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작곡가 고창모-숙명적인 음악의 길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5월12일 10시32분    조회:867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20여수의 히트곡을 만들어낸 대중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작곡가 고창모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모든것이 운명적이였다. 음악의 길을 선택하게 된것도, 사랑하는 안해를 만나게 된것도, 연변에서 작곡생활을 하게 된것도… 

청춘을 문화대혁명이란 특별한 시대에 보내게 되여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는 결코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노력하는자에게 길이 따른다고 하냥 생활에 충실하였던 그에게 운명은 가끔 좋은 기회를  주었고 지혜로왔던 그는 한번도 기회를 놓친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 사업의 성과도 행복한 가정도 움켜쥘수 있었다.
                                                                                              
운명적인 길 음악


고창모가 작곡의 길을 걷게 된것은 아주 운명적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음악에 대해 접촉한것은 아주 어려서부터였다. 한때 쏘련 해삼위의 한 가무단에서 바이올린수로 계셨던 아버지께서 바이올린을 잘 켰던것이다. 아버지의 구수한 바이올린소리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고창모는 음악에 대한 리해가 남달랐다. 중학시절에 이미 클라리넷이나 드럼벳을 능란하게 다루었고 중학교때는 이미 자체로 작곡할수 있었다. 이렇게 작곡에 뛰여난 재주가 있음에도 그는 종래로 작곡가로 되고싶다는 생각을 가진적이 없었다.

흑룡강성 계동현에서 태여난 고창모는  3살나던 해 아버지를 따라 밀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밀산에서 소학교, 중학교를 마친 그는 문화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고중 1학년을 마치고 부득이 학교를 그만둘수밖에 없었다. 

18살되던 해 고창모는 밀산동전소학교에 음악교원으로 들어갔다. 당시는 크고작은 범위의 문예공연이 아주 잦았다. 그때로부터 그의 음악창작은 시작되였다. 그는 문예공연에 참가할 때마다 직접 곡을 써서 손수 련습까지 시켰다. 제일 인기가 좋았던것은 본보기극을 우리말로 만들어서 표현한것이였다. 그래서 공연에 참가할 때마다 1등은 찍어놓은 당상이였다. 사업에서 성과는 있었지만 민영교원이라는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1973년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자 고창모는 고시준비를 하였다. 학생시절에 수학을 특별히 잘했던 그는 수학전업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한때 쏘련에서 사업했던 아버지때문에 “정치문제”에 걸려 시험자격을 가질수 없었다. 한참 고민하고있을 때 그는 음악, 미술, 체육 등 특장반은 “정치문제”를 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었다. 워낙 음악에 재질이 있었던 그는 인차 할빈사범대학 예술계 작곡전업에 지원하였다. 이미 7년이나 초생이 없었던 탓에  시험치려는 학생이 엄청 많았다. 밀산에서만 4000여명이 작곡반에 지원하였다. 이미 어느정도 작곡에 물이 올랐던 그는 나흘간의 시험을 거쳐 결국 4000 : 1이라는 엄청난 비례를 뚫고 밀산에서 유일하게 할빈사범대학에 입학하였다.

작곡가로 되겠다는 꿈을 가진적이 없었던 고창모였지만 음악에 뛰여난 재주를 가진 그가 아까와서인지 운명은 그에게 음악의 길을 내주었던것이다.

운명적인 만남 동반자

할빈사범대학에 입학한 그는 그제야 정규적으로 작곡을 배우게 되였다. 그때는 주로 한족음악을 창작하였다. 전 학급에서 그는 유일한 조선족이였다. 흑룡강성이라지만 400여호되는 조선족마을에서 자랐던 그는 한어말수준이 아주 낮았다. 그럼에도 그의 작곡수준은  그 누구보다도 뾰족하였다.

꿈은 아니였지만 한시도 멀어져본적 없는 음악이였기에 그의 대학생활은 활기에  차넘쳤다. 대학에서 여러가지 활동이 많았는데 한어말이 차해서 애먹는 그에게 유독 언어가 잘 통하는 처녀가 있었다. 그녀가 바로 그의 인생의 동반자 김명옥이였다.

당시 성악학부를 다닌 김명옥은 룡정에서 태여났지만 매하구에서 학생시절을 보내고 내몽골에서 일하다가 역시 수천명을 제치고 성악학부의 유일한 조선족으로 입학하였다. 학교행사때마다 만나면 둘만 조선족인지라 가족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던 두 사람은 자연히 련인사이으로 발전하였다. 한사람은 작곡, 한사람은 성악, 천생연분이 아닐수 없었다. 이렇게 운명은 그에게 천사같은 동반자를 만나게 해주었다.

졸업후 고창모는 밀산예술단(한족예술단임)의 창작 겸 악대지휘로 배치받았고 김명옥은 몽골사범학교 성악교원으로 배치받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3년간 견우직녀생활을 해왔다. 후에 밀산예술단에서 김명옥을 성악배우로 초빙하려 하였지만 그렇게 되면 두 사람 다 공연다니게 되여 불편함이 많았다. 결과 김명옥은 1977년도에 밀산조선족중학교의 화학교원으로 전근하고 결혼식을 올려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1979년에 오상사범학교에서 음악반을 꾸리게 되자 그들부부를 교원으로 초빙하였다. 정식으로 가사에 작곡하여 발표하게 된것은 이때로부터였다. 가히 처녀작이라고 말할수 있는 노래 《언약》은 그들부부의 합작품이였다. 안해가 작사하고 그가 작곡한 노래 《언약》은 농망기인 벼모철 공부하러 떠나는 총각이 자기를 바래주는 처녀에게 하는 약속으로 당시 사회를 잘 반영한 노래였다. 이 노래는 1980년 흑룡강조선말방송에서 첫방송되였는데 지금도 중앙방송에서 가끔 방송된다.

이외에도 안해와의 합작곡이 여러수 있는데 그중에서 《달님은 내 사랑》은  흑룡강조선말방송의 “내가 즐기는 노래”에 선정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맺어진 부부이면서도 손발을 맞추어 일할수 있는 환상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운명적인 선택 연변

무슨 일에서든지 긍정적인 사유를 가지고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는 고창모는 또 한번 운명적인 선택을 하였다. 

하루는 안해가 그에게 “우리도 조선족인데 조선족들이 사는 연변에 가서 살가요?”하고 제의하였다. 사실 그때까지 한번도 연변에 와본적도 없는 고창모였지만 단연히 안해의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결정하였다. 마침 연길시문화관 창작조에 사람이 필요해서 우선은 거기로 전근하게 되였다.

원래 생활이 곤난했던 고창모는 이사라지만 별로 갖고올것도 없었다. 홀몸에 아들 둘, 처와 장모까지 다섯식구가 무작정 연길행기차에 몸을 실었다. 조금은 허전한 마음도 있었지만 돈화까지 오자 기분이 묘하게 좋아졌다. 글쎄 기차에 조선족들이 많아졌고 또 방송도 조선말로 하는것이였다. 비록 어느 역에 도착했다고 알리는 간단한 몇마디였지만 그렇게 친근할수가 없었다. 가슴이 훈훈해났다. 때는 1981년 11월 7일이였다.

운명적인 기회 방송국

1984년 연변방송국 음악부 음악편집으로 있던 김용무(현재 예술학원 교원임)는 음악부 주임인 동희철작곡가에게 고창모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였다. 그가 작곡한 노래 《언약》을 들은적 있었던 동희철주임은 그를 만나보고 아주 만족해하면서 음악부에 받아들였다.

음악부에 전근한 고창모에게 새로운 창작의 길이 활짝 열렸다. 유명한 시인 석화가 두달전에 가사편집으로 전근하였던것이다. 그때로부터 두 사람이 손잡은 노래가 샘솟듯 출시되였고 그중에서 많은 노래가 연변인민들의 애창곡으로 불리웠다. 가수 김경자가 부른 《돌다리》, 가수 김응과 리정숙이 부른 《사랑은 영원히》, 가수 리철혁이 부른 《어머니 계신 고향》, 가수 김응이 부른 《누나생각》 등이 그때 지은 노래들이였다.

1987년 고창모는 연변TV방송국 문예부 부주임으로 임명되였는데 그해에 창작한 《월극과 경음악》은 전국창작 1등상을 수상하였고 그 이듬해 작곡한 유명한 노래 《두만강》(강홍수 작사)은 현재까지도 연변TV방송의 개시곡으로 방송되고있다.
그뒤 연변TV방송국 문예부 주임직을 맡고 사업하면서 자신이 작곡한 노래만 고집하지 않고 아주 공정하게 타인의 노래도 많이 방송하여 보급하였다. 하여 그때 《타향의 달밤》, 《타향의 봄》, 《교정의 종소리》, 《별과 꽃과 선생님》, 《무지개인생》 등 많은 연변노래들이 류행되였다.

이를 두고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회장이며 연변음악가협회 주석이며 원 연변가무단 단장, 현 연변가무단 명예단장인 박서성작곡가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고창모선생은 1989년후 연변음악예술에서 공로가 큰 사람이다. 또한 연변TV음악 창시인중의 한사람으로서 연변음악을 한층 높은 예술차원으로 오르게 한 아주 공정한 사람이다. 자기 작품만 고집하지 않고 타인의 우수한 작품을 보면 긍정해주고 같이 흥분해하며 많이 방송하여 대중들속에서 널리 보급되게 하였다. 음악편집으로서 자기 개인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 민족음악을 위하는 첫사람으로 꼽고싶다.”

고창모와는 개인적으로 면목을 안지 오래됐다는 박서성은 “같은 음악인으로 볼 때 일을 잘할뿐만아니라 솜씨가 잽싸다”고 말하고나서 “사람이 털털해서 부탁을 잘 들어준다”며 “다른 사람의 작곡부탁도 그렇고 연변가무단의 창작극, 무용극 등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밝혔다.

영원한 음악인

연변TV방송국에서 내부퇴직하면서 고창모가 하고싶은 일은 이미 작곡한 노래들을 정리해서 작곡집을 내는것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년 되도록 아직 시작도 못하고있다. 손댈 짬이 없었다. 북경조선족모임의 크고작은 행사의 문예공연에 참가하는 한편 조직해주어야 했고 각 소수민족축제에 참가할 곡도 써야 했으며 가끔은 연변가무단의 창작극이나 가무극도 도와주어야 했다. 요즘은 중앙방송국의 건국 60돐 경축 다큐멘터리 《영원한 기념비》의 프로기획과 예술지도로 바삐 보내고있다.

고창모는 “지나온 작품들을 다듬고 총화하고싶지만 언제까지 미룰지 모르겠다. 후년까지 일정이 꽉 잡혔다”며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작곡집을 낼것”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늘 바삐 보낸 인생이기에 가족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못한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두 아들은 부모로부터 유전을 받아 음악에 재주가 있음에도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음악을 선택하지 않았다. 특히 작은아들은 피아노연주가 뛰여날뿐만아니라 작곡도 아주 잘하여 고창모가 상해음악학원에 시험치라고 권고하였지만 대련에 있는 동북재정학원 금융학부를 다녔다. 큰아들은 연변대학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지금은 한국 MBC북경지사 촬영기자로 활약하고있다.

우리 민족예술문화를 위해 수십년 헌신해온 고창모는 연변음악에 대해 “예술의 고향으로 불리웠지만 지금은 중국을 상대로 보면 많이 떨어졌다”고 밝히고나서 “우리 민족의 고유음악과 연변의 원초적인 특점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연변특색을 살리는 면에서 차하다. 또한 보급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있다. 이것이 근년에 좋은 연변노래가 나오지 못하는 주요원인이 아닌가싶다”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또 연변음악의 앞으로의 발전에 대해 “제일 관건은 TV에 의거해야 한다. 음악프로(“가요무대”)를 개설하고 우리 노래를 많이 방송하여 모든게 거기서부터 선전되고 보급되여야 한다”고 밝혔다.

음악을 해야만 했던 운명적인 음악인 고창모, 아직도 민족음악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가는 그가 앞으로 좋은 곡을 만들어내고 훌륭한 작곡집을 출시하기를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변라지오영화TV방송국정신"의 창도자 실천자-록도부다년간 연변라지오영화TV방송국이 주직속기관 체육운동경기, 문예공연이나 혹은 각항 검사평의활동에서 언제나 앞장서는 활약적인 모습을 보이고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연변라지오영화TV방송국현상" 혹은 "연변라지오영화TV방송국정신&qu...
  • 2009-06-22
  • 전국무형문화재보호, 고적보호 및 문화박물사업걸출인물표창 및 증서, 현판발급텔레비죤전화회의가 12일 오후 길림분회의장소인 장춘시화상전화회의센터에서 있었다. 우리 민족악기제조장인 김계봉씨가 우리 나라 제3회국가급무형문화재항목대표적보유자로 선정,  농안현 황룡극보유자 조귀군씨와 나란히 최고명...
  • 2009-06-19
  • ㅡ연변주10대걸출청년, 연길시 6.1유치원 조미화원장의 사업담《하루를 살아도 초불정신으로 혼신을 유아교육사업에 바치리라!》 이는 10여년간 유아교육사업에 청춘을 바쳐온 연변주 10대걸출청년이며 연길시6.1유치원 조미화(39세)원장의 인생의  지조이다.  《령》 시작 탄탄한 기초 닦아 14년전, 유아사범전문...
  • 2009-06-18
  • 《어르신》...청도조선족들은 이렇게 부른다 청도소수민족경제발전촉진회 현귀춘부회장 만나본다 현귀춘  프로필: 1937년 5월 25일 조선 출생, 룡정시 해란촌에서 동년을 보냄. 1958년 할빈 전력대학을 다니던중 군입대. 선후로 국방대학 후근학원 지휘계 졸업, 고급경제사, 중국인민해방군 136사 후근부 부장, 해방군...
  • 2009-06-18
  • 중국땅의 태권도진흥 위해 뛰여온 3년원 재중한국인태권도협회 리유성회장 일찍 9살때부터 고향인 한국강원도 춘천에서 태권도 수련을 시작하여 장장 42년간 오직 한우물만을 파온 사나이ㅡ 미국 로스안젤레스에서의 태권도관운영을 거쳐 10년전 중국조선족들의 집거지 연길에 실로암태권도관을 차려놓고 현지인들한테 태권...
  • 2009-06-18
  • 부모라는 그 이름이 생겨날 때엔사랑이란 그 뜻도 담고 나왔다이 세상에 선량한 부모님들아불쌍한 애들에게 사랑을 주자……언제나 들어도 익숙한 노래이고 심금을 울려주는 노래다. 이 노래와 더불어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는 화면ㅡ연변TV련속극 《사랑의 품》, 이미 연변시청자들의 안방을 찾아 눈물샘을 자극...
  • 2009-06-16
  • 민족예술발전에기울인 기업인의 정성—칼마저장식슈퍼유한회사 소사국리사장을 만나지난 5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는 연변대학 민족예술발전촉진회 설립대회 및 민족예술발전기금 기증식이 있었다. 이날 기증식에서 연변대학에 100만원(해마다 10만원씩 10년에 나누어 기증함)의 성금을 후원한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 2009-06-15
  • 산재지역 민족출판의 새 장 열어갈터—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림영만사장을 만나흑룡강성의 유일한 조선민족출판사인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는 "동북아 최대의 중한--중조 이중언어 출판기지"로 거듭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산재지역 민족출판의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있다. 흑룡강인민출판사내...
  • 2009-06-15
  • [올해는 ‘6.15 공동 선언’발표 9년째가 되는 해이다. 남북의 두 정상이 굳게 손잡고 화해와 협력을 다짐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최근 남북은 오히려 2000년 이전의 대결 시대로 되돌아가는 악화의 길로 역행하고 있는 것 같다. 6.15 공동 선언은 분단 이후 남북 당국이 이루어 놓은 획기적인 성과이다. 비록 해...
  • 2009-06-15
  • “29년전 모델로 발탁… 아직 실감안나” 中 0.2위안 지폐에 실린 조선족 여성 소춘희 씨“벌써 오랜 시간이 지나 옛날 모습도 아닌데 인터뷰는 무슨….” 중국 지폐 중 2자오(角·0.2위안)짜리에 새겨진 두 명의 소수민족 소녀 중 오른쪽에 한복 저고리를 단정하게 입은 조선족 여성...
  • 2009-06-1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