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장률감독-한중경계서 찾아온 "거장"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11월25일 22시45분    조회:1165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 경계서 찾아온 ‘거장’ 장률 감독

재중동포 감독인 장률(46)의 영화 ‘중경’과 ‘이리’는 난다 긴다하는 수십억, 수백억짜리 상업영화의 틈바구니에서 결국 1만명의 관객도 얻지 못했다. 올해 한국영화산업의 각종 지표에는 어떠한 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운명이다. 하지만 과연 훗날 어떤 작품이 당대와 삶의 기록으로서, 그것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서 평가를 받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박스오피스를 장식한 쟁쟁한 이름들이 그 대답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사 속 많은 거장의 이름들이 그랬듯이 장률 감독의 영화는 이렇듯 현재 시제로는 상업적으로 불우한 작품임이 틀림없다. 그의 영화는 미래시제의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봤을 때 재미와 의미가 재발견되는 예술영화의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그가 언제 500만, 1000만 관객의 영화를 들고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이렇듯 장률은 여전히 한국영화계 주류에서 낯선 이름이고 이방인의 이름이며 타자의 이름이다. 중국 태생의 한국인으로 그는 한국영화 뿐 아니라 중국영화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중국으로 건너간 조부의 대를 이은 재중동포 3세로 조부는 일본인에게 맞아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의 영화는 기존 상업영화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독창적인 시선과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국내에서 그의 영화를 본 관객이 채 1만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영화제 경력은 그의 영화가 담은 미학적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객관적 지표가 될 것이다. 서른 아홉살에 늦깎이로 영화를 시작한 그는 생애 첫 영화인 ‘11살’로 베니스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 화려한 영화제 순례를 시작했다.

장편데뷔작 ‘당시’(2003)는 로카르노, 밴쿠버, 런던, 홍콩, 그리고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 PPP 프로젝트였던 ‘망종’(2005)은 칸영화제 감독주간에서 상영됐다. 3번째 영화 ‘경계’로는 드디어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 레드카펫을 밟았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중경’과 ‘이리’는 일종의 연작이자 장 감독의 4, 5번째 작품. 윤진서와 엄태웅이 주연한 ‘이리’는 최근 열린 로마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상영됐다.

“영화제 큰 놈들은 비슷비슷해요. 큰 백화점 같죠. 작은 영화제는 작은 가게처럼 개성있고 재미있죠. ‘돈 냄새’도 안 나고. 로마영화제에서는 ‘이리’ 상영일에 로마 역사상 가장 큰 비가 내렸어요. 교통이 중단되고 전기가 끊겨서 저도 극장에 못 갈 뻔했어요. 할리우드 스타들도 와서는 레드카펫 행사도 못했어요. 내 영화가 슬픈 영화니까 그렇게 큰 눈물이 내렸나, 하하”

최근 한국을 찾았던 장률 감독은 이창동 감독과 내기한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창동 감독이 장 감독에게 “당신은 절대로 대중영화를 못 만든다”고 하자 장 감독이 “만약 내가 500만 드는 작품을 만들면 형이라고 불러라”고 했다는 것이다. 소설가 출신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창동 감독과는 10년 이상 우정을 나눠오고 있는 사이. 한국에 올 때 가끔 이창동 감독의 집에서 묵기도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다.

장 감독은 말끝에 “내기도 젊었을 때 얘기지, 나이 들고 나면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장 감독이 영화에 발을 들여 놓은 것도 30대 호기로운 선언과 내기가 발단이었다. 소설가이자 중문학 교수(옌벤대학)였던 장 감독은 친구인 TV 드라마 감독으로부터 시나리오를 부탁받았다. 그런데 장 감독이 쓴 시나리오가 중국 당국의 검열에서 문제가 됐고, 친구는 "검열용 대본을 따로 만들고, 영화는 원안대로 촬영하자"며 설득했다. 그런데 친구는 약속과 다르게 장 감독이 다시 써 준 검열용 대본으로 영화를 찍었다. 장 감독은 크게 화를 냈고 술자리에서 홧김에 "내가 찍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 이튿날 쓰린 속을 달래면서도 취중 한 마디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내친김에 촬영한 작품이 단편 데뷔작 ‘11살’이었던 것이다.

장 감독은 실제로 만나면 여간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어가 완전히 입에 익지도 않았는데도 선문답같은 농담과 능청으로 좌중을 웃기면서도 무릎을 탁 치게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그의 말대로 “슬프다”. 비극이 전염병처럼 감염된 일상과 늘 뭔가를 해야 하고 찾아야 하는 가난한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과연 삶을 지탱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지 집요하게 물어본다. 언뜻 보면 우울하고 어두우며 무거운 영화다. 과연 희망은 어디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사람들은 외롭고 단절돼 있으며 결국은 소통에 실패한다. 힘겹게 이어지는 관계조차 지속될수록 타락하고 더럽혀진다.

“내 눈에는 세상이 우울하고 비극적인 일들로 꽉 차 있어요. 숨겨진 것들의 뚜껑을 열어보면 영화보다 더 심하죠. 감추면 결국 곪기 마련이에요. 드러내고 익숙해져야 삶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사람들 앞에서 웃는 건 어머니 말씀때문이에요. 아무리 기분이 나쁘고 우울해도 사람들을 대할 때는 웃는 얼굴로 기분좋게 대하라고 어렸을 때부터 그러셨거든요.”

‘중경’은 외국인들에게 북경어 강습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젊은 여인 쑤이(궈커위)를 중심으로 연로한 그녀의 아버지, 그녀와 부정한 관계를 맺는 경찰(허궈펑), 중국 체류 중인 중년의 한국인 남성 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급속하게 현대화된 중국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육체적인 욕망과 물질적인 이해가 충돌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파괴되고 해체돼가는 삶을 그렸다.

‘중경’과 쌍을 이루는 연작 ‘이리’는 1977년 일어나 한국사회를 흔들었던 이리역 폭발사건 30년 후의 이야기다. 사고 당시 어머니의 뱃 속에서 폭발의 진동을 받고 태어난 젊은 여인 진서(윤진서 분)와 택시기사를 하면서 그를 보살피면서 사는 친오빠 태웅(엄태웅 분)의 이야기를 그렸다. 두 남녀는 가난하고 외로운 삶들이 비극적인 일상을 영위해가는 익산의 한 아파트 주변 경로당과 중국어학원 등을 전전하면서 살아간다. 여기에는 30년전으로부터 비롯된 비극의 파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사람들은 숙명처럼 죽음의 냄새를 맡으면서 살아간다.

“‘중경’은 격정적인 중국을 상징하는 도시이자 터지기 직전의 공간이라면 ‘이리’는 폭발 이후의 폐허죠. 중경이나 이리는 뉴욕도 될 수 있고 서울도 될 수 있고, 세계 어느 곳이나 될 수 있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아파하고 상처하고 어느 시대든 아름다움은 찾아 볼 길 없습니다.”

장 감독의 영화는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지만 그 속에서 지탱되는 삶을 그려내는 예술은 존재 자체로 위안과 희망이기도 하다. “규정짓고 단언하고 가두고 잘라내는 것은 정치고 폭력이지만 잘려진 것들을 이어붙이면서 위안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장 감독은 말한다.

‘중경’과 ‘이리’에서는 파격적이고 노골적인 ‘성’(性)적 묘사와 행위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도시 속에서 황폐화된 삶과 단절된 관계,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상징한다.

“사람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밥먹고 옷입고 섹스하는 것 아닙니까. 이를 피하거나 왜곡하면 안되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담아야 합니다. 섹스는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폭력과 권력이 지배하는 관계가 되기도 하죠. 사실 인간사회의 어두운 요소들은 성에 다 담겨 있기도 합니다. 이번 작품들에서와는 다르게 전작인 ‘경계’에는 원초적이어서 아름다운 결합으로서의 성이 그려집니다.”

장률 감독은 이른바 전문배우들의 인위적인 연기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영화 취향은 다 다르지만 연기는 지금 당장은 관객의 눈을 속일 수 있지만 시대가 지나가면 가짜가 다 탄로나게 돼 있다”며 “브레송 감독은 배우들로 하여금 절대로 인위적인 표현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리’에서는 스타배우인 엄태웅과 윤진서가 주연을 맡았는데, 윤진서는 영화잡지에서 사진을 보고 캐스팅을 하게 됐다. “돈은 거의 못 준다”고 했지만 두 배우 모두 출연에 적극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영화에는 왜 희망이 없느냐”는 질문에 장 감독은 “희망을 삶에서 찾아야지 왜 영화에서 찾느냐”고 대꾸했다. 그의 영화가 담은 깊은 절망이, 깊은 절망의 응시가 희망의 근거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우문현답이다. ‘중경’과 ‘이리’는 장률이라는 경계인이자 이방인이 길어올린, 희망보다 더 희망적인 절망의 성찰이다.

헤럴드경제 이형석 기자(suk@heraldm.com)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북방의 혹한에 도전하며 엄동설한에 야외에서 알몸에 반바지만을 입고 물까지 뒤집어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얼음사나이' ,'내한기인' 김송호이다.  2월 3일 저녁 기자는 할빈시조린공원에서 관광객들의 발목을 잡는 그의 쾌거를 취재수첩에 담았다. 흑룡강성 화천현 ...
  • 2009-02-06
  • 민속악기 퉁소와 중국에서의 그 뿌리—연변문화예술연구주임 연구원 김남호씨를 만나 《퉁소는 중국조선족 민간에서 가장 널리 보급되고 사랑을 받아온 대중악기로서 백여년간 중국조선족 이주민들에 의해 중국땅에 뿌리내렸습니다.》 연변문화예술연구중심에서 연구원으로 몸담고있으면서 퉁소의 력사를 추적하고 아울...
  • 2009-02-05
  • 자연과 우주, 인생을 그린다!《마음속 깊은 깨달음이 없다면 창조란 있을수 없다!》 이것은 중국에서 가히 손꼽을수 있는 저명한 미술평론가 정헌선생님이 조선족 서양화가 문철남(文哲男)선생에게 내려준 아낌없는 찬사이다. 1962년 료녕성 심양시에서 출생한 문철남은 1987년 동북사범대학 미술계를 졸업한 후 장춘시조선...
  • 2009-02-03
  • 자연과학연구분야 정상에 조선족교수 우뚝 섰다—연변대학 리동호교수 유럽공동체연구항목 쟁취에 성공 우리 신변의 한 조선족청년교수가 자연과학 리공과연구분야에서 마침내 지방대가 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그가 바로 국가교육부 중점실험실인 연변대학 장백산생물기능인자실험실 부주임 겸 분석측정...
  • 2009-02-01
  • 화룡시희망복리원 리문철원장의 35년이 세상에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싶지 않은 아이들이 어데 있겠는가. 100여 불우한 아이들로부터 아버지, 어머니로 불리는 화룡시희망복리원 리문철원장 부부, 의지가지 없는 고아들과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에게 친부모와도 같은 사랑을 쏟아 35년! 희망복리원의 감동은 끝없는 메...
  • 2009-01-31
  • 중국에서 안중근 의사의 얼을 기릴 수 있는 것은 재중동포(조선족) 사회가 버팀목이 돼 왔기 때문이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의 서명훈(78·사진)씨가 대표적인 경우다. 하얼빈시 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인 서씨는 20년간 안 의사를 연구해 왔다.서씨는 “어릴 때 어른들에게 안 의사 ...
  • 2009-01-29
  • "중국 중앙발레단보다 UBC가 한수 위" 유니버설 발레단 예술감독 在中동포 유병헌씨“한국 국적은 아니지만 제 몸과 마음에는 한국 피가 흐르고 있잖아요. 그간 외국인이 도맡아왔던 유니버설발레단(UBC)의 예술감독 자리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제가 올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기분 좋습니다. 이는 그...
  • 2009-01-27
  • 30,40대들로부터는 《방기도》, 50대들로부터는 《주정뱅이》, 로인들로부터는 《지현장》으로 불리우는 연변연극단의 인기배우 김동현씨가 2009년 음력설야회에서 소품 《부조사계절》에 출연하며 시청자들과 재회하게 된다. 야회촬영장에서 김동현씨를 만난 필자는 2006년 내부퇴직후 모처럼 새로운 작품에 출연하게 되는...
  • 2009-01-24
  • 1971년 생인 마화텅(馬化騰)은 중국에서 열 손가락에 끼는 갑부다. 이름이 생소할 수 있지만, 마화텅은 텐센트(騰訊)의 창업자로 중국 네티즌 대다수가 사용하는 ‘QQ’라는 메신저를 만들었다. 중국 네티즌 96.7%가 사용하는 대표 메신저로 4억명 이상이 등록했다. 중국 내에서는 ‘Q친구’라는 대명사...
  • 2009-01-23
  • 무자년인 2008년은 연변대학예술학원 성악교원이며 가수인 박미화씨의 인생에 굵직굵직한 일들로 큰획을 그은 한해였다. 그는 이딸리아성악콩클에서 수상했고 또 이딸리아의 류학생활을 마무리 짓고 귀국하여 다시 연변대학예술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던것이다. 1994년 상해음악학원을 졸업한 박미화는 타지방의 월등한 ...
  • 2009-01-2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