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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녀-연변TV 소년아동방송의 개척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2월7일 15시27분    조회:9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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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TV 소년아동방송의 개척자 김선녀

장장 35년간 방송인으로 살아오면서 많은 시간을 연변텔레비죤방송 소년아동프로그램의 발전에 바쳐온 녀성이 있으니 그가 바로 다년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주임으로 사업해온 김선녀선생이다.

연변TV의 첫 녀성기자로 되기까지
화룡현 이도구의 토봉산기슭에 자리잡은 가난한 세호동네에서 태여난 김선녀는 소학교, 중학교시절에 열심히 글을 쓰고 독서를 하는 모범생이였다. 생각같아서는 장차 대학에 가서 마음껏 공부하고싶었지만 형제가 많고 가난한 살림에 욕심을 부릴수 없게 된 그는 고중진학을 포기하고 중등전문학교인 사범학교를 선택하였다.

랑독이나 연극이라면 언제나 1등을 독차지하며 천부적인 재질을 과시하는 한편 학교문예대의 중견으로 활약하던 사범학교시절에 그는 문예대를 이끌고 농촌하향공연을 수차나 펼치며 뛰여난 조직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때로부터 그는 앞으로 유명한 기자나 연출가가 되여볼 꿈을 고이 키웠다. 그런데 그 꿈이 너무 일찍 찬서리를 맞게 될줄이야?!

사범학교를 졸업한후 5년간 화룡현방송소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무거운 록음기를 머리에 이고 농촌에 내려가 현지취재를 하면서 열심히 문예프로를 만들어 방송함으로써 청취자들에게 보다 생신한 정신식량을 공급해주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이러한것들은 모두 자산계급의 개인명예주의로 치부되여 말밥에 올랐고 연변인민방송국에 전근되여온지 거의 1년이 되는 1966년 8월에는 연길에까지 찾아와 대자보를 써붙이는 사람이 있었다.이로 하여 억울하게 방송사업정지처분을 받았다가 몇달후에 시정을 받기는 했지만 얼마후 또 “외국특무”라는 딱지를 달고 곤욕을 치르게 된 그는 1969년 12월에 농촌으로 쫓겨가야 하는 신세로 되고말았다.           

당시 급성페결핵과 급성림파결핵으로 앓고있는데다 1살밖에 안되는 딸애까지 혼자손으로 키워야 하는 그는 엄동설한에 어린애를 등에 업고 화룡현 서성촌에 이사를 가는수밖에 없었다. 두달후 병이 더 중해지자 남편이 사업하고있는 신강 석하자생산건설병퇀으로 자리를 옮기고…

당시 “하방간부, 로동개조대상”이라는 소개신을 가지고 신강에 도착한 그는 장장 9년간 아침일찍부터 저녁늦게까지 인분을 꺼서 나르고 땅을 뚜져서 남새를 심는 등 육체로동을 하면서 고생하다가 1978년 9월에야 오매에도 그리던 방송국으로 복귀하였다.

이렇게40고개에 올라서서야 마음놓고 방송사업에 종사할수 있는 권리를 되찾게 된 그는 연출조의 성우, 광고과의 기자, 편집으로 사업하는 한편 연변대학 통신학부에 입학하여 늦깎이공부까지 하면서 피곤을 모르고 뛰여다녔다. 그 보람으로 그는 1981년에 입당을 쟁취하고 그해 11월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전근하여 연변텔레비죤방송사상 첫 녀성TV기자로 되였다.

소년아동프로그램을 개설하던 나날
녀자나이 마흔에 꿈을 향해 도전한다는것은 어느 정도 무리였다. 그러나 김선녀선생은 능력만 있으면 마음대로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낼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았다. 헌데 고정프로그램이라야 “연변뉴스” 한가지뿐이고 촬영기 3대에 기자, 편집이 고작 10여명밖에 안되는 실정에서 도대체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면 시청자들이 즐겨볼수 있을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사색을 거듭하던 그녀는 당시 방송사업을 주관하고있던 남상렬국장을 찾아가 소년아동프로그램을 만들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미구에 지도부의 비준을 얻은 그는 발에 불티나게 뛰여다니며 사업을 추진시킴으로써 1982년 “6?절”전야에 마침내 첫 소년아동프로그램 “연길시중앙소학교 연띄우기경기”를 방송하였다. 연변TV의 소년아동프로그램 “꽃봉오리”는 이렇게 김선녀선생의 손에서 고고성을 울리게 되였다.

그러나 하루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르고 시작한 일은 생각처럼 풀리지 않을 때가 많았다. 연출을 맡은 그녀가 종합예술인 텔레비죤프로그램에 대한 료해가 부족하고 경험이 없은건 물론 제작상황이 렬악하다보니 “돌발사고”때문에 비지땀을 흘리기가 일쑤였다. 겨우 촬영사 1명과 함께 설비를 빌려가지고 야외촬영을 나갔다가 큰비를 만나거나 멀쩡하던 촬영기와 록음기가 고장나서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기획의도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려고 촬영사나 제작일군들을 닥달하기도 했다. 때로는 쓸데없는 고집도 부리고  “잔소리”도 무던히 하면서… 

제작경비 또한 판부족이라 자체로 후원금을 얻어들여야 프로다운 프로를 만들어낼수 있었다. 그래서 선녀선생은 필요한 경비를 후원받기 위해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녔고 어렵게 구한 후원금을 한푼이라도 절약하고저 촬영사들과 량해를 구하면서 무거운 설비들을 이고지고 촬영지까지 도보로 다녀오군 했다. 그런데 맹랑한것은 고생을 밥먹듯하면서 만들어놓은 프로그램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것이였다.

텔레비죤방송의 조선말소년아동프로는 “꽃봉오리” 하나뿐이라 경험을 교류할 상대도, 가까이에서 조언을 받을 사람도 없는 형편이였다. 이에 선녀선생은 출근외의 모든 시간을 텔레비죤수상기앞에서 보내면서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소년아동프로를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눈으로나마 터득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했다. 

당시 선녀선생네 집에는 텔레비죤수상기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마다 렴치불구 옆집에 가서 보군 했는데 간혹 옆집에 사람이 없으면 단위에 달려와 발사실 문옆에 붙어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해마다 양력설, 음력설이 돌아오면 명절준비를 미리 해놓은 다음 개산툰, 훈춘, 천보산 등지의 텔레비죤중계소에 가서 조선과 원 쏘련(로씨야)의 어린이프로그램을 시청하군 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꼬박 5년간 국내외의 우수한 프로그램들을 열심히 시청하면서 시야를 넓히고 텔레비죤프로그램의 현대성과 과학성, 예술성에 대해 어느 정도 터득하게 된 그는 마침내 한부의 완정한 텔레비죤작품은 설비와 경비가 기본적으로 보장된 전제하에서 촬영, 록음, 아나운서, 기획자, 담당편집 등 여러사람이 동심일체로 만들어내야만 시청자들의 환영을 받는 비교적 훌륭한 프로그램으로 될수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자신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반성하게 된 그는 이따금 촬영사들의 합리화건의를 받아들이는 한편 소학교나 유치원에 내려가 어린이들의 취미와 호기심, 동심세계의 색갈 등에 대해 직접 료해하고 그들의 심미에 알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기에 최선을 다했다.

부단한 탐구와 실천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꽃봉오리”프로그램은 방송을 할수록 많은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면서 진정 연변의 조선족어린이들이 즐겨보는 인기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고 길림TV와 중앙TV에서 가장 많이 방송된 프로그램으로 되였으며 국가급상도 제일 많이 받아안았다. 따라서 김선녀선생은 1986년 10월에 전국 제2차청소년TV사업일군회의에 참석하여 경험을 교류하고 만리장성에서 전국의 시청자들을 상대로 꿈과 희망을 고백할수 있는 영광을 누리였다.

활동공간을 부단히 넓혀가며
1987년초, 연변텔레비죤방송국지도부에서는 중점프로그램인 “꽃봉오리”프로그램에 김선녀선생외에도 2명의 편집을 증가하고 아동부를 새로 증설하며 “연변꽃봉오리예술단”을 설립하는 등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도문철도실험소학교의 음악교원 최학주 등을 받아들여 대오를 충실히 한 김선녀선생은 젊은 기자들을 친동생처럼, 친자식처럼 사랑해줌과 동시에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배워주면서 하루빨리 독립적으로 사업을 펼쳐나갈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후 사업의 수요로 대오가 늘어났지만 김선녀선생과 같은 로장들을 선두로 하고 재능있고 창의력있는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한 연변TV 아동프로그램제작진은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내여 중앙과 성으로부터 긍정을 받았다. 김선녀선생이 소년아동부 주임직을 맡은 10여년간 “꽃봉오리”프로에서 성과 중앙 TV에 방송된 작품은 무려 70여부, 그중 30여부가 성급, 국가급상을 수여받았는데 문예특집 “장백의 진달래” 등은 전국“금동상”을, 소품 “아침전투”는 국가문화부에서 주최한 전국소년아동연극소품콩클 1등상을 수상해서 북경에 초청되는 영예를 안아왔다. 그리고 소년영웅 주승길의 사적을 예술화한 중학생TV영화 “별찌”는 방송되자마자 사회각계에서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성과 중앙 TV에서 방송되였으며 동북3성 TV극 “금호상”(2등상)을 수여받았다. 이밖에 특집보도 “중학생들의 본보기 주승길”은 길림성우수사회교육프로 1등상을 수상하였다.

연변어린이들의 예술재능을 한차원 높여주고 많은 아동예술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선녀선생은 1983년부터 해마다 음력설과 “6?”절에 “꽃봉오리문예야회”를 기획제작하여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녀가 연출을 맡은 자치주창립 40돐경축문예야회 “고향의 진달래”는 1993년에 북경국제소년아동TV문예프로평의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1993년의 “음력설맞이꽃봉오리문예야회”, 1994년 국경45돐헌례작품 “아, 백두산” 등은 중앙TV에 방송됨과 아울어 길림성 “두루미상” 1등으로 평의되여 외국에까지 방송되였다.

연변에서만 소재를 찾던 “꽃봉오리”프로그램을 동북3성 나아가 전국에 있는 우리 민족어린이들에게까지 넓힐수는 없을가? 오래동안 머리를 짜던 선녀선생은 1987년 9월에 전국조선족소년아동예술축제를 발기,중앙문화부, 라지오텔레비죤방송부, 국가교육위원회, 민족사무위원회 등 4개 부문의 비준을 얻고 선후로 4차나 행사를 조직함으로써 전국각지에 널려살고있는 조선족어린이들과 예능교원들이 예술적재질을 자랑할수 있는 활무대를 창조해주었다.

성숙된 방송인의 자세
장장 15년간 텔레비죤아동프로에 몸바쳐온 김선녀선생은 출중한 사업성과로 “주3?홍기수”, 성우수보도일군, 중앙라지오텔레비죤계통의 선진사업일군으로 표창을 받았다.따라서 사업터를 떠난지 10여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푸술하다. 

TV영화 “별찌”를 찍을 때 눈물을 흘리는 대목의 연기를 힘들어하는 어린 배우를 껴안고 직접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이면서 감정을 계발시켜주던 김선녀선생, 부인병으로 인한 하혈때문에 고생하면서도 꼬박 20여일이나 꼭두새벽에 일어나 어린 배우들이 벗어놓은 흙범벅이 된 신발이며 옷을 깨끗이 씻어 말리우던 그녀를 당시의 어린 배우들과 제작진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있다.

“꽃봉오리예술단”에는 외지에서 온 애들도 있었는데 촬영이 있을 때면 선녀선생은 그애들을 늘 자기 집에 데려다 재우고 먹이군 했다. 하기에 오래만에 장만한 새집에 첫 손님으로 들어온것도 아이들이요, 이불장에 얹어두고있던 새이불을 덮은 첫 손님도 아이들이고 설명절이면 그가 집에 청해오는 손님 역시 아이들이였다.

예술단의 아이들을 데리고 출국했을 때도 아픈 아이는 의례 그가 품에 안고 잤고 간혹 밤에 무섭다고 잠들지 못하는 아이가 있으면 자기 침대에 데려다 꼭 껴안고 그애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은 마루바닥에 내려가 자군 했다. 그래서 꼬마배우들은 김선녀선생을 인자한 “할머니”로 생각하면서 응석을 부리고 학부형들은 여느집 학부형이나 “보모”인줄로 착각하기도 했다. 

소년아동프로그램제작에 종사한 10여년간 김선녀선생은 고무풍선 하나, 꽃 한송이라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재활용하면서 경비를 최대한 절약하였다. 1997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그녀는 그동안 절약한 경비와 수년간 받은 원고료,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과 중앙TV방송국으로부터 받은 특수공헌자 상금까지 10만원의 거금을 후배의 손에 넘겨주었다.

정년퇴직을 계기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김선녀선생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능력을 믿어주며 텔레비죤어린이프로그램을 만들수 있도록 기회를 창조해준 고마운분들, 자신의 “잔소리”나 “고집”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따라준 후배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있다. 그리고 안해가 아무리 사업에만 매달려있어도 원망 한번 안하던 듬직한 남편, 아픈 엄마를 걱정할 정도로 인정많은 딸-어릴 때부터 바쁜 엄마를 둔탓에 섭섭한것도 많으련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바른 심성으로 이쁘게 자라준 사랑하는 딸이 있어 언제나 든든하고 행복했었다고 고백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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