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문혁- 인생체험을 창작연기 밑거름으로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3월20일 08시19분    조회:1511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다양한 인생체험 창작과 연기의 밑거름 되여
—중견연극배우 김문혁씨 50여부의 소품 창작 직접 연기


기자가 김문혁씨를 찾았을 때 그는 사업시찰차 연변에 오는 중국희곡가협회당위 서기이며 저명한 재담배우인 강곤을 맞을 준비로 바쁜 모습이였다.

《이번에 강곤은 장춘의 성희곡가협회 먼저 우리 연변을 찾아옵니다. 그만큼 연변의 조선족구연이 중앙과 상부의 중시를 받고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김문혁씨는 연변은 축구, 가무와 함께 구연도 일찍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널리 소문이 났었다고 했다.

현재 연길시조선족구연단 단장직을 맡고 국가1급배우로 훌륭한 활약을 펼치고있는 김문혁씨는 연극배우는 생활에 밀착하여 생활을 예술화하여야 하며 관중들과의 거리감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사실 김문혁씨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연극배우로 되기 위한 밑거름으로 다양한 인생을 수없이 경험했다.

김문혁씨는 1966년 8월 6일 저명한 작곡가인 김덕균선생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있는 동요 《반디불》, 《전사의 미혼처 노래 부르네》 등 노래의 작곡자인 김덕균선생이 생남을 하던 날이 바로 문화혁명지도소조설립의 날이였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김문혁이다. 기실 그의 사촌들은 모두 종자돌림이다. 어려서 김문혁씨의 꿈은 작가였다. 그는 단돈 10전이라도 아껴 모았다가는 서점으로 달려가 문학서적을 사군 했다. 그는 《수호전》, 《삼국연의》 등 한어로 된 고전명작들을 사전을 들춰가며 읽었다. 취미가 다양했던 김문혁씨는 독서외에 축구도 했고 색스폰도 불었으며 특히 미술에 장끼가 있었다. 그러던 그가 고중 1학년때 중퇴를 했다. 그때부터 그는 과일랭장고에서 수위를 서기도 했고 기차역에서 방수포로 덮은 과일을 지키기도 했으며 이모사촌형이 모는 차의 석탄실이도 했고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나르는 막일군으로도 있었다. 그리고 연변예술학원 지식청년상점에서 삼륜차를 굴리면서 물건구입도 했고 수위로도 있었다. 다양한 생활을 체험하면서 김문혁씨는 자기도 모르게 장차 연극배우로서의 제일 중요한 자본인 생활체험들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1983년, 김문혁씨의 녀동생이 공주령시조선족예술단에 시험처러 갔다. 헌데 녀동생을 찾아나선 김문혁씨가 시험에 합격되여 공주령시조선족예술단에 입단했고 예술단이 불경기에 처하여 김문혁씨는 또 모진 생활체험을 하게 되였다.

1년뒤 연길로 돌아온 김문혁씨는 본격적으로 예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선후로 백문순선생한테서 클라리넷을, 김경일선생한테서 손풍금을 그리고 리부일선생한테서 미술을 배웠다.

김문혁씨는 24살나던 해인 1989년 드디여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교육학부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의 꿈은 연극배우였다. 그는 연극학부로 전공을 바꾸었고 연극공부에 모든 정력을 쏟았다. 그는 늘 강동춘과 리동훈 등 배우들의 연기가 부러웠다. 그는 자기의 앞길을 꼼꼼히 짚어보았다. 정극에는 자신이 없고 연극보다 소품이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992년 연변대학예술학원 연극학부를 졸업한 김문혁씨는 어렵사리 연길시조선족구연단에 입단했고 본격적인 소품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남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것이 아니라 뭔가 좀 튀는 성격인 김문혁씨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3년간 새벽예술단을 꾸렸다. 그는 제일 많아 16명의 단원을 거느리고 동북3성을 누비며 순회공연을 다녔다. 월급제까지 도입하면서 예술단운영에 전전긍긍하던 그는 결국 18만원이라는 엄청난 빚을 지고 나앉았다. 비록 막대한 학비를 지불했지만 그는 예술경영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참신한 사유를 보여주었다.

2000년, 김문혁씨는 연극배우로 연길시예술단에 입단했고 그 이듬해에는 연길시조선족구연단 부단장으로 발탁되였다.

16년의 연기생활에서 그는 어렸을 때 즐기던 문학공부가 밑거름이 되여 소품창작에서 손을 펴기 시작했다. 1993년 그가 창작하고 출연한 소품 《밀방》이 전 성 소품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가 창작하고 리동훈과 합연한 《술친구》가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김문혁씨의 전성기가 도래한것이다. 그는 1995년 소품 《이웃사이》와 《술친구》로 성과 주의 연기, 창작, 연출 1등상을 12개나 휩쓸었다. 그는 도합 80여부의 소품에 출연했는데 50여부는 그가 직접 창작한것이다.

《내가 사람들한테 널리 알려진것은 소품보다도 TV드라마에서 역을 맡았기때문일것입니다.》

김문혁씨는 선후로 《초연속의 수리개》, 《사랑의 품》,《샘》 등 TV드라마에서 주역을 맡았다. 1996년 《사랑의 품》제작진은 김문혁씨를 아버지역으로 선정했다. 외팔의 아버지역을 맡은 그는 《초연속의 수리개》에서도 연기를 맡았기에 개산툰과 연길을 오가야 했다. 그는 처음에는 못하겠다고 사양하다가 정작 대본을 보면서 스토리에 빠져들다보니 자연히 애착이 갔고 훌륭하게 연기를 해냈다. 그는 대본을 보면서 몇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김문혁씨는 청년시절 삼륜인력거를 1년간 타본 경험이 있기에 아버지역을 무난히 소화해낼수 있었고 밑바닥인생을 살아보았기에 연기를 핍진하게 해낼수 있었다. 김문혁씨의 연기가 빛을 발한 TV드라마 《사랑의 품》은 전국상을 수차 수상했다. 이어 그는 자진해  TV드라마 《샘》의 주인공역을 맡았다. 31살 나이에 50대 인물역도 무난히 소화해내 제작진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웃기기 위한 연기가 아니라 진정 내심으로 우러나오는 웃음을 위해 과장없는 소박한 연기를 추구하는 김문혁씨는 연기를 하면서도 관중석에 늘 신경을 쏟고있다. 《관중과의 거리를 최대한 줄여라.》 이것이 연극인 김문혁의 신조이다. 관중을 존중하고 관중과 거리감을 최대한 줄임으로써 배우라는 신비감이 없어지고 유머가 많은 옆집 아저씨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김문혁씨는 청년시절 차곡차곡 쌓아온 밑바닥인생이 이렇게 소중할줄 몰랐다고 말한다. 소품배우는 언어와 행동으로 일상생활에 흔히 있는 사건이나 개성적인 인물을 창조한다. 따라서 소품배우는 뚜렷한 개성이 있어야 한다.

김문혁씨는 이제 그제날 흥행을 탔던 삼로인, 재담, 만담, 창담, 판소리 등 쟝르를 되살려야 한다면서 이것은 자기 세대에서 더는 미룰수 없는 과업이라고 했다.

어린시절 다재다능했고 톡톡 튀는 끼를 보여주면서도 밑바닥인생을 살만치 소박하고 질박한 연극배우 김문혁, 그의 더욱 성숙된 연기와 구연예술단체지도자로서의 우리 민족 구연발전의 더 큰 리더를 기대해본다.

연변일보 김인선 기자 실습생 최성우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음악과 함께 하는 인생지휘 겸 작곡가 리하수선생에 대한 이야기《엄마 곱니 아빠 곱니/누가 누가 더 곱니/엄마 곱니 아빠 곱니/누가 누가 더 곱니/엄마 없던 날 하루종일 비빔밥만 먹었구요/아빠 없던 날 밤새도록 도깨비꿈만 꾸었대요…》독자들은 1990년대중반부터 소년아동들은 물론 성인들가운데서도 광범위하게...
  • 2009-04-20
  • “북경아가씨”의  작곡가 정원수씨일전 기자는 심양에서 조선족가수 김월녀를 한국가수계에 성공적으로 데뷔시킨 한국작곡가 정원수씨(1960)를 만났다. 한 무명 조선족가수의 음반취입을 위해 심양을 방문한 그는 “생각외로 조선족가수들의 음악기초와 자질이 좋았다. 더 많은 조선족가수들을 한국에...
  • 2009-04-18
  •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는 中조선족 하얼빈시 조선민족사업촉진회 서명훈 명예회장(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의 조선민족사업촉진회 서명훈(78) 명예회장은 조선족 사회에서 '안중근 연구 전문가'로 불린다. 서 회장은 1989년 고국을 방문해 당시 독립기념관 안춘생 관장(안중근...
  • 2009-04-18
  • 《사업과 가정 두마리 토끼 다 잡아야죠》사람들에게 친근함을 안겨주는 아나운서 김춘희가 6월 2일 3.4킬로그람되는 딸을 보아 행복한 엄마로 되였다. 제왕절개수술로 출산후 고통이 몰려올 때마다 아기를 들여다보면 그 아픔이 가신듯 사라진다는 김춘희는 엄마로 된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어오른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 2009-04-17
  • 창작과 리론연구에서의 성과그리고 지도력—연변대학예술학원 부원장 리승룡씨 현대식고층건물들이 숲을 이룬 도심속에서 고색이 창연한 연변대학예술학원 미술청사는 옛모습 그대로 오늘도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있다. 우리 민족의 미술력사를 차곡차곡 쌓아오며 미술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빛을 발하는 미술학부청사...
  • 2009-04-16
  • 분장예술을 꽃피워가는 사람분장예술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생소하게 생각할것이고어떤 사람은 알쏭달쏭하게 여길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미용원에서 하는 화장이나 무대화장을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분장은 미용원에서 하는 일반 화장보다 한차원이 더 높은 예술이다. 분장예술은 배우들을 극중인물의 성격과 모습에 맞게...
  • 2009-04-16
  • 약물부당사용 위해성 크다—연변대학부속병원 약학전문가 김영순건강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면서 어떻게 안전하고도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약을 사용할것인가는 전 사회적으로 관심하는 열점문제이다. 세계위생조직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사망된 환자중 약 1/3이 약물부당사용으로 숨졌다. 우리 나라에도 약물...
  • 2009-04-16
  • 연기생활은 내 생명의 전부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2008년 음력설야회에서 청춘파인기배우 채용과 더불어 소품 《장모님의 소원》에 출연하여 시청자들의 각광을 받고 《채용의 가시어머니》로 소문놓은 김해란 ?지금까지의 30여년 연기생애에 100여부의 장막연극,단막극, 소품에 출연하면서 성격이 판이한 여러가지 인물형상...
  • 2009-04-15
  • ~노래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를 깔며~ 지금 들려오는 이 노래는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노래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입니다. 20세기 70년대 말에 창작된 이 노래는 약 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고 있고 전국 10대 금곡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이 노래의 작사...
  • 2009-04-14
  •    《얼굴》 없는 성우의 외길인생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단 연출 주춘복에 대한 이야기주춘복은 라지오방송이나 텔레비죤역제프로에 출연하면서 목소리로 청취자들과 가까와진 우수한 성우중의 한사람이다.꼬박 30년간 성우의 외길인생을 걸어온 그는 자칫하면 세월의 안방에 묻혀 영영 《얼굴없는 사람》...
  • 2009-04-1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