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홍미옥- 폭소뒤에 깔린 슬픈 배우리력서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2월10일 20시59분    조회:949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ㅡ화룡시예술단 홍미옥배우의 이야기

보름달같은 얼굴에 호함진 함박웃음,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폭소탄을 안겨주는 뛰여난 연기, 바로 화룡시예술단 미녀배우 홍미옥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언제나 대중들에게 즐거운 웃음을 선사하는 배우이지만 그녀에게도 그 웃음뒤에 삶과 모지름을 썼던 남모르는 슬픈 과거가 깔려있었다. 일전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홍미옥양은 자신의 비애에 젖었던 이왕지사를 털어놓아 기자를 감명깊게 했다.

올해에 들어서만도 연변TV음력설야회에서 《고향오빠》, 추석맞이야회에서 《만남》, 4회연변민들레생태문화예술절문예공연에서 《세 홀로인》(이상 허상권, 최중철, 홍미옥 출연) 3로인에 출연하여 폭소탄을 선물하며 연변TV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홍미옥배우의 걸어온 자국마다엔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고여있을가?

신물나는 가난ㅡ소녀의 비애

1970 3 21일 화룡시 용화향의 한 농민가정에서 3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홍미옥양은 노래를 잘 부르는 엄마 강금녀의 영향을 받아 어릴적부터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어 학교선전대에서 주력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그때 공부에 더욱 흥취가 짙었던 그는 예술보다는 장차 대학에 가려는 리상을 품고 공부에 진력, 드디여 화룡고중을 졸업한 뒤 대학입시에서 입학선인 520점을 훨씬 넘겨 614점의 우수한 성적을 따냈다. 헌데 어찌 알았으랴. 가난이라는 몹쓸 운명이 한창 꿈에 부푼 소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줄을. 원체 시골살림이여서 그때는 이웃들도 풍족하게 사는 형편이 못되였지만 특히 홍미옥양의 집안은 가난이라는 두 글자때문에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져가고있었다. 장기환자인 오빠때문에 집까지 다 팔아버리고 한가정식솔이 전기도 없는 과수원 보초막에 빌어들어서 먹을것도 없어 쌀까지 꿔서 먹으며 생활하는 상황에 대학을 지망했던 19살소녀의 황홀한 꿈은 결국 물거품처럼 사라질수밖에 없었다.

오직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던 아버지의 눈길에서 딸을 대학에 못보내는 미안한 심정을 읽으면서도 당시 비애에 젖을대로 젖은 소녀의 마음은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고있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일을 자기일처럼 안타까와하던 고중시절의 선생님이 그녀에게 정 대학에 갈수 없다면 직업고중에라도 갈것을 권고했다. 그 권고를 듣고 아버지 또한 큰마음 먹고 집안에 유일한 재산이던 암소를 500원에 팔아 그녀에게 손풍금을 사주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한 공부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옷 한벌 못사입은것은 물론 영양부족으로 고생하던 홍미옥양은 결국 13살부터 걸린 신염때문에 직업고중 유사반에 입학했어도 춤출 때거나 몸이 약간만 차가와도 소변건사가 힘들 정도였다. 결국 직업고중까지 중퇴한 그녀는 사회의 무직업자로 되고말았다.

가난과의 도전ㅡ내 인생은 나절로

설상가상이라고 할가. 홍미옥양의 모든 꿈이 사라진 상황에서 오직 장기환자아들을 살리기 위해 갖은 고생을 겪어오며 마을에서 꼬리없는 황소로 불리우던 아버지마저 끝내는 지쳐서 드러눕게 되였다. 오빠와 함께 중환자가 되여 눈앞에 있는 사람도 못알아보는 아버지를 보며 또 가냘픈 어깨에 한가정 중임을 떠메고 겨울이면 낫을 들고나가 담배대를 베여다 불을 때며 생활을 연명해가는 어머니를 보며 홍미옥양의 가슴속에서는 차츰 비애가 걷혀지고 강렬한 삶의 욕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렇다, 내가 일어서야 한다. 아버지도 오빠도 중환자가 된 마당에서 오직 내힘밖에 믿을게 없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은 홍미옥양은 무작정 집식구들을 모시고 화룡시가지에 세집을 잡은후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부르던 밑천을 살려 나이트클럽의 마이크를 잡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인식차이로 인해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노래를 파는 《기생》으로 비난받기가 일쑤였다. 당시 23살처녀인 홍미옥양이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말을 듣고 맨먼저 반대한 사람이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죽어도 딸이 〈창기〉가 되는것을 볼수 없다》며 한사코 반대하는 어머니에게 차근차근 설명해드리며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던 나날 홍미옥양은 자신의 힘으로 번 월급으로 한가정생활을 꾸려나갈수 있게 되자 차츰 생활에 신심이 생기였다.

홍미옥양이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른지 2년이 되던 어느날 즉 1995년도의 어느날 머리가 희슥희슥한 남성 한분이 나이트클럽에 왔다가 그녀의 노래를 듣고는 곧바로 그녀에게 화룡시예술단에 시험쳐볼것을 권고했다. 당시 화룡시예술단에서는 대외로 배우모집을 했는데 홍미옥양에게 시험쳐볼것을 권고한 남성분이 바로 화룡시예술단 김동률서기였다. 결국 홍미옥양은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가수로 뽑히는 행운을 얻었으며 그때로부터 그녀의 앞길에 예술의 광활한 무대가 펼쳐지게 되였다.

희망의 터전ㅡ예술의 활무대 
화룡시예술단에 가수로 뽑혀서 홍미옥양이 맨 처음 참가한 공연은 흑룡강공연이였다. 그때 갓 결혼해서 돌도 차지 않은 젖먹이아기를 엄마에게 맡겨두고 떠나려니 가슴이 쓰려나지 않을수 없었지만 자신의 일생에 전환점이 될 예술길의 첫발자국을 그는 결코 포기할수 없었다. 흑룡강에 가서 1개월간 주숙하며 공연하는 동안 뜻밖에도 그녀의 통속가요가 인기를 끌어 매 공연때마다 재청으로 6~7곡씩 부르게 되였다. 따라서 처음 참가한 공연이 인기를 끌며 그녀의 실력 또한 예술단지도부의 인정을 받게 되였다.

그후로 줄곧 공연때마다 독창가수로 등장하던 홍미옥양은 어느날 문득 예술단에 소품배우가 부족한것을 발견했다. 즉 예술단의 배우진영이 부족한 까닭에 공연때면 외부인원을 불러다가 출연시키는것이였다. 허상권, 최중철 등 소품배우들과 함께 공연을 다니며 함께 섭쓸리다보니 자연히 구연에 흥취를 가지게 된 홍미옥양은 마침내 어느날 자신이 구연작품에 출연할 뜻을 내비쳤다. 그후 얼마간 선배들에게서 구연예술을 배우고 그녀가 맨 처음 출연한 소품제목이 바로 《웅담분》이였다. 그녀가 최중철, 황은희와 함께 출연한 《웅담분》은 그 이듬해 흑룡강성순회공연에서 크게 관중들을 매료했고 홍미옥자신은 이 소품으로 1998년 길림성소품경연에서 개인 2등의 영예를 안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홍미옥양은 독창가수 겸 구연배우로 출연하며 화룡시예술단의 중견배우로 부상, 매 공연때마다 통털어 10~11개의 프로가운데서 혼자 독창, 대창, 소품, 삼로인 등 5~6개의 프로에 등장하게 되였다.

배우의 길ㅡ가슴속의슬픔도 묻어두고 
배우의 삶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랑만적인것만은 아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뛰여난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피타는 노력도 들여야 하지만 가끔은 가슴속의 슬픔도 표정상에서는 웃음으로 소화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1998년 흑룡강순회공연을 가게 되였을 때 홍미옥양의 아버지가 림종을 앞두게 되였다. 하지만 혼자 예술단공연의 절반가량프로에 출연해야 하고 또 흑룡강측에서는 이미 극장마다 화룡시예술단의 공연표를 다 팔아버린 상황에서 목구멍에 그렁그렁 담이 끓는 아버지의 림종을 앞두고도 홍미옥양은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납덩이에 눌리운듯 무거운 마음을 안고 흑룡강공연길에 오른 홍미옥양은 공연여가에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고 집에서는 뜻밖에도 아버지가 점적주사를 맞고 많이 나아졌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그래서 다소 마음을 놓고 공연에 몰두하여 흑룡강성관중들의 갈채를 받고 보름만에 길림시에 도착, 마지막 몇차의 공연을 앞두고있을 때에야 예술단 단장으로부터 그녀가 집을 떠나서 불과 40분만에 아버지가 사망된 소식을 알게 되였다. 사실은 공연일정때문에 그녀의 어머니와 예술단 단장이 약속하고 그녀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비밀에 붙였던것이다. 그때의 심정 무엇으로 표현할가? 아버지의 림종도 지켜드리지 못한 불효자식의 가슴속에서는 눈물 아닌 피고름이 흘렀다.

하지만 이미 약정된 공연은 그만둘수 없었다. 슬픔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홍미옥양은 계속 무대에 나섰는데 특히 정극소품 《웅담분》을 공연할 때엔 절절한 심정이 안받침되여 관중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따라서 공연은 원래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되였다.

엄마구실 못하는 엄마ㅡ모든 희망 애에게 기탁 
가정생활에서 홍미옥양은 애를 낳기만 했을뿐 별로 사랑을 주지 못했다. 1년치고 대부분은 공연차 밖에서 떠돌다보니 애는 낳아서부터 줄곧 그녀의 어머니가 키워왔다. 《어린애를 두고 나갈 때면 가슴이 아프고 늘 엄마의 수고가 안스럽다》고 말하는 홍미옥양은 《매번 공연차 몇달씩 밖에서 돌다가 돌아와보면 그동안 애가 커서 알아볼수 없을 때도 있었다》며 눈굽을 적셨다. 현재 15살로 초중 2학년에서 공부하고있는 홍미옥양의 아들 리림걸은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공부도 잘하고 학급에서 반장으로 활약하고있다. 어려서부터 엄마와 갈라져 살아온 리림걸은 지금 저절로 밥을 해먹거나 라면을 끓여먹기도 한단다. 또 엄마의 소품을 보고 신통히도 흉내내군 하는데 홍미옥양은 그런 아들애가 예술보다는 자신의 가슴에 한맺힌 공부를 많이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것을 바라고있다.

홍미옥양은 《내 가정을 잘 지키지 못해 안스럽지만 관중들이 손잡고 인사하며 반가와할 때면 새로운 용기가 난다》며 《보다 더 좋은 소품에 출연하여 관중들에게 보답하고싶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독창, 대창은 물론 소품 《초하루》(성급2등상 획득), 《내거 삽소》(성급 1등상 획득), 《병원에서 맺은 인연》, 삼로인 《고향오빠》, 《만남》 등 수십편의 구연종목에 등장하며 1500여차의 공연에 참가, 대부분 온돌공연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굳힌 홍미옥양은 특히 사라져가는 우리 민족 문화유산인 3로인에 많이 출연한 까닭에 시골관중들로부터 《홍아매》로 친절히 불리우고있으며 그와 허상권, 최중철 등 배우들 그리고 화룡시문화부문의 알찬 노력으로 3로인은 국가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록되였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전일봉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그는 평범한 소방관이였다. 하지만 화재현장에서는 불길속을 날아드는 전기식 인물임에 손색이 없었다. 그는 체구가 왜소한 조선족젊은이다. 하지만 긴급구원현장에서 뜨거운 손길로 65명이나 되는 생명을 구출했다. 그는 어릴적부터 량친의 사랑을 잃은 ‘고아 아닌 고아’였다. 하지만 장장 8년간 독거로인들을...
  • 2007-08-27
  • 얼마전 기자는 지인의 소개로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80주년을 맞는 기회에 중국인민해방군 총병원 (이전 해방군 301병원)의 이비인후과 주임의사인 한동일박사를 만났다. 소박한 농민의 아들 끈질긴 노력가 찾아간 날 약속한 시간이 한시간반이나 기다려서야 문진을 끝내고 들어오는 한박사를 만날수 있었다. 박사이고 군병원...
  • 2007-08-16
  • 17차 당대회 대표로 선거된 조선족 리명성 ◈ 중국의 대외개방, 경제글로벌화, 다국적산업합작 등에서 중요한 성과◈ 25만자에 달하는 《중국의 경제전략》 개혁개방의 성공◈ 경험 총화 중국경제발전의 전략적구상 전망 제시◈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 중앙국가기관걸출청년, 귀국류학생선진개인 등 영예 안아 중국기업련합...
  • 2007-08-14
  • 조선족유치원들이 어린이류실로 고심하고있는 최근년간 해림시조선족유치원은 오히려 해마다 어린이수가 늘어나 금년들어 어린이수가 240여명(올해 졸업한 70여명 포함)으로 늘어났다. 또한 1000평방미터의  새 교수청사에 갖가지 대형 놀이기구 등을 구전히 갖춘 규모화한 유치원으로, 민족의 꽃봉오리들의 요람으로 ...
  • 2007-08-14
  • 그의 매일 일과는 축구 관련사항들로 꽉 차있다.  푸름하게 밝아오는 새벽 5시 반이면 벌써 애들을 이끌고 아침훈련에 나서고 오전이면 체력훈련, 기전술훈련에 그도 함께 땀동이를 쏟는다. 애들이 문화과 수업을 하는 날에는 훈련계획을 짜고 경기총화도 짓는다. 이토록 축구에 푹 빠진 사나이―그가 바로 연길시제2고...
  • 2007-08-09
  • 아르헨띠나 최대 민영방송인 《텔레페 TV》의 뉴스 앵커를 지낸 황진이(30) 씨는 동양인 녀성으로 아르헨띠나 언론계에서 쉽지 않게 성공을 거두어 주변의 시선을 모으고있다.미국, 카나다 등 북미지역에서 아시아계 앵커들이 주목받는것과는 달리 남미언론계에서는 동양인을 거의 찾아볼수 없다. 황씨는 1998년 대학졸업직...
  • 2007-08-07
  • 연변성보국제상무빌딩유한회사의 정영채회장이라면 연변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을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기업가로서가 아니라 우리 연변 사람으로서의 정영채회장이라면 잘 안다고 자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것이다. 정영채회장에 대한 필자의 인상도 워낙 연변에 와 사업에 성공하여 돈도 많이 벌고 여러가지 사...
  • 2007-08-06
  • ——— 로전사 최경애할머니의 참군일기에서  산골마을에서 참군한 처녀 1946년 4월초 연변의 봄은 일찍도 찾아왔다. 마을 앞산에는 진붉은 진달래가 떨기떨기 피여났다. 로투구 마을밖에는 전선으로 떠나는 청년들을 전송하는 마을사람들로 분비였다. 두 오빠와 같이 전선으로 떠나는 경애는 꼭 공을 ...
  • 2007-08-02
  •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 사람이 자기가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낸다면 그 사람이 바로 인재인것이다.애득백화점에는 그런 인재가 많기에 애득의 오늘과 같은 발전이 있다.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며 즐겁고 신나게 일하는 사람들이 인재인것이...
  • 2007-08-02
  • 군대는 하나의 특수집단이다. 군대는 사람을 양성하고 사람을 단련시키며 사람을 키우는 대학이다. 군인이란 이 특수직업은 곤난을 이겨내도록 의지력을 키워주고 인생을 더 보람있고 더 알차게 보낼수 있는 토대를 닦아준다. 1969년 19세 나이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37년간 부대생활을 해온 박성진은 《군영은 강한...
  • 2007-08-0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