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金昌植-靠辣白菜闖天下的人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11월24일 23시51분    조회:1621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致富经:金昌植-靠辣白菜闖天下的人



这里是吉林省延吉市朝阳镇的东新村,东新村是延边大白菜产地之一,200885日是村民陈丽欣家从地里起白菜的日子。这一茬陈丽欣总共种了5亩地的大白菜,每亩能收2200棵左右。东新村的大白菜从来不愁卖,有一个城里人总会按市场价定期来收购。  

陈丽欣:“两天来拉一回,可以说下雨的时候,我们农民帮着拿小农用车,给拉出去,拉到道上,他们绝对不失约。”  

陈丽欣说的不失约的人是一个城里人,叫金昌植,朝鲜族,今年53岁,原本是延边朝鲜族自治州冶金工业局的公务员,1999年他辞职下海承包了当地一家辣白菜厂。如今,金昌植在延吉市依兰镇拥有一个资产超过2000万元的辣白菜生产企业,每年生产辣白菜1000吨以上。延吉市大白菜种植面积超过500公顷,金昌植每两天就要进村收购一次。  

金昌植:“每次大概拉五六吨,七八吨秋季应该是10吨到15吨。”  

金昌植收菜不找经纪人,而是直接跟几十个固定合作种植户打交道,十年下来他自己也摸出了很多挑选大白菜的门道。 

金昌植:“我们收菜一般是肉眼看,它有些虫眼,比较粗糙,凹凸不平,另外这个后边,背面都有很多的毛刺,这个刺说明它化肥使得少。”  

金昌植做了十几年辣白菜生意,然而就在两年前,他经历了人生中最大的一次转折。金昌植原本一直做出口日本的生意,积累下1000多万元的资产。但2005年以后日元汇率持续走低,金昌植的出口生意做不下去了。2006年秋天,金昌植决定把生意转向国内。原本以为做内销要比做出口容易得多,考察之后他才发现,想要在国内市场站住脚并不是件容易的事儿。 

金昌植:“一个是人家已经长起来了,我的竞争对手已经长起来了,翅膀长起来了,第二个是人家这个超市,资源已经占据的差不多,互相抢争以后,都占据了,那我再挤进去,相当的困难。”  

在金昌植做出口生意时,国内有一些经销商会主动来找他进货,他就有一搭无一搭地卖出一些产品,对经销商的态度也是不冷不热。决定转内销之后,金昌植开始翻查过去的内销记录,他发现有一个叫刘文华的沈阳经销商,连续10年都来延吉订购他的产品。  

金昌植:“现在很难找一个人,他想干这个事业,愿意干这个事业,然后人品又好,又诚信,现在很难找,尤其是经过一段的这个久经考验了,经过十年的考验了。”  

金昌植眼前顿时一亮,他想到,靠刘文华自己不用费劲就可以把沈阳市场做大。金昌植就主动找到刘文华,提出让对方只经销他一家产品。面对这样的要求,刘文华也盘算了一番。 

刘文华:“沈阳市场,现在就是对朝鲜族这个泡菜发展,发展前景特别好,现在有一些汉族人都特别喜欢朝鲜族的泡菜,一些韩国的,还有留学生,日本人,都非常喜欢。我只要把这个进超市里,卖得好,能挣到钱,这就能达到我的目的。”  

刘文华接受了金昌植的条件,不过他要求金昌植为产品参加超市促销活动提供必要的经费。双方很快就达成了协议,刘文华的进货量比过去有了明显的提高。  

金昌植:“淡季的情况下,沈阳一般是一个礼拜进一次货,那么每次也就是1万多元钱,那么旺季的时候呢,应该是它的频率也是三天进一次,那么每次也是一万多元钱到2万元钱。”  

然而,很快金昌植就发现,刘文华最多一年能卖出50万元的辣白菜,而金昌植每年有1000吨辣白菜的产量,光靠刘文华远远不够。但如果再培养其他值得信赖的经销商,至少要再等几年时间。金昌植突然意识到,靠别人不如靠自己,干脆自己来做直销,地点就定在延吉。  

对延吉人来说,辣白菜是三餐必备的最普通的一种泡菜,然而制作起来却比较费时费力,记者在采访期间就亲身体验到了制作辣白菜的复杂过程。白菜要事先用盐腌好,还要准备七八种配料来调制辣酱,之后是给腌好的白菜涂抹酱料,最后还需经过冷藏发酵辣白菜才能上餐桌,这前后至少需要一两天的时间。  

随着生活节奏的加快,很多延吉人选择直接购买成品辣白菜食用,这虽然是个商机,但金昌植也发现,这里同类产品已经多达四五十个品牌。他意识到,要想被人认可就必须保证产品质量。制作辣白菜,干辣椒是必不可少的调味品,用于制作辣白菜的干辣椒不能用水洗,手工制作时通常用干棉布逐个擦去干辣椒表皮上的灰尘。金昌植车间里的这几台机器专门用来把干辣椒吹磨干净,再逐步打磨成辣椒粉。其中第一道工序,就是用这台机器分离出辣椒籽。  

金昌植:“不要辣椒籽,那么在企业利润上讲应该是损失很大,去到25%20%25%()辣椒籽粉碎不太细,粗糙,牙碜,看着也能看出来辣椒籽。”  

金昌植坚持要做高质量的辣白菜,生产成本自然也会高,这样,他的辣白菜在延吉市场就成了价格相对较高的产品。很快,他正式成立了直销店,还在百货商场设立了产品专柜,就是要卖这当地人再熟悉不过的辣白菜。对金昌植来说,只有持续卖出大量产品才能回收投入的资金,为此,他首先关注的是自己的销售团队。跟销售行业的许多公司一样,金昌植给直销经理发放的是绩效工资,当月卖出的产品越多薪水就越高。2007年初金昌植发现,几个直销经理卖出一种口味的产品之后,就会一直销售这种产品,而不愿去推广新产品。金昌植认为,问题就出在了绩效工资上。  

金昌植:“在这个绩效工资的情况下吧,因为直销他们考虑自己的当前利益,当月的利益和当年的利益,这个新产品它也许是来年的利益,或者后年的利益,那么他就把这个舍去了。”  

除此之外,金昌植更担心的是团队中会出现恶性竞争。2007年初,金昌植提出给直销经理改发固定工资,年底时根据企业全年的总销售额和个人业绩按比例分发奖金。  

金昌植:“一般固定工资的情况下,他得考虑这个问题,我为企业卖命,我为企业干好,我开发新产品,积极推广,也是为企业创造了利润,尽力了,企业也会认这个帐的,可以提高工资。”  

然而,固定工资必然会使月收入降低,有人对此不满直接辞了职,但有些人选择了留下。吴静军是专门负责延吉直销业务的经理,他就认为拿固定工资并不吃亏。  

吴静军:“以前呢,整体的基本工资水平低吗,完了你加上奖金和现在的基本工资差也差不了多少。公司的效益好了,老板也不能亏待我们员工。”  

这样,直销经理的收入跟企业年销售额挂上了钩,大家从各卖各的变成了互相帮助。为了能提高工资,他们更关心有长远意义的产品和客户,还有意提高了服务质量,认可金昌植产品的顾客越来越多。  

徐雄杰:“我这个呢,送人,主要是送人,送我们那个,特别是黑龙江汉族朋友。”  

20075月,金昌植仅一个直销店的日销售额就达到了1.5万元,同时,直销店和产品专柜形成了互补,一年之内,他在延吉的销售额就达到了400万元。然而即便如此也还是不能完全解决年产1000吨辣白菜的销路问题,金昌植想要再寻找新的市场。 

吉林省会长春距离延吉只有300多公里,乘坐飞机中途只需要40多分钟。2008年春节后,金昌植来到长春住了半个月,天天走街串巷考察市场。  

金昌植:“这里当地人就是一个品牌意识,有钱人品牌意识比较强。”  

金昌植认为,他的产品的中高档路线正好符合长春人的品牌意识,他决定就在长春做起第二个直销市场。那么,在这里建立新团队应该用什么样的人呢?  

金昌植:“年轻人都是缺乏经验,那么训练她们需要一番工夫,比较累人的,但是反过来讲,如果你招了年纪大,或者有经验的,他的经验是不一定适合我这项工作的这个需要。”  

20084月,金昌植录用了三个大学毕业生作为骨干,正式成立了长春分公司,而他本人一周只来这里工作一天,大部分时间留在延吉。对此,许多人都认为金昌植的做法太冒险。  

林学巍是个急脾气,性格外向,善于与人沟通,金昌植就让她专门负责跑销售。林学巍首先找到长春一家新开业的大型超市,新超市希望引进更多品牌的商品来提高竞争力,林学巍抓住对方的心理,成功把产品送进了这家超市。  

康唯:“我们这一块一般都是在中高消费群体当中。长春人对鲜族产品还是比较认可的,他的辣白菜口味来说比较纯正一些,就像老百姓说话,吃饭比较顺口一些。”  

主要负责人事工作的邓宁是个内向又细心的人。看到林学巍很快就有了销售业绩,邓宁坐不住了。在金昌植长春分公司门口有一个小型夜市,这里每晚都有大排档营业,邓宁就以此提出了一个销售方案,每周选出一个傍晚,在公司门口做辣白菜现场品尝。  

顾客:“好吃!”  

负责财务工作的权可玲,性格随和,善解人意,她正好在林学巍和邓宁之间左右调和,金昌植把这三个人组合在一起,让她们各展所长,不到三个月,长春分公司的销售额就突破了20万元。  

金昌植:“年轻人是没写过字的一张白纸,那么我怎么写就是什么。性格上有一些反差,但是也有互补,比如有一个人开拓力比较强,还有一个人比较稳重,那么这两个一补之后能顶上一个年纪大的,有经验的人。”  

在工资制度方面,金昌植仍然采用了延吉的做法,实行“可提高的固定工资”。  

邓宁:“我们老板就是挺重视这样培养人才这方面的,所以说工资可能会给的比较高一点。”权可玲:“因为老总比较信任我,所以我干起来比较有劲儿。”林学巍:“我跟着他干,我有很大的我自己发展的空间,我自己的想法,都能够在我的工作中体现,所以说我觉得特别好。”  

为了在长春扩大影响力,金昌植还要开一家辣白菜专卖店,记者采访期间,他在长春最繁华的地段找到了满意的位置。  

金昌植:“你看吧,这个人气很旺,而且这里的人都手里拎着包,背着包,都买东西,而且我看到这里有很多的门市店。我想我们的品牌,要在这个长春立住脚,必须在此地选择一个门市店,然后再辐射别的超市,让它的名气上来,有形象,那么这个产品好卖,那样的话应该是一年,光长春一年纯挣150万,我想是一点问题都没有的。”  

金昌植告诉记者,2009年他还会到其它城市开拓新市场,到时候他仍然要做直销。  

20081124 15:08阿里巴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변대학사범분원 김향 교수 취재: 어린이 날 6.1절도 눈앞에 두고 있는데요. 오늘 문화현장 시간에는 어린이 동요 작곡에 심혈을 몰붓고 있는 연변대학사범분원 김향 교수님을 전화로 연결해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하 기는 기자를 김은 김향 교수님을 지칭합니다.) 기: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김: 안...
  • 2007-06-02
  • 인생이 한그루 나무라고 한다면 폭넓은 독서는 그 나무를 살찌우는 기름진 땅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다년간 청소년들의 독서흥취를 불러일으키고 옳바른 독서습관을 키워주며 건전한 독서문화창도에서 앞장서온 연변조선문독서사 사장 조권옥씨는 책을 읽는것은 인간이 능력을 키우고 인간답게 성장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하...
  • 2007-06-01
  • 동심의 꿈밭, 동심의 터밭을 가꾸어오면서 일흔고개를 바라보는 동시인 김득만씨는6.1국제아동절이 다가오자 천진란만한 아이들 동심처럼 자신의 마음도 마냥 설레이기만 하단다. 40여년간 동요동시를 써왔고 20여년간 아동문예편집사업을 해왔으며 22년간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분과 주임직을 맡아오면서 어린이와 아동문학...
  • 2007-05-31
  • 중한수교 이후 한국기업의 대거 중국진출은 조선족들에게 취직과 창업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적지 않은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에 취직하여 불과 몇년 사이에 말단직원으로부터 관리층으로 승진하였고 일부는 선진적 관리방법과 생산기술을 터득한 후 자체로 기업을 꾸려 성공하기도 했다. 한국기업의 일개 고용원으로부터 ...
  • 2007-05-31
  • 독일의 뮌헨공대에서 토목학과 디플롬 (석사와 비슷함) 과정을 밟고 있는 조선족처녀 이국화양은 중국 연변에서 출생하였으며 연변과학기술대학교(97급) 건축설계전업을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집을 그리기 좋아하였고 차츰 건축설계를 지향하게 된 이국화양은 고층건물이 별로 많지 못한 연변에 높은 층집을 건설하...
  • 2007-05-30
  • 룡정에서 50여킬로메터 떨어진 시골 삼합진, 9년일관제로 운영되고있는 농촌학교에 2006년 8월 20일부터 교육지원봉사자로 내려간 룡정중학교의 신송철교원은 일년동안 시골학교를 집으로 삼고 참답게 맡은바 공작을 잘해 학교선생님들과 학생들로부터 믿음직하고 부지런한 선생님이라고 칭찬받고있다. 지난해 8월 18일 개학...
  • 2007-05-29
  • 미국 펜주조선족동포회 박영애회장(연변중의원 원장)은 27일 루켄스파크에서 열리는 펜주 조선족동포회 창립 1주년 기념행사겸 제2회 체육대회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있다. 지난해 3월 펜주 조선족동포회가 창립돼 회장으로 취임후 지난해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던 박원장은 자신의 건물을 동포회관으로 사용할 정도로...
  • 2007-05-28
  • 수십 쌍의 새까만 눈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살쯤 돼보이는 여자애가 두손을 쳐든다. 열 손가락을 서로 움직이면서 선생님이 칠판에 써준 수학문제를 척척 풀어낸다. 세 자리 수와 네 자리 수, 네 겹으로 된 더하기와 덜기의 답을 몇 초 사이에 순식간 알아 맞춘다. 타고난 천성이고 신동일까? 아니다. 교실 안의 애들 거...
  • 2007-05-25
  • 상지시중의병원 내과주임 한정자(53세)씨는 훌륭한 의술, 고상한 의덕으로 백성들로부터 '우리 백성들의 믿음직한 의사'라고 친절히  불리우고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깃들어있다. 한정자씨는 1976년 흑룡강성위생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조선족향병원에 배치받아 2년후에 삼양향병원으로 전근되여 4년간 근무했다...
  • 2007-05-25
  • 65세의 한석윤씨는 어린이만 보면 자애로운 할아버지가 된다. 22년간 중국조선족소년보에서 기자로, 사장으로 사업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몸에 배여서이다. 그동안 아이들을 위해 그가 해놓은 일은 이루 헤아릴수 없을만큼 많고도 묵직하다. 퇴직한 지금도 그는 우리 민족 청소년사업에 정열을 쏟으며 사랑일기를 계속...
  • 2007-05-2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