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남호-"퉁소가 중국에 뿌리내리기까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2월5일 11시03분    조회:877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민속악기 퉁소와 중국에서의 그 뿌리
—연변문화예술연구주임 연구원 김남호씨를 만나

《퉁소는 중국조선족 민간에서 가장 널리 보급되고 사랑을 받아온 대중악기로서 백여년간 중국조선족 이주민들에 의해 중국땅에 뿌리내렸습니다.》

연변문화예술연구중심에서 연구원으로 몸담고있으면서 퉁소의 력사를 추적하고 아울러 직접 퉁소애호자구락부 등을 꾸려온 김남호씨는 19세기말부터 조선반도의 함경도와 경상도지방의 이주민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와 연변지방이나 동북3성에 정착하면서부터 퉁소놀이활동이 벌어졌다고 했다. 

연변에서의 퉁소의 전파에 대해 김남호씨는 이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연변의 퉁소연주가 김창룡(제1대, 90세)의 구술에 의하면 그의 선배 김창순(1870년-1954년)은 1946년 연길 공원촌에서 퉁소애호자들과 함께 퉁소연주활동을 벌렸다. 1947년 8월 15일, 연길시인민문화관이 설립되고 1951년 문화관의 령도하에 김천석을 조직자로 한 연길시민간예인조가 설립되였다.  그전까지는 자발적인 활동이였으나 그 뒤로는 조직적인 활동으로 되였다.김창순로인은 많은 퉁소를 제작하여 초학자들에게 퉁소연주법과 함께 퉁소곡을 배워주었다. 그 시기 민간예인조 성원에 18명이 있었는데 모두 김창순을 따라 퉁소를 불었다. 곡은 《긴영산》, 《꼭디영산》, 《령산도도리》, 《시나위》, 《라질가》, 《성주풀이》, 《새타령》, 《신방곡》, 《아스랑가》, 《애원성》, 《검무곡》, 《산념불》 등 민가방주곡까지 수십수에 달했다. 김창순의 퉁소연주는 힘차고 우렁찼는데 연변지방의 독특한 풍격을 나타냈다.

1920년대 군체를 이룬 왕청현 연통라자농악대의 퉁소놀이, 1930년대 훈춘 밀강촌의 퉁소놀이, 광복전 연길현 평안구 류신평의 황룡준이 주도한 퉁소놀이, 연길현 팔도구 농악대의 퉁소놀이, 1934년부터 활동을 개시한 안도현 장흥향 신촌의 농악대 퉁소놀이, 광복후 료녕성 단동시조선족문화관에서 조직한 퉁소놀이 등을 보아 중국조선족 특히는 연변지방에 퉁소의 뿌리가 깊다는것을 알수 있다.

건국후 1951년, 연변가무단의 이름난 퉁소수 백문순은 연길현 조양천 삼봉동의 민간예인 전복록을 찾아가 퉁소연주뿐만아니라 퉁소제작법도 배웠다. 이외에도 1953년 8월에 있은 연변조선족자치주과외무대콩클에서 우수상을 탄 화룡현 투도향 북산촌 맹경춘을 위수로 한 10명의 퉁소놀이팀, 1953년 전 주 제1차 민간예술회보공연에서 우수표현상을 수상한 조양천의 윤룡운 등 8명의 퉁소합주, 통소를 너무나도 잘 불어 북경에서 공연까지 한 리홍래 등 3명의 퉁소민간예인도 있다. 이들은 1955년 당시 주당위 선전부 부장이던 최채를 단장으로 한 전국소수민족참관단에 뽑혀 5.1절경축대회때 북경 천안문의 관례대에도 올랐고 북경 회인당에서 모택동주석 등 중앙령도동지들을 모시고 조선족의 퉁소가락을 성수나게 연주해 회인당안이 떠나갈듯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재청으로 한곡 더 연주하기까지 했다.

리홍래는 전라남도 장도에서 부친의 가르침으로 퉁소와 전통판소리의 여러 마당을 부를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고된 개척로동속에서도 그는고향에서 소중하게 품고 온 퉁소만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광복후 리홍래는 마을 청장년들을 이끌고 북도 만들고 퉁소도 제작하여 농악놀이대를 조직했다. 국내해방전쟁시기 이 농악놀이대는 기실 당과 정부의 《생산을 발전시켜 후방을 공고히 하고 전선을 지원하라》는 정신을 선전하는 문예선전대역할을 하였다. 그들은장백산아래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은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한해 겨울 30여회의 민속놀이마당을 펼쳤다. 1953년 전 주 민간예술회보공연에 초청된 안도현 연경향퉁소민속놀이는 대뜸 최고상을 수상했다. 그리하여 1955년 5.1절을 맞아 리홍래와 그의 동료들은 퉁소를 가지고 북경으로 향했던것이다.

1957년, 연변예술학교가 설립되고 민족기악학과가 서면서부터 학교에서는 민간예인 리임룡을 퉁소교원으로 모시고 후계자 한원철을 양성하여 퉁소음악보급과 제고에 큰 기여를 하였다.

김광순은 밀강퉁소 제2대에 속하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11살때 50여세의 장년사나이 한시권이 강 건너 조선 함경북도에서 두만강을 건너와 밀강마을에 정착하였는데 그때 한시권은 남달리 보짐속에 구멍 뚫린 참대통(대퉁소를 말함) 하나에 북 하나를 넣어가지고 온것을 직접 보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밀강의 퉁소는 지금으로부터 그 뿌리가 근 70년이 된다.  밀강마을에서는 그를 한퉁소라고 불렀다. 한퉁소는 한풍기라는 로인을 북잡이로 모시고 이웃마을의 퉁소수 강재권씨와 함께 퉁소놀이를 자주 하였는데 동네방네의 생일, 결혼, 회갑잔치에 바가지장단, 북장단 그리고 퉁소소리가 어우러져 온 마을이 들썽하게 춤판으로 변하군 했다.

김광순은 그때 한시권의 퉁소를 빌어 열심히 배웠는데 그는 밀강의 제2대 퉁소수로 되였고 후대양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50년대초, 김광순은 물고기를 잡아서 판 돈을 한푼두푼 모아 연길시민족악기공장에 가서  9.80원을 주고 퉁소 한대를 샀다. 김광순이가 퉁소를 갖추는바람에 마을의 친구들도 겨끔내기로 퉁소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며칠사이에 마을에는 퉁소가 20여대나 늘었고 퉁소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다.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고 개혁개방의 물결이 대중문화생활에도 일었다. 날따라 높아가는 밀강의 퉁소소리는 마침내 정부와 해당 부문의 중시를 불러일으켜 2007년 밀강퉁소는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여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였다.

1998년에는 연길시민간예인조의 명맥과 뿌리를 이어받아 김남호가 주임을 맡고 김래억이 대장을 맡은 연길시퉁소애호자구락부가 세워졌고 2002년에는 연길시 북산가두판사처에서 《경제발전과 더부어 민족의 특색문화를 발전시키자》는 연길시당위의 지시에 따라 연길시퉁소애호자구락부의 성원들이 주축을 이루어 40여명의 퉁소연주대를 조직하여 활동을 견지하였는데 2008년 연길시의 퉁소도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였다.

김남호씨는 우리 민족의 전통민속악기인 퉁소가 오늘까지 발전해온것은 당과 정부 그리고 해당 부문의 지지와 중시가 있었기때문이라고 하면서 연변에서 작년까지 3차의 퉁소예술절을 개최해 민족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큰 힘을 보탰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퉁소문화의 발전과 동원된 연주가의 폭이 고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퉁소놀이를 한층 더 높은 차원에로 발전시켜 인민대중들의 문화생활을 더욱 다채롭고도 풍부하게 하는 한편 퉁소를 우리 주의 관광문화상품으로 개발하고 발전시켰으면 더욱 큰 효과를 볼수 있을것이라고 일가견을 폈다.     

글/사진 연변일보 김인선 윤현균 기자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심양시영결쿠크도구경영판매부 전복녀경리의 창업이야기 1990년대초기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나가기 위해 갈팡질팡할 때 심양시 황고구 명렴지역의 전복녀(56)씨는 남편과 함께 15평방메터의 영결쿠크도구생산공장을 꾸리고 부지런히 기업을 키워 지금은 여러개의 경영판매부를 가진 경리로 활약하고있다. 영결쿠크도구공장...
  • 2008-04-08
  • 두 발과 오른손까지 잃은 1급장애인 조화녀의 창업담 왕청현 시가지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고있는 조화녀성은 두 발과 오른손을 잃고 왼손밖에 없는 1급장애자이다. 하지만 그녀는 생활에 대한 더없는 열애와 용기, 완강한 의지력과 끈질긴 노력으로 장애자라는 담벽을 뛰여넘고 대학공부까지 마쳤으며 또한 간거한 창업을 ...
  • 2008-04-03
  • 2008년 북경올림픽 성화환영식 및 성화봉송가동식에 이어 우리 나라 31개 성 자치구, 직할시의 113개 도시가 성화봉송행사로 들끓고있는 가운데 연길시지체장애인 협회 회장 정영철﹙49살﹚씨도 우리 주 성화봉송행렬에 참가할 영광스러운 사명을 짊어지게 됐다.어려서 소아마비후유증으로 지체장애자가 된 정...
  • 2008-04-03
  • 룡정시 덕신향 숭민촌 제6촌민소조의 리산옥(48세)녀성은 1998년에 남편과 함께  향공급판매합작사에서 정리실업당하였다. 밭 한뙈기 없이 도시에서 공부하는 딸애와 중학교를 다니는 아들애의 공부 뒤바라지한다는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준엄한 시련이 아닐수 없었다.  손에 쥔 돈도 없는 그녀는 한동...
  • 2008-03-31
  • 【서울=뉴시스】 " 어렸을 적 꿈은 병아리 감별사, 바퀴벌레가 무섭다... " 지난 2월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를 마친 후 '인민 루니', '인간 불도저' 등의 별명으로 한국 축구계를 들썩이게 했던 정대세(24,가와사키 프론탈레)가 솔직담백한 자신의 일상을 공개했다. 정대세의 소속팀인 일본 J-리그 가와사키 프론...
  • 2008-03-29
  •    훈춘시 화원세통경제무역유한회사 총경리 고련숙은 우리 주 대 로씨야무역분야에 녀 강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2003년, 고련숙녀성은 다니던 무역회사가 불경기에 처해 정리실업 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남들이 현실을 비관할 때 고련숙녀성은 직접 무역회사를 차려보려고 마음을 먹고 대...
  • 2008-03-28
  • ——— 아성직업교육중심 차미자부교장 사업실적 할빈시 아성직업교육중심에는 '벽돌공장'교정을 '화원식'교정으로, 학생을 '못생긴 오리에서 '고니'로 변신하게한 공신이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아성직업교육중심(한족학교) 200여명 교원 가운데 '우뚝' 선 조선족 부교장 차미자씨(46세) 이다. 그가 학교건...
  • 2008-03-25
  • "형님, 제 스윙 좀 봐주십시요"사상 처음 한국프로골프 코리안투어와 중국프로골프 오메가차이나투어가 공동으로 치르는 KEB인비테이셔널골프대회 2라운드가 열리고 있는 21일 중국 상하이 실포트골프장 연습장에서 투박한 북쪽 사투리를 쓰는 한 청년이 눈에 띄였다.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나 자란 조선족 청년 최...
  • 2008-03-23
  • “중국에 사는 소수민족으로서 우리 민족은 중국어도 잘해야 하지만 조선어도 잘 지켜나가야 한다.” 일전 기자는 200명의 방대한 “량회”문건 번역팀을 주야 진두지휘하고있는 중국민족어문번역국(아래 번역국으로 략칭) 오수자국장(57세)을 인터뷰하였다. 1975년 중앙민족대학(전 중앙민족학원)을 졸...
  • 2008-03-21
  • 강철원씨(21)는 중국 조선족이다. 2001년에 귀화한 뒤 국내에서 대전에서 공업고를 졸업한 뒤 올 9월에 중국 10대 명문대 중 하나인 하얼빈공대에 입학할 예정이다. 강철씨(20)는 중학교때 컴퓨터 게임에 빠져 공부와 담을 쌓았지만 뒤늦게 정신 차려(?) 세계 최고의 요리사를 꿈꾼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전문계고에서 ...
  • 2008-03-2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