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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문철- 사랑금자탑 쌓는 애심천사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3월25일 14시39분    조회:8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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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시희망복리원 리문철원장에 대한 이야기

화룡시희망복리원 원장 리문철씨는 35년래 근 130명에 달하는 고아, 극빈가정의 어린이와 한때 길에 잘못 들어섰던 애들을 맡아 키우면서 수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엮어냈다. 성당위 상무위원이며 주당위 서기인 등개는 리문철의 사적을 읽고나서 "리문철의 사적은 아주 감동적이다. 그의 애심행동을 대폭 선전해야 한다"고 지시했고 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주당위 선전부 부장인 리흥국도 "올해 우리 주에서 벌리고있는 '도덕이 있는 인간이 되자'는 활동과 '사랑의 마음 전하기'활동과 결부해 리문철의 사적을 강도높고 광범위하게 소개하여 그 영향면을 확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생활해온 리문철씨는 총각시절부터 고아를 맡아 키워왔다. "좋은 일 한가지를 하는것은 어렵지 않지만 한평생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리문철씨가 바로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낸것이다. 오늘 본지는 리문철씨의 사적을 다시 한번 상세히 소개하고저 한다.    


지난 16일, 기자는 리문철씨를 찾아 화룡시희망복리원을 향했다. 동면하던 동물들이 꿈틀거린다는 경칩이 지난지도 이슥하지만 여기 북방변경에 자리잡은 연변땅은 찬바람이 뼈속에 스며들고 강물도 꽁꽁 얼어붙은채 해동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새벽 4시경, 찬바람을 무릅쓰고 자리에서 일어난 리문철씨는 곧바로 보일라실로 가서 불을 지펴 방안을 덥히고나서 다시 화식칸으로 가 27명 아이들의 아침밥을 준비한다. 아이들이 하나 둘 학교로 떠나기 시작해 마지막 애까지 문을 나서서야 리문철씨는 잠시 한숨을 돌린다... 이같은 그의 일상은 1974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미 35년간 지속되여왔다

리문철씨는 "가정은 언제나 따뜻함 그 자체이고 인간이 생활하고 성장하는 요람입니다. 천애지각에 가 있어도 가정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주는 등대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생활가운데서 일부 어린이들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가정을 잃고 가정의 따뜻한 보살핌을 잃었습니다. 지난 30여년간 이같은 어린애들에게 가정의 따뜻함을 안겨주기 위해 한명 또 한명의 고아와 불우한 가정의 애들을 맡아 기르게 되였습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사랑의 불씨가 싹트다

문예사업자이신 아버지가 지병으로 늘 앓고 리문철씨와 그의 누나도 잔병으로 늘 앓다나니 아버지의 얼마 되지 않는 로임과 어머니가 강가에서 모래를 쳐 피땀으로 번 돈의 대부분이 치료비와 약값으로 들어가 가정은 늘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너무도 수박이 먹고팠던 그는 어느 한번 거리에서 수박껍질을 주었다가 먹어보지도 못하고 동학들에게 들켜 옹근 한학기동안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극난한 생활고로 한벌에 몇원 하는 통일복장도 갖추지 못해 체조시간에 나가지 못하고 홀로 교실에서 눈물을 훔쳐야 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은 어린 문철이를 너무도 일찍 셈이 들게 했다. 새옷 한벌 입어본적이 없고 학교에서 조직하는 들놀이에도 한번 가보지 못했지만 투정 한번 부려본적이 없다. 필기책은 앞뒤면을 다 쓴 후에 다시 고무지우개로 지우고 재활용해 그의 필기책은 늘 너덜너덜 했다.

소학교 3학년 때 그는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고 한달간 학교로 가지 못하게 되였다. 그의 극난한 가정형편을 알게 된 담임교원은 얼마 되지 않는 로임에서 얼마간 떼내여 닭알 한바구니에 연필과 필기책들을 사갖고 병문안을 왔고 젖먹는 애를 업고 늘 그의 집에 찾아와 공부를 지도해주었다. 가난했던 생활형편으로 그의 동년은 단조롭기만 했지만 부모의 견강함과 담임교원의 따뜻한 사랑은 어린 문철에게 그 어떤 어려움도 견디여낼수 있는 의력과 불우한 애들에 대한 애심을 키워주었다. 그때로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장차 커서 자기를 동정해주고 도와준 선생님처럼 불우한 이웃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주겠다는 사랑의 불씨가 싹텄다.

불우아이들의 "총각아버지"

리문철씨가 고아를 입양하기 시작한것은 35년전부터였다. 1974년, 화룡시방산국로동자로 초빙된 리문철씨는 단위에 종업원숙소가 없어 세집을 맡게 되였다. 그런데 그해 세집주인은 일시적인 충동으로 범죄를 저질러 다섯 자식을 병약한 안해에게 맡겨두고 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당시 큰 애가 14살밖에 되지 않고 막내는 6살밖에 되지 않았다. 세대주가 감옥에 가면서 안정된 수입래원을 잃게 된 이 가정에서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였다.

당시 세집값은 5원밖에 되지 않았지만 리문철씨는 39원의 로임을 전부 이들 가정에 내놓았고 아이들의 "대리아빠"가 되였다. 낮에는 출근하고 저녁에는 아이들의 학습을 지도해주었다. 사회상에서 총각으로 과부집에 있는다느니 범죄자가족을 돌봐준다느니 하며 시야비야 말들이 많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4년간 이들 가족을 돌봐주었다. 그의 보살핌속에서 애들은 바르게 자라났는데 큰애는 학급 단지부서기로 되였고 둘째는 반장으로 되였다. 그의 아버지도 개조표현이 좋아 2년 앞당겨 출감되였다.

1981년 결혼전까지 그는 이미 다섯애를 돌봐주었고 2명의 고아를 수양하고있었다. 수양하고있는 2명의 고아때문에 첫 혼사는 틀어지기도 했다. 소개를 통해 만난 지금의 안해 채명자씨도 아이가 둘이나 딸린 그를 보고 주저하기도 했지만 그의 따뜻한 마음에 이끌리여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결혼한 첫날밤, 두 아이는 기어코 그들과 함께 자겠다며 그들의 품에 파고들었다.

사랑으로 불우아이들의 마음 보듬어 줘

1982년, 화룡시 투도진에는 어려서 량친 부모를 잃고 오빠손에서 초중까지 다닌 한 녀자애가 있었다. 비록 화룡고중에 입학했으나 화룡에 세집를 맡을 돈도 없고 학비를 댈 돈도 없었다. 이 사연을 알게 된 리문철씨는 안해와 상의하고 그 애를 집에 데려왔다. 네식구가 살고 있는 18평방메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초가집에서 또 16살살이나 먹은 녀자애를 키운다는건 쉽지 않았다. 3년후 아이는 순조롭게 길림대학에 입학했고 이제는 모 단위에서 책임자로 있다.

해화와 그의 두 동생은 불행아였다. 부모를 따라 산동으로부터 화룡에 이주해와 살았는데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생활 기반을 잃은 그와 그의 두동생은 아버지의 후사도 처리하지 못하고 화룡의 거리를 누비며 류리걸식했다. 해화와 그의 두 동생은 또한 행운아이기도 했다. 우연한 기회에 리문철씨의 눈에 띄이게 된것이다. 학교갈 나이에 거리에서 류리걸식하는 그들을 보고 사연을 료해한 리문철씨는 우선 그의 아버지의 후사부터 처리해주고 그들의 학습비용을 대주어 공부하게 했다. 해화와 그의 두 동생뿐만이 아니다.  량친부모를 잃은 해연이, 아버지가 정리실업하고 어머니가 정신분렬증에 걸려 생활형편이 극히 어렵게 된 령화 등 수많은 어린이들은 리문철씨의 집에서 근심걱정없이 먹고 자고 공부할수 있었다.

리문철씨는 더욱 많은 아이들을  입양하고 돌봐주기 위해 집을 확건하고 《화룡시희망복리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때로부터 그의 집은 불우한 어린이들의 삶의 오아시스이고 쉼터였다. 1974년부터 그가 입양했거나 학잡비를 대주며 도와준 어린이들은 무려 130명에 달한다. 그중 대학생이 33명, 석사생이 3명이 나왔으며 대부분 일자리를 찾고 자기의 일터에서 열심히 사업하고있다.


실족어린이들의 길잡이

리문철씨는 애들을 단순히 입양만 하고 키워만 준것이 아니다. 애들을 생활상에서 세심히 보살폈을뿐만아니라 그들의 정신, 학습면에서까지 일일이 도와나섰다. 낮에는 많은 일에 시달렸지만 저녁에 돌아와서는 애들의 학습정황을 일일이 체크하고 지도해주었다. 해마다 설명절이 돌아오면 애들과 함께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애면글면하는 변방부대, 소방대와 공안국 110중대, 각 파출소를 위문했고 외롭게 사는 로인들에게 석탄을 사주고 약을 보내주었으며 과일 등 위문품을 사갖고 생활이 어려운 가정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겨울방학과 여름방학간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그들 부모의 산소를 찾기도 하고 13용사기념비 등 혁명전통교육기지, 연변과학기술대학 등지를 참관하면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학습을 잘하여 나라의 유용한 인재로 되려는 포부를 품게했다.

특히 실족어린이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달랐다. 그는 연길감옥, 화룡간수소와 련계를 갖고 소년범죄자들을 개조하는데 일조했다. 청학이는 그가 소년범죄자들을 대상해 한 보고회에서 알게 된 소년이다. 청학이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사회 어중이떠중이들과 휩쓸려다니다가 어느 한번 싸움에서 사람을 죽여 7년 판결을 받게 되였다. 그는 청학이를 보고 "열심히 개조해라. 감옥에서 나올 때 내가 마중할게" 하고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웬만해서는 택시를 타지 않는 리문철씨와 그의 안해는 청학이가 감옥에서 나오는 날 택시에 태워 연길시를 한바퀴 돌고서야 희망복리원에 데리고가 일자리까지 마련해주었다. 지금 그는 한국에 로무를 나가 열심히 살고있다.

2003년, 희망복리원에 윤송이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예전에 다른 사람을 칼로 찍어 죽여 15년 판결을 받았던 젊은이다. 출옥하고 사회에 나오니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고 회피했으며 일자리도 찾을수 없었다. 실망한 그는 술마시고는 사람들과 걸고들어 싸움질을 했는데 어느날 문득 이렇게 나가다가는 또다시 감옥행을 하게될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새출발을 하려고 리문철씨를 찾아왔던것이다. 리문철씨와 그의 안해는 그를 내심하게 설복교양하는 한편 천진의 한 기업에 련계하여 일자리까지 찾아주었다. 리문철씨와 그의 안해가 그를 보러 가면 윤송이는 "나의 오늘이 있게 된것은 희망복리원이라는 가정이 있었기때문입니다"라고하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리문철씨가 입양하고 도와준 130명 가운데는 13명의 실족청소년들이 포함되여있다.

사랑의 금자탑

리문철씨가 《희망복리원》을 운영하는것은 그가 남보다 부유해서가 아니다. 불우한 애들을 돕기 위해 그는 줄곧 가난에 쪼들려왔다. 아이들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결혼하고 남은 돈 50원으로 새끼돼지를 사서 키웠는데 그것이 점차 커져 돼지 20여마리, 닭 수백마리로 늘어났다. 개혁개방이후 그는 단위에서 나와 상점, 식당도 꾸려보았다. 이후 또 돈을 꾸어 곰을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날로 늘어나는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복리원을 운영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리문철씨는 당뇨 등 여러가지 질병에 걸렸고 그의 안해도 다발성간혈관종류에 걸렸는데 지금도 간부위에 7센치메터크기의 종양이 5개나 있다. 하지만 리문철씨는 한번도 조직에 손을 내민적이 없으며 그의 안해도 병든 몸을 이끌고 한국으로 돈벌러 나갔다.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지만 정신과 사랑만은 남기게 됩니다." 살아있는 기간 끝까지 불우한 애들을 도와주고 자신이 죽은 후에는 그 애들이 계속 자신의 길을 이어가도록 하여 사랑의 금자탑을 쌓아가리라는 리문철씨, 오늘도 계속하여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업적을 쌓아가고있다.

연변일보 글/사진 김명성 허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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