데 관한 몇가지 의견"이란 론문을 탈고, 이는 박규찬선생의 결사적인 분투의 결정체가 아닐수 없다.

박규찬선생은 론문을 조직에 교부한 이튿날부터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끝내 1994년 1월 28일 생을 마감하였다. 박규찬선생은 림종을 앞두고도 우리 민족의 교육사업을 잊지 않았다. 그는 학교지도일군들에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하였다.

"력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중대한 사명을 잊지 마십시오."

"자손만대에 귀중한 문화유산을 남겨주십시오."

장경률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가수꿈을 이룬 시골소녀우리 맘속의 붉은 태양 조국변강 비춰주니장백천리 해란강반 붉은기발 물결치네……20세기 60년대말부터 연변가무단의 김인숙가수가 가요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를 부르면서 이 노래가 전국에 보급되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장강남북을 넘나들며 이 노래를 불러 박...
  • 2009-08-27
  • 오늘은 온집안에 기쁨이 넘치는 날어머니를 높이 모신 환갑날이랍니다아~~~어머니 오래오래 앉으세요아들며느리 차린 큰상 어서 받으세요…언제 어디서든 익숙한 멜로디ㅡ《오래오래 앉으세요》, 세상에 고고성을 울린지 근 30년이 되여오는 이 멜로디는 우리 민족의 영원한 명곡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이 노래뿐만...
  • 2009-08-25
  • 김시룡, 남, 조선족, 길림성 룡정시 사람, 중공당원, 생전 동성용향 영웅촌 농민.지난 세기 40년대말부터 50년대초까지 있은 농촌사회주의개조에서 김시룡은 동북에서 가장 일찍 농촌사회주의호조합작조를 조직하여 선후로 27차례나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1958년 3월, 전국 18번...
  • 2009-08-24
  • 그는 작곡가이기 앞서 음악편집이였다.“맑고 푸른 하늘가에 기러기 줄지어 가면/ 잊지 못할 학창시절로 마음은 날아가네/ 선생님 품속에서 즐겁게 뛰놀던/ 넓은 운동장 밝은 교실로 돌아가본다네/ …” 듣기만 해도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가슴벅차는 노래 《추억의 노래》(석화 작사/ 황영애 노래)는 1980년...
  • 2009-08-24
  • 남, 조선족, 길림성 연길시 사람, 중공당원. 1956년 출생, 주검찰원 검찰장.30년간 정법사업에 몸을 담근 김광진은 현재까지 도합 2만 2000여건에 달하는 형사사건을 조사해냈고 광범한 경찰들을 인솔하여 악세력들을 조사하고 제거했으며 범죄분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백성들로부터 범죄자들의 천적, 인민군중들의 수호...
  • 2009-08-21
  • 남, 조선족, 길림성 왕청현사람, 중공당원. 1956년 출생, 왕청현민정국 부국장 력임.김정일이 담당하고있는 사회구급사업은 전 주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하고있으며 왕청현 민정국은 이미 도시향진 최저생활보조, 재해구급 등을 주체로, 교육, 의료, 주택, 취업, 법률원조를 보조로, 사회의연, 사회방조를 보충으로 하는 도시...
  • 2009-08-20
  • 료녕땅은 조선족작곡가 서영화선생을 낳은 고장이다. 1925년 료녕 신빈현 왕청문 강동에서 태여난 서영화선생은 1945년에 처녀작 “만세 부른 날”을 작곡했다. 그때로부터 그는 료녕땅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며 수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했다. 선생의 작곡집 《세월과 더불어 부른 희망의 노래》는 바로 그가 60여년...
  • 2009-08-19
  • 남, 조선족, 길림성 화룡현사람, 중공당원, 1937년 출생, 국가1급 작곡가, 화룡현문공단 부단장, 길림성문화국 부국장, 길림성음악가협회 부주석,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정치부 문공단 예술지도, 중국음악가협회 제4기 상무리사 력임.김봉호는 조선족 민간음악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고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 음악을 광범위...
  • 2009-08-19
  • 《공중땅크》가 중국공군 부사령원이 되기까지 중국인민해방군 전임 공군부사령 리영태중장 만나본다리영태 (李永泰) 프로필:1928년 11월4일 출생,  길림성 통화현사람. 1945년 10월에 참군, 1946년 중국공산당 가입. 1949년 10월 공군 입대, 1950년 항공학교 졸업. 1951년에 항미원조전쟁에 참가,  공군 제...
  • 2009-08-18
  • 맹번평, 그는 학술에서 탁월한 성과를 올린 연변대학의 교수, 박사생도사이다. 그는 선후로 2005년에 네덜란드 마스터리허터대학 의학원에서 면역학전업박사학위(PHD)를 흭득하고 2006년에 영국 캠브리지대학 림상신경학부에서 박사후연구를 한적 있다. 현재 연변대학 의학부 기초의학원 면역학과 병원생물학교연부 주...
  • 2009-08-18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