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박선석-글농사 풍작이룬 농민작가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월9일 21시20분    조회:899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농민작가 박선석의 글농사

일전에 장편소설 《재해》로 《제2차 김학철문학상》을 수상한 박선석선생은 농촌에서 태여나 농사일로 평생을 살아온 순수한 농민이다. 그럼에도 선생은 장장 28년동안 알곡농사를 잘하는 한편 부지런히 글농사를 지어 길림성정부의 최고문예상인 《장백산문예상》을 3차나 받고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수상하였으며 길림성문화청으로부터 《길림성민간예술가》라는 영예칭호를 수여받으면서 농민작가로 이름을 날리고있다.

《말할줄 아는 벙어리》

압록강변의 집안현에서 태여난 박선석선생은 어린 시절 산골에서 살았지만 시집간 누나들이 책을 많이 보내주었고 후에는 큰 서점이 있는 매하구로 이사왔기에 문학작품을 많이 접촉할수 있었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부농으로 획분되면서 자식들까지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 시절에 박선석선생의 유일한 흥취는 독서였고 한때는 전세계를 무대로 지구인 모두가 등장하는 초대형소설을 구상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7살나던 해 고중시험에서 락방되자 박선석선생은 1년간 자습하여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응시할 꿈을 안고 낮이면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미친듯이 대학입시준비를 했다. 비록 시험자격을 얻지 못해 대학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선생은 계속 문학작품을 탐독하면서 1년도 안되는 사이에 장편소설 《새로운 향촌》을 써냈다. 소설의  제1장이 저명한 소설가 리원길선생이 꾸린 등사본문학잡지에 발표되면서 문학창작의 희망을 보아낸 선생은 시기를 놓칠세라 소설수개에 착수했다. 그런데 사회주의교육운동이 시작되면서 부농의 아들인 선생이 중점교육대상으로 지목될줄이야?! 

소설때문에 더 큰 화가 들이닥칠가봐 겁이 난 선생은 편지지 20여권이나 되는 원고를 비닐박막으로 싸서 돼지우리에 묻었는데 이튿날 돼지가 그걸 파헤치는통에 돼지우리안이 온통 원고지천지로 되였다. 다행히 어머니가 일찍 발견하고 부엌으로 가져다 이틀간 태웠기에 봉변은 면했지만 원고지를 한장 한장 태우며 가슴을 졸이던 어머니가 안스러워 더는 필을 들지 못했고 작가가 되려던 꿈을 완전히 포기하고말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부디 말조심하라는 말을 귀아프게 들어온 박선석선생은 성인이 된후 모든것을 참으며 벙어리노릇을 하느라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런데 펀펀한 사람이 벙어리로 지내기도 무척 힘들어 어느날 아무런 문제도 없는 사람을 때리며 《투쟁》하는것을 보고는 끝내 참지 못하고 옆에 앉은 친구에게 “한마을에 살면서 별문제도 아닌걸 가지고 저렇게 물고뜯을게 뭐야?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아?”라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재수없게도 한 열성분자가 그 말을 엿듣고 류소기의 《계급투쟁식멸론》이라며 떠드는통에 선생은 대번에 생산대에 잠복해있는 《류소기의 대리인》으로 몰리웠고 충분한 근거와 리유를 가지고 가정성분을 재심사해줄것을 청구했다가 토지개혁을 번안한다는 모자를 쓰고 투쟁을 받았다. 그때에야 법이 없는 세월에는 벙어리로 사는것이 제일이라는 도리를 터득하게 된 선생은 묻는 말에나 간단한 대답을 하는외에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지나가던 관상쟁이가 《말할줄 아는 벙어리》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을가?!

하고싶은 말들을 가슴속에 가득 쌓아두고서도 벙어리로 살아가야 했던 나날에 박선석선생은 “서른다섯살이 되면 시름놓고 말을 할수 있다”고 하던 관상쟁이의 예언을 100%  믿지는 않으면서도 행여나 해서 서른다섯살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우연한 일치라 할가 박선석선생이 서른두살되던해인 1976년에 《4인무리》가 꺼꾸러지고 서른다섯살을 잡던 해인 1979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에 지주, 부농의 《모자》를 벗겨주고 자녀들의 성분을 고쳐줄데 대한 당중앙과 국무원의 결정이 방송되였다. 진정 《말할줄 아는 벙어리》가 가슴을 헤치고 말할수 있는 세월이 돌아왔던것이다.
서른다섯살에 해동을 맞아 땅속에서 나온 개구리마냥 입을 열게 된 박선석선생은 말만으로는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울분을 다 토로할수 없어 다시 입을 다물고 소설이라는 문학쟝르를 리용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문학창작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재미삼아 읽어본 밑천만으로 소설을 창작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선생은 가슴속의 말을 속시원히 하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어서 시간만 있으면 필을 들고 끄적거렸다.

부지런한 감농군

1981년, 37살의 늦은 나이에 단편소설 《발자국》을 발표한후로 박선석선생은 100여편의 장, 중, 단편소설과 수필(루계 330여만자)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겨우 9년밖에 안되는 초중졸업문화수준에 늙은 어머님과 안해 그리고 네 자식을 먹여살려야 하는 농촌가정의 세대주, 농사만으로는 어림도 없어 부업을 해야 하고 시종 두세가지 직업, 최고로 네가지 직업에 종사해야 했던 선생의 형편으로 볼 때 놀라운 성과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선생이 문학창작에 다시 살손을 대기 시작해서 처음으로 창작한 작품은 지금까지 발표되여본적 없는 《목란꽃》이였다. 이 작품을 집필하면서 어찌나 감정몰입을 했는지 선생은 때로는 너무도 격분하여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때로는 지어 심장병이 발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완성하고보니 딱딱하기 그지없어 도무지 읽어내려갈수 없었다. 이러다간 건강도 잃고 제대로 되는 작품도 써보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선생은 이때로부터 무작정 격분을 토로하기보다는 가볍고 편한 마음가짐으로 풍자적인 필법을 쓰기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이렇게 창작한 문학창작품들이 한편 두편 해볕을 보면서 글재주가 늘어난 선생은 더욱 왕성한 정력으로 창작에 전념하게 되였는데 울분을 토로하고저 썼다는 《피와 운명》이나 서러움에 겨워 썼다는 《처가집》, 제만 제노라 우쭐거리는 사람이 눈꼴사나와 썼다는 《닭알》, 아첨쟁이가 가소로와 썼다는 《장닭》  등은 사회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독자들이 그 무엇인가 음미할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독특한 필법은 결국 광범한 대중 특히는 농민들의 구미에 맞는 극적인 이야기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쟝르를 모색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고 때로는 극본창작일군들에게 신선한 소재를 제공해주었다. 돈에 미쳐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추태를 그대로 보여준 단편소설 《털없는 개》가 독자들의 환영을 받고 연변연극단에서 이 작품을 각색한 경희극도 전국무대에서 소문을 놓은것이 그 실례로 된다.

박선석선생의 작품을 보면 거개가 농촌제재이며 등장하는 인물들도 거개가 농민이다. 《간절한 소원》(1982년), 《범과 사람》(1985년), 《령약비방》(1990년) 등처럼 농민밖의 기타 인물형상이 창조되고 농업밖의 제재가 취급되기도 하지만 그것들마저 절대대부분이 농촌의 말단간부나 직원들의 이야기이며 순수한 도시제재나 시민들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특히 건국이후로부터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기까지의 중국농촌사회를 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한 장편소설 《쓴웃음》과 《재해》는 중국조선족소설사에서 당당하게 자리매김을 할수 있는 력작으로서 《쓴웃음》은 《장백산》잡지에 련속 7년 반이나 련재되면서 《장백산모드모아문학상》을 수상하고 상, 중, 하 세권으로 출판되였다. 그리고 역시 《장백산》잡지에 련재된 《재해》는 《장백산모두모아문학상》을 수상한외 《제2회 김학철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박선석선생의 소설은 국내뿐만아니라 국외에서도 중시를 받고있는데 일본, 한국에서 출판되는 문학지에 선생의 작품이 소개되였고 한국 연중도서출판사에서는 소설집을 2권이나 출판해주기도 했다.  1985년에 길림성문화예술가대회에 참석한 선생은 1999년에 중국조선족작가대표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뒤를 이어 2003년에는 한국수도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민족작가대표대회에 참석하면서 국내외 문단에서 인기있는 농민작가로 이름을 날리고있다. 

농민 박선석의 참모습

박선석선생은 마음씨 착한 녀자를 만나 결혼한후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낳아 키우느라 한동안 무척 바삐 보냈지만 자식들을 다 성가시킨 지금에 와서는 마누라와 둘이서 자식들의 효성에 받들려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있다.

농민으로서의 박선석선생은 한가히 지낼줄을 모르는 사람이다. 무엇을 하든 움직여야 하고 몸이 아플수록 더구나 움직여야 한다는것을 굳게 믿고있는 선생에게서 유일한 취미라면 독서이고 그외 혼자 강가를 거닐거나 등산을 하면서 약재를 캐고 약간의 가축을 사양하는것이 전부라고 한다. 마작, 트럼프나 문구치기는 물론 노래하고 춤을 추는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선생은 사회활동에 참가하기도 싫어하고 그저 조용히 사는것을 최대의 락으로 간주하고있다.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고 물욕, 소유욕이 없는데 돈에 대한 욕심도 크게 없어서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지만 돈을 한푼이라도 더 벌어서 어느 누구를 초과하는 부자로 되겠다고 승벽을 부려본적도 없다고 한다. 하기에 시장경제시대에 들어선후 돈을 벌려고 외국으로, 대도시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지금까지도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글농사에만 정성을 쏟으면서 너나없이 컴퓨터로 일하는 지금도 달랑 책상 하나 앞에 놓고 열심히 손으로 글을 쓰고있다.

박선석선생에게서 알아봐주어야 할것은 술을 너무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는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심장질환때문에 《술고래》처럼 많이 마시지는 못하지만 술과 친구만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을 정도로 애주가라고 하니…

연변작가협회 회원, 길림성작가협회 회원 겸 초빙작가,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있는 선생은 최근에 와서 자기가 태여나고 어린시절을 보낸 압록강반을 무대로 토지개혁을 다룬 장편소설 《한》을 집필하고있다. 장편소설 《한》이 하루빨리 독자들과 대면하고 《쓴웃음》이나 《재해》에 짝지지 않는 성과를 따낼것을 미리 축복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 기자


박선석문학홈
http://renwu.zoglo.net/piaoshanshi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성우 소품 연기 다양한 쟝르를 넘나드는 중견배우 박정복연변방송예술단의 성우 박정복씨는 일전 25회 라지오드라마 “아리랑인생”의 출연을 방금 끝냈다. 우리 민족의 4대에 걸친 가족사를 다룬 청중들의 기대작 “아리랑인생”에서 박정복씨는 어머니 금희역과 해설을 맡았다. “어린시절 그토...
  • 2008-12-18
  • 제2대 연극인 리동범국가1급배우인 리동범선생은 개혁개방후 장막연극 《장백의 아들》이 다시 관객들과 대면할 때 허동활선생의 뒤를 이어 주인공 박철역을 맡으면서 중국조선족 제2대 연극인의 상징으로 각광을 받았고 그후 한시기 《리동범시대》로 연극계를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연극인이다.전업지식도 체계적으로 배...
  • 2008-12-16
  • 20세기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인물 정판룡교수가 수많은 사람들의 비통과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세상을 떠난지 7년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정판룡교수의 위대한 업적과 고매한 인격적매력 그리고 연변대학에 대한 절절한 사랑은 연대인들의 마음에 비석처럼 아로새겨져있다. 정판룡교수는 1931년 10월 2일 한국 전라남도 ...
  • 2008-12-16
  • 감미로운 행복 빚어가는 “꿀벌마을”-연길시고려농민꿀벌전업합작사를 찾아서봉왕장채취를 지도하고있는 김한덕선생(왼쪽)연길에서 차를 타고 오도저수지 방향으로 30분 푼히 달리면 길섶에 세워진 “로동촌”이라는 패말을 보게 된다. 바로 거기서 왼쪽으로 꺽어들어 개울처럼 물이 준 조양하의 로동...
  • 2008-12-14
  • 1 취재대상에 대한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문화부에 배당된 시골현장에만 내려가다가 이번에는 대상을 바꾸어 문학계로 눈길을 돌렸다. 연변문학 30년의 성과보고에서도 언급하다싶이 문학계는 개혁개방 30년 동안 그야말로 풍성한 성과를 안아왔고 그만치  성과를 따낸 문학인을 찾기도  쉬운 일이였다. 김학송시...
  • 2008-12-13
  • 노력파인기가수 한선녀국가1급배우인 녀고음독창가수 한선녀가 최근년래 연변가무단에서 기둥가수의 하나로 활약하는외 한국, 로씨야 등 나라에 가서 초청공연에 참가하면서 성숙된 가수의 이미지를 널리 자랑하고있다.    뒤늦게 시작한 노래공부왕청태생인 한선녀는 왕청림업국 자녀중학교(초중)에 다닐 때부터...
  • 2008-12-10
  • 뜨거운 민족애로 불꽃같은 서른여섯해 생 마감 (서울=연합뉴스) "당신은 그 누구보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고 치열한 기자정신을 보여준 사람으로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겁니다."지난 2일 중국 옌지(延吉) 출장 취재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한 고(故) 조계창(趙啓彰.36) 연합뉴스 선양((瀋陽) 특파원의 ...
  • 2008-12-06
  • -연길천재바둑도장 김광재 원장두뇌스포츠계의 왕자로 불리고 있는 바둑, 바로 그 바둑을 연변어린이들에게 보급하고 있는 한국인이 있어 화제다. 다름아닌 올해까지 3년간 쭉 《연길천재바둑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인 김광재씨. 지난 2005년 조선족 바둑인재를 발굴, 양성하고 또 조선족 어린이들의 과외생활을 풍부히...
  • 2008-12-05
  • [북경=조글로미디어]박연경 기자= 조선족 남용씨(46)가 중국축구계의 사령탑을 잡게 된다. 신화넷 스포츠판이 전한데 의하면 12월 2일, 중국 국가체육총국 당조는 남용을 축구운동관리센터 주임으로 내정했으며 정식 대외공보는 다음주에 할 예정이라고 한다. 체육총국은 또 장길룡(56)을 축구관리센터...
  • 2008-12-03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