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미를 자랑하는 리영화
《연변뉴스》,《아리랑극장》,《토요무대》,《고향의 아침》 등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 겸 사회자 리영화 어느새 30고개에 올라서고 아들딸 오누이를 거느린 엄마로 된 그녀는 실천가운데서 사업과 자식양육과의 관계를 윤활하게 처리하는 비결을 터득해가면서 보다 성숙된 아나운서와 사회자로,자격있는 안해와 엄마로 되기에 최선을 다하고있다.
꿈많던 시절
1978년 도문에서 태여난 리영화는 어려서부터 재간이 많아서 도문시제2소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문예선전대에서 골간으로 활약했고 도문시5중에 올라간후에는 《12.9》운동기념활동 혹은 주제반회를 조직할 때면 춤노래나 자기절로 창작한 만담을 무대에 올리고 웅변,시랑송,이야기콩클이 있을 때면 상을 도거리하다싶이 하는외 문오선전위원직을 맡고 학교의 흑판보를 제손으로 척척 꾸려가기도 했다.
1994년 연변대학 사범학원 음악학부의 첫기 학생으로 음악교원양성교육을 체계적으로 받게 된 리영화는 피아노, 손풍금, 노래, 무용, 작곡 등 소학교음악교육에 관련되는 모든 학과목을 다 배웠다.
처음에 선생님들은 체격이 미끈한 리영화에게 장차 무용교원으로 사업할수 있게끔 전문양성을 받아볼것을 건의했다. 그런데 매일마다 힘든 무용훈련을 하고나면 체력이 어찌나 소모되는지 견지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그리하여 성악을 전공하기로 마음먹고 이따금 동요도 작곡해보고 노래공부에 열심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남다른 소원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나운서로 되는것이였다.
욕심은 있지만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아나운서인 설상순이나 리혜자의 방송을 즐겨듣고 이따금 모방해보는것으로 자기위안을 하던 어느날, 성화술콩클에 참가하여 수상의 영예를 따낸 영화는 갑자기 아나운서로 되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져 수업도 빼먹고 무작정 연변텔레비죤방송국으로 찾아갔다.
그날 아나운서사무실의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십시오.》라는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그 목소리의 임자가 설상순선생님이라는것을 알아맞춘 영화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문을 떼고 들어섰다.그런데 리혜자, 리국호, 김홍화, 리박, 김성주 등 아나운서들이 전부 그자리에 있을줄이야?!
쑥스러워하면서도 《아나운서로 되고싶어 왔습니다.》라고 한마디 내뱉고난 영화는 모두가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자 얼굴이 대번에 홍당무우로 되였다.이것저것 물어보며 긴장감을 풀어주던 설상순주임은 《연변일보》를 건네주며 몇구절 랑독해보도록 했다.표준발음법을 떠나 글자마다 또박똑박 읽어내려가는 영화를 두고 설상순주임은 그자리에서 틀리게 읽은 곳들을 하나하나 지적해주고나서 아직은 학생이니 우선 학업을 마치고 다시 찾아오라고 인내성있게 설복했다.
그때까지 줄곧 칭찬만 받고 자라온 영화는 그날 처음으로 창피를 당했다.그러나 아나운서의 꿈을 포기할수 없은 그는 설상순과 리혜자의 방송을 록음해서 반복적으로 듣고 모방하면서 화술기량을 키워갔다. 이리하여 그다음해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아나운서양성반 학원을 모집할 때는 끝내 예심에 통과되고야말았다.
꿈을 꽃피워가는 길
그번 아나운서양성반에서 영화는 설상순,리혜자,리국호 등 유능한 아나운서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엇이든 열심히 배웠다.나이도 제일 어리고 기초도 제일 박약한 영화가 일주일간의 학습을 거쳐 많은 제고를 가져온것을 보고 리국호아나운서는 제일처럼 기뻐하면서 학업을 완성하고 현(시)에 내려가 단련받은후 다시 올라오는것이 좋겠다고 귀띔해주었다. 그 조언을 귀담아들은 영화는 졸업림박에 장춘시의 어느 소학교에서 두번이나 데리러 왔지만 완곡하게 사절하고 결연히 룡정시텔레비죤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취직했다.
당시 룡정시는 빈곤시여서 꼬박 반년간이나 로임 한푼 내주지 못하는 상황이였다.그러나 소원대로 하고싶은 일을 하게 된 영화는 너무도 신나서 힘든줄을 모르고 뛰여다녔다.
반년이 지난후의 어느날,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아나운서부의 리국호주임이 룡정텔레비죤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와 《토요무대》에서 《행복만들기》라는 자그마한 공간을 마련하는데 리포터(사회자)를 맡아보지 않겠는가고 제의해왔다.당시 리포터란 무엇인지도 모르고 제의를 받아들인 영화는 실천가운데서 배우면서 현지사회임무를 원만하게 완성하였다. 이때로부터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현지사회형식의 프로그램들을 륙속 내놓게 되고…
《행복만들기》가 인차 취소되면서 겨우 한번 현지사회를 맡고 룡정으로 돌아간 영화는 얼마 안되여 각 현(시) 아나운서들의 장끼자랑프로에 참가하고저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왔다. 그때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문예부의 박홍성주임이 2000년도 음력설야회를 준비하면서 리영화를 사회자의 한사람으로 점찍었다.이렇게 2000년도 음력설야회를 사회하게 된 영화는 뉴스방송에 습관된탓으로 웃을줄 모르고 말이 너무 빨라서 애를 먹기는 했지만 설후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전근,소녀시절의 꿈을 실현하게 되였다.
그러나 꿈을 꽃피워가는 길은 결코 순탄치가 않았다.처음 보도부에서 실습을 하게 된 리영화는 계속해서 리혜자아나운서를 모방하는데만 신경을 도사렸다. 이것을 본 리혜자아나운서는 초보자일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모방해도 괜찮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난후에는 자기만의 특색을 갖추어야만 사업을 더욱 잘해나갈수 있다고 차근차근 일깨워주었다. 이때로부터 영화는 선배들의 장점을 부지런히 따라배우는 한편 자기만의 독특한 우세를 발굴하기에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했다.
그후 《가라오케도전경기》 등 문예프로의 사회를 주로 맡게 된 영화는 표준적인 단어를 선택하지 못해서, 옷매무시에 문제가 있거나 분장을 제대로 하지 못해 욕을 달고 살았다. 때로는 너무도 서러워서 눈물을 쏟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선배들이 누구나 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하면서 여섯번까지 울고나면 진짜 크는것이라고 다독여주었다.
아니나 다를가 욕을 적게 먹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련습하고 복장은 한꺼번에 두세벌씩 갖고가서 요구에 부합되는걸로 골라입다보니 실력이 눈에 뜨이게 늘어갔고 점차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였다.그제야 영화는 선배들의 욕이 진정 《사랑의 욕》이였다는 도리를 터득하게 되였다.
본직사업에 충실하며
지금까지 리영화는 《아리랑극장》, 《요청한마당》, 《토요무대》 등 문예프로와 《고향의 아침》의 진행, 《국내외뉴스》, 《연변뉴스》방송과 기타 특집프로의 배음을 많이 한외 2000년도부터 2008년까지 출산때문에 휴가를 맡은 1년을 제외하고는 해마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음력설야회의 사회를 맡았다.그리고 2001년의 제1차중국조선족민속박람회로부터 올해의 《올림픽성화봉송》행사,《개혁개방 30돐기념야회》까지 숱한 대형행사를 사회하였고 연변가무단의 공연이나 개인음악회들에서 종목안내를 맡고 한어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일욕심이 많아서일가 아니면 용감해서일가 리영화는 무슨 일이든 말만 떼면 선선히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중도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다.
첫애를 임신했을 때 그녀는 해산 6일전까지 《연변뉴스》를 방송했는데 원래 입던 옷들을 입을수 없어 뒤혼솔을 째고 앞으로 단추만 채운후 뚱뚱한 배를 책상으로 가렸다고 한다. 당시 한룡근국장이 임신한 몸으로 방송을 견지하는 리영화를 보고 몇개월째냐고 물었다.막달이라는 대답에 깜짝 놀란 한룡근국장은 당장에서 일을 그만두라는 엄령을 내렸고 그제야 집에서 휴식하게 된 영화는 엿새만에 아들애를 낳았다.
리영화가 두번째로 딸애를 낳은후 김춘희아나운서가 임신을 하면서 음력설야회 사회자가 모자라 골치를 앓게 된 지도부에서는 해산한지 겨우 한달 반밖에 안되는 영화를 호출해서 음력설야회가 끝난후 다시 휴식하는것을 전제로 사회를 부탁했다. 그때에도 영화는 건강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지만 흔쾌히 임무를 접수하였다. 그리고 위성채널의 방송까지 맡고 아나운서들이 휴식일도 없이 팽이처럼 돌아치는것을 보고는 설후의 휴식을 포기하고 계속 출근을 견지하였다.
그 보람으로 리영화는 길림성문예프로최고상인 두루미(丹 ) 상, 길림성TV뉴스방송 1등상 등 영예를 따내였고 그가 사회한 문예프로들가운데서도 여러 급별의 상을 받아안은 프로들이 퍼그나 된다.
며느리, 안해, 엄마
결혼후의 사업과 생활을 뒤돌아보면서 리영화는 시어머님과 남편이 든든한 뒤심이 되여주었기에 나름대로 사업에 최선을 다할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리영화네 시댁식구들은 당년에 텔레비죤을 시청하면서 리영화한테 홀딱 반해 사처로 연줄을 놓았고 마침내 소원성취했다고 한다.마음에 딱 드는 처녀를 며느리로,안해로 맞아들여서일가 시댁식구들은 리영화를 끔찍이도 사랑해주었는데 시어머님은 몇해간 함께 살면서 살림을 맡아주었고 큰애가 태여난후에는 손자를 돌보는 일을 전담했다.
영화보다 9살이나 년상인 남편은 또 안해며 애들을 어찌나 이뻐하고 아껴주는지 이란진정부 부근에 살면서도 아들애를 유치원에 보내고 데려오는 일은 물론 영화의 출퇴근까지 책임지고있다. 《국내외뉴스》의 진행을 맡게 되면 저녁 7시 30분에 마무리짓는 한어말프로를 번역일군들이 아무리 잽싸게 번역한다 해도 록음까지 마치고나면 9시가 넘어서야 귀가하게 되지만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시간맞춰 데리러 오군 한다.
주부로서의 리영화는 작식솜씨가 보통수준이 아닌 시어머님한테서 배워서 료리도 제법 만들고 살림도 잘하지만 딸애가 태여난후에는 어린애 둘이 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데다 휴식일도 없이 출근하다보니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고있다.
엄마로서의 리영화는 애들을 응석둥이로 키우지 않고 의식적으로 자립정신을 심어주기에 주의를 돌리고있다.아들애는 세살부터 절로 밥을 먹고 저녁이면 옷을 절로 벗어서 개여놓고 아침이면 양말까지 절로 신도록 훈련을 시켰는데 제대로 하지 못해도 대신해주지 않으면서 독하게 밀어붙인 결과 5살이 된 지금은 웬간한 심부름도 하면서 엄마,아빠나 외할머니에게 도움을 주고있다.
아나운서사업을 잘하려면 부단히 충전을 해야 하고 중대한 행사가 있을 때면 저녁시간을 리용하여 해설사도 암송하고 기타 자료도 뒤져보아야 한다. 하기에 리영화는 자식들을 그렇게 귀여워하면서도 한두시간 애들과 함께 있는 시늉만 하고는 《엄마는 이제부터 공부합니다. 절로 그림책을 보세요.》라고 말하며 방으로 들어간다.그것이 인젠 습관이 되여 아들애는 절로 그림책을 보다가 잠들기도 하고 혹간 녀동생이 엄마방의 문을 두드리면 《엄마 공부한다.우리 살랑살랑 놀자》라고 하며 동생을 끌고간다나?!
《한 가정의 며느리,한 남자의 안해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저는 가정에서의 역할에도 충실하고싶습니다. 그렇다고 사업에 지장을 줄수야 없지요.》이렇게 말하는 리영화는 지금까지도 그러했지만 앞으로도 사업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을 결심을 피력했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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