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직업은 대학교수, 음악리론연구생을 전문 양성하는 예술학준박사이다. 그럼에도 천성적으로 외줄타기를 싫어하는 그는 음악분야만이 아닌 전반 문화사업에 흥취를 가지고 문화를 바탕으로 한 여러가지 사업에 몸을 담고있으며 최근년에는 연변TV의 《문화광장》프로그램을 능란하게 사회해나가면서 시청자들에게 짙은 문화적향수를 안겨주고있다.
어쩔수 없이 선택한 음악인생
《중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들은 제가 장차 리과를 전공할 사람이라고 했고 친구들은 문학을 전공할 사람이라고 했어요.그런데 저는 기대와는 틀리게 음악을 선택했구요.》 이것은 남희철씨가 당시 어쩔수 없이 음악인생에 몸을 담게 된 전후사연을 터놓으면서 고백한 말이다.
1958년, 길림성 반석현의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남희철씨는 어려서부터 굴곡적인 인생을 살아왔다. 외가의 성분이 나쁜데다 가까이 살고있는 친척까지 력사문제가 있어서 군대에 나가지 못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며 로동자모집에 추천받지 못한다는 딱지를 붙이고 자랐으니 말이다.
전도가 암담하기만 했던 그 나날에 남희철씨는 《수호전》 ,《삼국연의》 등 당시 황색서적이라며 읽지 못하게 하는 소설책들을 몇백권 감추어놓고 그것들을 한권씩 읽어보는것으로 하루하루를 흘러보냈다. 차츰 소설에 매료된 그는 소설책에 가위를 씌워가지고 수업시간에도 읽었는데 때로는 선생님에게 들켜 아까운 책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학교서기까지 나서서 황색서적의 위해성을 비판하는 대회에서 발언을 하게 하고 《모택동선집》을 선물했을가?!
고중에 올라간후 남희철씨는 출로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남들은 참군, 진학, 로동자모집 등 경로를 거쳐 앞길을 개척해나갈수 있는데 한평생 땅과 씨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 년대에도 체육이나 음악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가정배경과는 상관없이 출세할수 있었다.그런 행운아들을 부러워하며 억울한 신세를 한탄하던 그는 부지중 자기도 이 방면으로 발전하면 농촌을 벗어날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이렇게 선택한것이 음악이였다.
그런데 정작 음악에 살손을 붙이자고 하니 도대체 악기연주를 배워야 할지 작곡을 배워야 할지 결단을 내리기 힘들었다.학교에 하나뿐인 손풍금을 가지고 장난하면서 한동안 실천해보고서야 성공할수 있는 지름길은 작곡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그는 고중2학년때부터 의식적으로 작곡과 접촉하기 시작했다.우선은 어디에 스승으로 모실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밤중에라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모처럼 얻어들인 리환지의 《가요작곡법》을 부지런히 뒤적이는 한편 자기절로 가사를 써서 작곡련습에 땀동이를 쏟았다.그 보람으로 고중졸업전야 그가 작곡한 가요 3수가 한꺼번에 길림시 대중문예간행물에 실리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남희철이 작곡을 한다는 소문이 나서 크고작은 문예콩클때마다 작곡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여러가지 작곡강습반에 참가하여 확실하게 배울수 있는 기회가 차례졌다.그런 와중에 길림시방송국에서 사업하는 조선족작곡가 최차식선생님을 알게 된 그는 또 댁에까지 찾아가 며칠씩 묵으면서 열심히 배웠다.
뜻이 있는 사람에게 길이 나지는 법이라고 그즈음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여 누구나 평등하게 시험을 쳐서 대학에 들어갈수 있게 될줄이야?! 이것은 평생 대학대문에 발을 들여놓을수 없게 된것으로 락심천만하던 남희철에게 있어서 더없이 기쁜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는 당장에서 길림시문화관에 취직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남개대학을 목표로 대학입시에 참가하였다.
그가 시험성적이 발표되기만을 손꼽아기다리던 어느날,난데없이 연변예술학교 작곡전업에 들어가 공부해보지 않겠는가 하는 제의가 들어왔다.《문화대혁명》후 처음으로 동북3성에서 학생을 대량 모집하게 된 연변예술학교가 길림지구에 내려와 전도가 유망한 젊은이들을 물색한다는것이였다.그때까지만 해도 웅대한 포부는 운운하지도 못하고 농촌을 벗어나는것이 제일 간절한 소원이였던 그는 희망이 묘연한 대학입학통지서를 기다리는것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농촌을 떠나는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렇게 길림에 가서 예술학교지망생들을 상대로 꾸리는 학습반에 참가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에 통과되여 끝내는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길에 들어섰다.
젊음을 자랑하던 시절
1978년 봄,오매에도 그리던 배움의 전당에 들어선 남희철씨는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부지런히 음악리론을 학습하면서 보다 많은 지식을 장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시절 공부외에 청춘의 매력을 자랑할수 있는 활무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학생회의 사업이였다.당시는 정상적인 교수질서가 제대로 회복되지 못한데다 신입생수가 부쩍 늘어난데서 혼란스러운 구석이 많았다.해당부문의 추천으로 학생회 회장직을 맡게 된 남희철씨는 믿음직한 학생들로 회장단을 뭇고 학생들에 대한 사업을 실속있게 밀고나가면서 교내기풍을 바로잡아갔다. 학생회의 노력으로 학교의 면모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그런데 길림지구에 살면서 경상도방언에 습관되였는지라 그가 입만 뻥긋해도 주변에서 폭소가 터지기 일쑤였다. 한번은 학생회 간부들과 함께 2층 복도를 지나는데 조옥형씨를 비롯한 몇몇 녀학생들이 《남도치야, 남도치》라고 수군댔다.그때까지 《남도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던 남희철씨는 그녀들이 자기 이름을 《도치》로 잘못 기억했다고 착각하고 다가가서 무슨일이냐고 정색해서 물었다.울며겨자먹기로 없는 일을 엮어가느라 진땀을 빼던 그녀들은 남희철씨가 멀리 사라지는 순간 배꼽을 잡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연변예술학교와 연변사범대학에서 6년간 공부하면서 음악리론에 빠져버린 그는 작곡보다는 음악리론학습에 더 열심했다. 이것은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상해음악학원에서,1997년부터 1998년까지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음악학을 전공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였다.그리하여 그는1998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종옥부주석의 배려로 1년간 배운 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는 규례를 타파하고 예술학준박사학위를 따내였다.
음악교육가로서의 남희철씨는 장기간의 사업에서 음악리론교수에 남다른 심혈을 몰부음으로써 중국조선족대학 음악교육력사상 처음으로 석사연구생양성권을 획득하고 연변대학 음악학과의 첫 연구생도사로 되였으며 《서양음악사》,《음악미학》,《조선민족음악사》 등 과정을 개척하였다.이외 한국 단국대학의 초빙교수로 활약하는 그는 또 서울대학, 동국대학, 리화대학 등 한국의 여러 대학교들에 초청받아가 강의하기도 했다.
음악리론가로서의 남희철씨는 또 《중국조선족소년아동예술》,《조선민요의 선률양식 및 발전수법》 등 저서를 집필하고 《20세기중국조선족음악문화》,《중국조선족가요대전》,《중국조선족동요대전》 등의 주필을 맡았으며 《중국조선족통사》,《중국소수민족예술론》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이밖에 그는 7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여 해내외에서 주목을 끌었는데 그중 음악평론 《민족혼을 살린 악곡》은 《동북기악창작리론연구회》에서 우수평론상을 타고 《소수민족민간음악을 신중하게 대해야》는 주정부로부터 《진달래상》을 수여받았으며 《조선민족민가환두형식연구》는 연변사회과학원으로부터 《새천년문학예술상》을 수상하였다.
《욕심》많은 일상
세상사람들을 할일이 없는 사람,일을 하고싶어도 못하는 사람,한가지 일만 잘하는 사람 ,여러가지 일에 적응하는 사람 등 4개 부류로 분류한다면 남희철씨는 달갑게 마지막 부류의 사람으로 되려 한다.
천성적으로 외줄타기를 싫어하는 남희철씨는 대학시절에는 음악을 전공하면서도 음악밖의 공부에 열중할 때가 푸술했고 사회에 진출해서는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도 교육외의 사업에 퍼그나 많은 정력을 몰부어왔다.하기에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 부원장,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학부 학부장 등 직무를 수행하는 기간에도 련속 2기나 주정협 상무위원으로 지내면서 모범위원으로 활약하였고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부회장,연변조선족문화발전촉진회 부회장, 한국민속예술연구원 상무고문 등 여러가지 사회직무를 짊어졌으며 지금은 교수와 연구생양성까지 겹친 드바쁜 몸이지만 연변동북아예술연구원 리사장, 연길시윤 성형미용병원 리사장까지 맡고 팽이처럼 돌아치고있다.
남희철씨는 음악인이면서도 음악이란 테두리를 벗어나 전반 민족문화에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의 리론연구성과를 대중들이 접수할수 있는 문화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경주해오고있다. 그가 책임편집을 맡은 대형음악계렬특집 《우리 노래 50년》이 그 실례로 되는데 이 작품은 2002년에 연변TV에서 방송되여 길림성라지오텔레비죤방송작품 1등상을 따내는 영예를 안아왔다.
중앙TV 제12방송의 《도라지》,제3방송프로의 《아리랑》 등 프로에도 등장하여 조선족을 전국에 선전하는데 기여를 한 그는 또 한국KBS방송의 특집프로에도 여러차나 등장하여 중국조선족의 음악생활을 널리 소개하였다.그는 또 1996년과 2004년에 《연변일보》의 특약기고가로 되여 많은 우수한 단평들을 써냈는데 그중 단평 《방법은 꿈을 향한 사다리》는 1996년 대학시험문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6년부터 연변TV 《문화광장》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은 남희철씨는 최근에 와서 우리 민족의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작곡가,미술가,예술가,극작가,력사학자,문예리론연구가,음악교육가,외국인기업가 등을 소개하면서 대중들의 문화생활을 보다 풍부히 하는데 적극 기여하고있다.
금방 지천명의 고개에 올라선 남희철씨에게 있어서 요즘 들어 제일 흐뭇한 일은 성장한 아들과 남자 대 남자로 대화할수 있게 된것이라고 한다.대학교 4학년생인 아들이 인젠 아버지에게 제법 인생상담도 요청해오고있다고 하니 그럴법도 하다.
꿈이 많던 대학 3학년때 전도를 두고 우왕좌왕하던 아들은 어느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와 《인간이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기본은 무엇인가?》고 문의해왔다. 그때 남희철씨는 당장에서 《성실성,책임성,지구성,친화성》 네가지라고 귀납해주면서 지금부터 성실하게 일하고 용감히 책임을 짊어지며 꾸준히 노력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인도해주었다.
《장차 남자로 멋있게 살아가자면 꼭 필요한것이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제기했을 때에도 그는 《돈,권력,학벌,재간》 네가지를 꼽고나서 《돈이나 권력은 있다가도 없어질수 있지만 애써 공부해서 얻은 학벌이나 갖고있는 재간은 누가 앗아갈수도 없는것이 아니냐? 그러니 앞의 두가지보다는 뒤의 두가지를 갖추기에 진력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었다고 한다.
교수에 리론연구,TV프로사회 등 《욕심》많은 인생을 살아가느라 퍼그나 분주한 남희철씨가 금후에도 우리 민족의 문화예술사업을 위해 보다 큰 성과를 이룩하기를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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