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림성호가수의 예술인생을 뒤돌아본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3월30일 13시12분    조회:785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딸과 함께 부르는 사랑의 메아리

연변TV 뉴스종합채널에서 올해 정월 초하루날 저녁에 방송한 2008년 음력설야회에서 연변가무단의 저명한 남저음독창가수 림성호선생이 딸 림경진가수와 함께 부른 노래 《하고싶은 말》이 시청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쥐면 부서질가 불면 날아갈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서운한 심정, 사랑하는 님을 따라 시집을 가면서 부모님의 키운 정에 목메여하는 딸의 애잔한 심정을 여실하게 그려낸 가사내용도 그렇지만 실생활에서의 아버지와 딸이 그것도 바다건너 연변과 일본에서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그 자체가 시청자들을 감동의 도가니에 몰아넣은것이였다.
성장한 딸을 두고있는 부모라면 적어도 한두번쯤은 귀를 기울인적 있는 가요 《하고싶은 말》은  최근년에 새롭게 선을 보인 노래가 아니라 림성호선생이 20년전에 창작하고 연변TV를 통해 여러차나 방송된 작품이다. 이런 작품이 지금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있는것은 아마도 출국바람으로 실생활에서 리별의 아픔을 겪고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일것이다.

이 노래를 창작하게 된 과정을 되돌아보며 림성호선생은 《딸자식 둘만 키운 저로서는 딸을 시집보내면서 서운해하는 부모들의 심정을 알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 마음을 담아 노래를 만들었구요.》라고 이야기한다.

친척, 친우들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서운해하는것을 볼 때마다 림성호선생은 《나도 이제 저렇겠지…》라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든지 친정부모의 애잡짤한 심정을 반영한 노래를 창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키워왔다. 그러던 1988년, 림성호선생은 딸 림경진과 함께 록음테프를 만들게 되였는데 취입할 노래를 선정하고보니 각기 부른 노래는 많지만 부녀간이 함께 부른 노래는 한수도 없었다. 《딸애와 둘이서 만드는 테프인만큼 함께 부른 노래가 꼭 있어야겠는데…》 이런 생각을 굴리던 선생은 잔치날 아버지와 딸이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노래를 창작하여 딸과 함께 부르면 인기를 끌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사도 적어보고 음악구상도 초보적으로 해보았다. 미구에 절반농사를 마친 선생은 당시 테프의 가사주필을 맡은 연변문련 김경련주석에게 자기의 구상을 털어놓았다. 김경련주석은 림성호선생의 구상을 긍정하고나서 가사를 알심들여 수정해준외 제목도 《하고싶은 말》이라고 달아주었다.

림성호선생이 작곡하고 딸 림경진과 함께 부른 이 노래는 북경영화촬영소에 가서 록음할 때 벌써 주위의 가수와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고 이 노래를 담은 테프는 발매된지 1개월만에 연변과 동북3성에서 몽땅 팔리였다.

연변TV 뉴스종합채널에서는 1991년 《3.8》부녀절에 이 노래를 매주일가로 방송하게 되였는데 촬영당시 현장에 모신 녀성모범들과 어머니들이 노래가사를 듣고 눈물을 흘리였고 노래가 TV를 통해 방송되자마자 주내각지에서 40∼50통의 편지가 선생한테로 날아들었다. 그후 이 노래는 요청무대에서 요청편지를 자주 받는 노래의 하나로 되여왔으며 어느곳에 가든 선생을 알아보고 《아가야》노래를 부르던 가수라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래와 인연을 맺기까지

1937년, 한국 전라남도 순창에서 림씨가문의 여덟째로 태여난 림성호는 세살때 부모님과 함께 개척단을 따라 《눈물젖은 두만강》을 건너 안도현 량강촌에 정착하였다.

목청이 유달리 웅글져서 소학교시절부터 《양철통》이라는 악의없는 별명을 달고있은 그는 락천적이고 노래를 즐기는 아버지가 축음기를 사놓은 덕분에 어려서부터 레코드판을 돌리면서 노래와 접촉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안도현초중에서 바리톤, 트럼베트 등 악기를 다루고 관악대 대장으로 활약한 그는 연변1중에 진학해서도 악대대장, 학생회 문예부장 등 직을 맡고 자신의 흥취를 키워갔다. 그러던 1954년 봄, 중앙교육부에서 연변에 와서 시찰을 하게 되였는데 주에서는 문예써클활동이 잘되는 여러 중소학교에서 문예종목을 추천하여 회보공연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때 연변1중에서 추천한 종목이 남성중창과 림성호의 독창이였다.

공연을 하루 앞두고 연변가무단의 김태희단장과 정진옥, 김성민선생이 연변문화극장에 와서 공연종목을 심의하게 되였다. 림성호의 차례가 되여 《문경고개》를 부르는데 절반가량 불렀을 때 무대아래에서 한분이 《됐어요!》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노래가 심의에 통과하지 못한줄로 착각한 림성호가 돌아서서 퇴장하려는데 얼굴이 동그스름한분이 올라오면서 그를 불러세웠다.

《김태희선생, 내가 연변에 와서 이렇게 좋은 〈베스(남저음)〉는 처음 만났소.》

무대아래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난 그분은 자기가 정진옥이라며 자아소개를 하는것이였다. 당시 《처녀의 노래》 등 가요를 즐겨들으면서 작곡가 정진옥의 이름을 벌써부터 알고있은 림성호는 앞으로 훌륭한 성악가가 될수 있다는 그분의 칭찬에 날듯이 기뻤다.

그후 정진옥선생을 찾아다니며 음악지식과 시창능력을 키운 림성호는 심양에 가서 레코드제작을 위한 록음에 참가할 행운을 얻었고 거기에서 방죽송선생의 계발을 받고 장차 음악대학에 가서 체계적으로 배워 훌륭한 성악가로 자라날 결심을 굳히였다.

1956년 8월에 연변가무단을 이끌고 전국음악주간에 참가하게 된 정진옥선생은 대학시험준비에 한창인 림성호를 불러다 합창대에 가입해줄것을 간곡하게 청들었다. 이리하여 림성호는 전국음악주간 및 그후의 전국순회공연에까지 참가하고 그 다음해인 1957년에야 상해음악학원에 응시, 끝내는 300여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입학통지서를 받아안았다.

보람찬 노래인생

예술의 전당 상해음악학원에서 림성호는 당시 중국성악계의 중견이고 프랑스와 이딸리아에 류학가서 음악을 전공한 거초지교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음악지식을 열심히 배우면서 자질향상에 전념하였다. 그 보람으로 3학년부터는 선생님들과 함께 부대위문공연도 다녀오고 정강산, 로산 등지에 나가 음악창작도 하고 공연에도 참가할수 있게 되였다.

대학 5학년에서 공부할 때인 1962년에 상해음악학원 부원장이며 성악학부 학부장인 주소연교수의 추천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정대표단과 예술단을 영접하는 외사문예야회에 참가한 림성호는 조선민요 《청진포배노래》를 불러 환영을 받았고  제3차 《상해의 봄》예술절에서는 《아름다운 연변》을 불러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본과졸업생 36명중 6명만 선발하여 참가시키는 졸업음악회에서는 유일하게 재청을 받으면서 탄탄한 노래실력을 과시하여 중앙악단에 배치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당시 연변가무단 부단장이였던 정진옥선생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주당위 서기인 주덕해동지를 찾아가 연변에 꼭 수요되는 인재인 림성호가 연변가무단에 배치되게끔 해달라고 지청구를 들이댔다. 나중에 림성호는 중앙민족사무위원회, 중앙문화부의 노력으로 연변가무단에 호적을 붙이게 되였다.

연변가무단에서 정식으로 노래인생을 시작한 림성호는 1963년 8월말에 펼쳐진  제1차장춘음악주간에서 합창 《싸우라 흑인형제》중의 독창부분을 열창해 소문을 놓았다. 당시 중앙인민방송국에서는 이 노래를 특별록음했고 국제방송프로에서는 가사내용을 6가지 언어로 번역하여 방송했으며 연변에서는 또 중앙지도자들이나 중요한 외국손님을 영접할 때마다 이 합창을 무대에 올리였다.

그후의 나날에 림성호는 가극에 출연하고 독창을 부르는외 판소리, 서도민요 등 민족음악을 배우기도 하면서 조선민족의 우수한 성악가로 성장할수 있는 기반을 착실하게 닦아나갔다.

동란의 년대에 애착하는 노래도 마음껏 부르지 못하던 림성호는 1978년에 와서야 다시 특유한 남저음독창으로 무대에 나설수 있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그는 새봄을 맞는 기분으로 외국가요, 조선민요며 연변노래들을 실컷 부르면서 노래인생을 아름답게 장식해나갔다.

1979년, 연변가무단에서는 공화국창건 30돐을 맞으면서 전국문예콩클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림성호는 그번 공연에서 독창 《연변인민 주총리를 그립니다》를 불러 장내를 눈물의 바다로 만들었고 《까투리타령》 등을 불러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뒤이어 산서성 태원시에 가서 펼친30일간의 공연에서도 림성호의 독창은 거의 번마다 련속 6수까지 불러야 할 정도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태원TV에서는 림성호가 부른 노래 7수를 곁들인 특별프로를 제작방송하기도 했다.
    
1981년에 있은 제2차장춘음악주간에서 림성호는 《볼가의 배노래》 등 노래를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고 1984년 길림성예술단의 성원으로 조선방문공연에 참가했을 때는 《조선은 하나다》 등 조선가요를 불러 조선관중들의 절찬을 받았다.

1985년 11월,  20여명 중국조선족들로 무어진 예술단의 일원으로 미국방문공연을 떠난 림성호는 그번 공연을 위해 전문 창작된 노래 《반갑구나》를 부르면서 미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과 한마음이 될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크게 환영을 받았다.      

연변라지오TV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ㅡ한국대학씨름련맹 홍보대사 왕실이녀사 인터뷰 백번이고 천번이고 넘어져도 /일어서는 오뚜기처럼 산다면/ 무서울게 없다/ 여기저기 부딪히며 살아가는 우리 인생/ 안다리가 들어온다/ 잡채기로 받아라/ 으랏차 하 ~ 으랏차차/ 절망은 없다/ 뒤집기 한판으로 폼나게 살아보세… 6월18일 오전, 연변대학체육관에서 펼...
  • 2007-06-18
  • "단순히 제품을 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후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중국 소비자들이 크게 만족하고 있습니다."   웅진코웨이 중국 베이징 전시장에서 만난 최영미(26세·사진)씨는 조선족 3세로 웅진코웨이 중국법인에서 근무하는 코디 1호 팀장이다. `코디`는 `웅진코웨이 레...
  • 2007-06-18
  • 김은선(36세)교원은 장춘시 관성구조선족소학교 과학학과 교원이다. 15년간 그는 맡은바 사업은 물론 학교사업에 묵묵히 심혈을 기울여왔다. 실천활동으로 학생들의 종합능력을 김은선교원은 《백번 듣기보다 한번 실천하는것이 낫다》며 자연학과를 가르칠 때에도 수업때마다 학생들에게 실천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 2007-06-14
  • 금년 5월까지 중국에서 13년째 생활하는 우동석(화장품대리상)사장은 중국친구들과 자유로이 인터넷채팅을 할 정도로 한국인들이 부러워하는 《중국통》이다. 《제가 갓 북경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해도 북경에는 한국인들이 기껏해야 천명도 안 되였지요. 헌데 지금 10만명도 훨씬 넘긴다니 정말 상상하기조차 어렵군요!》...
  • 2007-06-14
  • ‘방실방실 웃음짓네 빙설속에 웃는 얼굴 연분홍 진달래꽃…’ 9일 오후 5시경 흑룡강성TV방송국 ‘우리 촌에도 문예인이 있어요’ 프로 방송실, 흰저고리에 붉은 치마의 한복을 받쳐입은 녀인이 ‘진달래’를 부르고 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민족적 정감이 넘쳐 흐르는 노래...
  • 2007-06-13
  • 음악에 죽고 음악에 산다 김기철 1962년생 장춘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 근무 중국MIDI기술연구회 회원 중국사회음악연구회 회원 길림성기타협회 비서장 장춘시음악가협회 회원 장춘시조선족군중예술관의 김기철씨가 자신의 풍격음악공작실을 시작한것은 2005년 태양이 뜨거운 7월이였다. 그가 작곡, 편곡, 록음, 후기제작을 일...
  • 2007-06-12
  • 룡정시 조양천진 근로촌 당지부서기이며 촌장인 의봉민은 촌민들을 이끌고 사회주의 새농촌건설을 다그치여 근로촌이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괄목할만한 성과들을 거두었다. 농업 산업화와 기계화로 농업발전을 추진 근로촌은 6개 자연마을에 2200여명 인구가 있는데 수전면적이 경작지면적의 70퍼센트 이상인 수전농사 ...
  • 2007-06-11
  • 해볕 유난히 화사하고 하늘 류달리 푸르른 지난 5월 31일, 교내운동회를 맞은 장춘시 쌍양구조선족학교의 사생들은 명절이여서 기뻤고 또 장춘시 기업가 황일동씨로부터 6.1선물로 5000원을 받고 흥분했다. 황일동씨와 이 학교 사생들과의 인연은 한해전에 시작되였다. 다년간 해외로무회사(원 길림성금정경제무역유한회사,...
  • 2007-06-07
  • 한국로무생활에서 꾸준히 준비해 고향에 돌아온후 장백산아빠트단지서쪽켠에 《본창왕솥뚜껑》불고기집을 개업, 제법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있는 동철수(41살),김현숙(39살) 부부는 《기회는 준비된자에게만 찾아온다》고 말한다. 화룡시합성판공장에서 월평균 60여원의 로임을 받으며 어렵게 생활한던 동철수, 김현숙 부부는...
  • 2007-06-06
  • 6월 1일 오후 아프리카 케니아 나이로비의 대통령궁에서 조선족민요 《도라지타령》이 은은히 울려퍼졌다. 이날은 자치정부수립 기념일로 케니아 최대의 경축일. 나이로비 빈민가 아이들로 구성된 지라니어린이합창단은 이날 므와이 키바키 대통령 부부와 각국 대사, 유엔 관계자 등 케니아의 내외 귀빈 5000여명에게 감동을...
  • 2007-06-0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