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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시련을 이겨낸 훈남아나운서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4월8일 13시44분    조회:6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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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TV방송이나 연변위성방송을 애청하는 시청자들은 누구나 다 훈남아나운서 김광호에 대해 잘 알고있을것이다. 지금까지 9년간 날마다 《연변뉴스》를 통해 시청자들과 대면한 김광호아나운서는 《연변뉴스》이외에도 《위성뉴스》, 《뉴스화제》 등 프로그램을 통해 연변의 크고작은 소식들을 전국의 방방곡곡에 알리고 또한 생방송프로그램 《사랑으로 가는 길》을 통해 연변인민들의 따뜻한 마음을 빈곤학생들에게 전달하고있다. 

김광호아나운서는 데뷔 15년에 나는 아나운서지만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가짐으로 배움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갈고 닦은 덕에 2년 련속 연변라지오TV 10대 수석아나운서사회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받아안았다.         

소시적 꿈은 정의로운 경찰

화룡시 남평진 신흥동에서 태여난 김광호는 소학시절 랑독을 특별히 잘했는데 각종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일정한 성적도 거두었다. 거기에 운동까지 잘하여 학교운동회는 물론 공사운동회의 장거리달리기에서도 꼭꼭 등수에 오르군 하였다. 다방면에서 재주를 발휘한 덕에 학생시절 그는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 시절 그의 제일 큰 꿈은 아나운서와는 거리가 먼 공안대학에 가는것이였다. 그래서 공부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시적 꿈은 고중시절까지 쭉 이어졌다. 하여 대학입시에 첫지망으로 공안대학을 적어넣었지만 아쉽게도 경찰꿈을 접어야 했던 김광호는 자신의 출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라디오를 청취하다가 화룡TV방송국에서 남자아나운서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한번 도전해보고싶은 생각이 든 그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 등록하였다. 그런데 등록하면서 보니 전 주 각지에서 온 지망생이 근 250여명이나 되였다. 시험을 보면서도 꼭 합격될것이라는 신심을 별로 가지지 못했지만 그는 차분한 마음으로 랑독을 했고 카메라시험촬영도 했다. 김광호는 그번 시험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걷게 하는 계기로 될줄은 생각도 못했다.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

집으로 돌아온지 일주일되던 날 막 점심식사를 하려는데 배달부아저씨가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화룡TV방송국 아나운서시험에 통과되였다는것이였다. 곧 데리러 오니 이불짐을 싸고 준비하라는것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전전긍긍하는중이였는데 시험에 합격되였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온 집식구는 숟가락을 놓은채 한참이나 넋놓고 앉아있었다. 1994년 3월, 김광호는 부푼 심정으로 화룡TV방송국에서 아나운서생애의 첫걸음을 떼였다. 첫방송으로 일기예보를 하였는데 그렇게 짧은 시간이지만 처음 하는 방송이라 너무나 긴장하였다. 출근한지 한달만에 단위에서는 그를 연변TV방송국으로 학습을 보냈다. 연변TV방송국에서 그는 서방흥선생, 김계월선생을 비롯한 많은 선배들로부터 허심히 가르침을 받았다. 신인인 그한테는 모두가 좋은 스승이였는지라 될수 있는한 방송하는것을 직접 들었는가 하면 짬만 나면 열심히 련습을 하였다. 

하지만 아나운서로 되기가 결코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정확한 발음법과 억양의 높낮이, 맞춤한 끊기 등 화술의 기교를 익히기가 정규적인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광호에게는 너무나 높은 벽이였다. 그럼에도 또한 꼭 넘어야 할 벽이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운동도 장거리를 좋아한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인 광호는 “요만한 난관을 헤쳐내지 못하고서야 어찌 험난한 인생의 길을 걸어간단 말인가? 농민의 자식인 내가 이렇게 좋은 기회에 성공못하면 평생 땅과 시름해야 한다. 나에게는 후퇴의 길이 없다. 더구나 나한테는 부모님이 물려준 좋은 목소리가 있지 않는가?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열심히 하는거야”라고 마음먹었다.

그는 선배아나운서들의 방송록화를 따라가 보는가 하면 그 장면들을 빠짐없이 록화하여 방송진행솜씨를 배우기도 하였다. 날마다 같은 발음을 하는데 지루할법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밤늦게까지 거울에 마주앉아 한번 또 한번 낮에 배운것을 련습해보았다. 쇠공이도 갈면 바늘이 된다고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는 그한테 선배들은 “앞으로 꼭 훌륭한 아나운서가 될것”이라고 칭찬하며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한달간의 학습을 통해 드디여 카메라앞에 앉아 프로를 진행할수 있게 되였다.

화룡TV방송국에 돌아온 김광호는 곧바로 TV뉴스프로를 맡게 되였고 또 라디오방송의 여러개프로도 방송하게 되였다. 방송을 하면서도 그는 배움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언제나 타방송국의 프로들을 시청하면서 우점들을 따라배우는것으로 내공을 쌓았다. 또한 실무수준을 제고하기 위해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지망해서 본과과정을 마치기로 했다.

새롭게 느낀 “마이크독”

화룡TV방송국에서 어언 1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2001년 4월, 그에게 새로운 도전의 길이 펼쳐졌다. 연변TV방송국의 아나운서부 설상순주임이 전화로 “시간을 내서 한번 오라”는것이였다. 연변TV방송국에 가니 남자아나운서를 모집하는데 그더러 시험을 보라고 하는것이였다. 시험촬영을 끝내고 화룡에 돌아온 그에게 얼마 안되여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이로써 그는 연변TV방송국에 차출되여 근무하게 되였다. 3개월간의 실습기한을 가진 김광호는 설상순, 리혜자 등 선배들한테서 열심히 배우는 한편 목이 쉬도록 련습을 하였다.

3개월후 실습을 마친 그는 또다시 일기예보로 새로운 일터에서의 첫발을 떼였다. 짧고 간단한 일기예보였지만 연변을 상대로 한 방송이라고 생각하니 책임감이 느껴지면서 어쩐지 긴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제야 진정으로 일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런데 일기예보는 새벽에 록화하기에 습관되지 않았던 그는 두번이나 제시간에 나오지 못하고말았다. 결국 선배아나운서들이 대신 해주어 방송사고는 면했지만 따가운 눈초리는 피면하지 못했다. 그후부터는 꼭꼭 자명종을 놓고 자는 습관을 키우게 되였다.

방송국에서는 실습기간이 지난후에 확정짓지 않고 그에게 두달간 더 실습하라고 지시하였다. “왜서일가?”는 생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시간을 더 주는데 대해 너무나 고맙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는 닫는 말에 채찍질하듯 피타는 노력을 하였다. 결과 그는 무난하게 실습을 마치고 오매에도 하고싶었던 뉴스프로를 진행하게 되였다.

처음 《연변뉴스》를 진행하던 날을 김광호는 지금도 잊을수 없다. 그때 그는 리혜자아나운서와 함께 뉴스프로를 진행하게 되였는데 처음 하는 그에게는 방송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럼에도 록화를 마치고나서 보니 책상우에 손을 놓았던 자리에 땀이 흥건히 배여있었다. 고도로 긴장했던 그는 자신이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쉼표를 어디에 주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이미 10여년의 방송경력이 있는 자신이 그토록 떨렸던것을 두고 “연변을 상대로 한 방송이여서인지 많이 긴장되였다. 마이크가 독이 있다는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다행히 한곳도 틀리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몇달후 《국내외뉴스》프로를 진행하게 되였는데 더욱 어려움이 있었다. 지명, 인명이 복잡하여 조심해야 되는데다가 눈으로 화면을 보는 한편 원고를 보아야 하며 귀로 내용을 들으면서 속도를 조절해 방송을 해야 했기에 그에 따르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김광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차 방송에 적응할수 있었다.

2006년 6월 한국KBS본사로 연수를 가게 된 김광호는 직접 KBS아나운서들과 함께 라디오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좋은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수석아나운서의 주렁진 열매

연변TV방송국으로 전근한 김광호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재간을 맘껏 발휘하고 또한 주렁진 수확을 거두게 되였다. 그는 《연변뉴스》를 진행한 이듬해인 2002년 7월 제7기전국조선어TV방송우수프로로 3등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받아안았다. 그후 해마다 《연변뉴스》를 잘 진행하여 국가, 성, 주로부터 상을 받게 되였는데 작년만 해도 TV방송 국가급 3등상, 성급 1등상, 주급 1등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뉴스프로뿐만아니라 문예야회진행에도 재주가 있었다. 2007년도에는 음력설야회 《해맞이 봄맞이》의 진행으로 제7기백가TV문예프로평의에서 TV종합문예 1등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받아안았다. 뿐만아니라 금년에도 음력설야회의 사회를 맡아 매끄럽게 진행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다년래 선진개인, 선진사업자, 특수공헌자 등으로 당선되였고 작년과 금년에는 2년 련속 연변라지오TV 10대수석아나운서로 당선되였다. 연변라지오TV 10대 수석아나운서사회자는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본국에서 본국의 81명 아나운서, 사회자에 대해 일상사업정황, 단위동료들의 평가, 현장실기측험, 전문가 및 업계인사들의 종합평가 이렇게 4개 종합평의를 거쳐 선발하는것이다.

마음이 훈훈한 사회자

“〈사랑으로 가는 길〉생방송중 모니터로 금액이 올라갈 때면 정말 기분이 좋다. 일하는 보람을 느낀다”고 털어놓는 김광호의 표정은 뉴스프로에서 본 그와 사뭇 다르다. 

3년째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은 그는 “생방송으로 된 방송이기에 언제나 정신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진행을 하지만 불쌍한 애들의 사정을 보면 어느새 눈물이 고이군 한다. 특히 아들이 태여난후로는 더구나 가슴이 찡해난다. 방송을 잘 진행하여 불쌍한 애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싶다”며 가난한 애들의 정황을 대중들에게 보다 더 잘 알리기 위해 애쓰고있다. 

이토록 그가 알심들여 진행하는 프로그램 《사랑으로 가는 길》은 사회각계에서 지지와 인정을 받고있다. 그는 이 프로그램 사회를 잘 진행하여 2007년에는 제12기조선어TV방송작품평의에서 3등상을 수상했고 제19기길림성단정학 1등상을 수상했으며 2008년에는 중국민족언어TV프로그램 “금붕상”특집프로 3등상을 수상했고 2년 련속 성과 주로부터 사회교육상 1등상을 수상하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아들한테는 말 많은 아버지

뉴스프로를 많이 진행하여서인지 모두들 김광호를 말수가 적다고 여긴다. 어쩌면 아들이 태여나기전까지는 정말 말수가 적었던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아들이 태여나서부터 자신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졌다. 그래서인지 아들 김수현은 다른 애들보다 말을 빨리 배웠고 제법 재미나게 했다. 이제 겨우 3돐이 되여오지만 어른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말을 잘한다. 그래서 이웃에 사는 할머니가 늘 “남자애인데 우리 손녀보다 말을 더 잘한다. 아마도 아빠가 아나운서여서 말을 잘하는것 같다”며 입버릇처럼 외우신다.

어린시절 말수적은 무뚝뚝한 아버지가 어지간히 어려웠던 김광호는 자신의 아들한테는 대화가 잘 통하는 아버지로 되고싶었다. 그래서 아들과 많이 대화하고 잘 놀아도 준다는 그는 아나운서인것만큼 아들한테 언제나 표준말을 쓴다고 한다. 

친구가 많은 김광호는 모임이 많아서 늘 밤늦게야 귀가하군 하였다. 결혼하여서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이 태여난후로는 술마신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일부러 술자리를 피하고 제시간에 퇴근하게 된다는 그는 “5층까지 어떻게 올라가는지 모른다. 아들이 쪼르르 달려와 문을 열어주는 재미에 힘든줄 모르고 한달음에 올라간다”며 환히 웃었다.

사업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아직도 미숙한 점이 많아 앞으로 모든 쟝르의 프로그램을 원활하게 진행할수 있는 아나운서 사회자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싶다는 김광호에게는 또다른 꿈이 있었다. 바로 방송에 관한 책을 쓰려는것이다. “뭔가를 남기고싶다”는 생각에서 이미 준비하고있다는 그가 수석아나운서답게 한차원 높은 훌륭한 책을 써내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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