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남희철, 활동반경은 어디까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0월28일 09시36분    조회:816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내가 남희철씨를 우연히 알게 된것은 연변TV 《문화광장》프로를 시청하면서부터였다. 재작년 6월인가 어느 토요일 아침,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연변TV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생소한 《문화광장》프로가 눈길을 당겨  대관절 어떤 프로인가고 궁금해 보게 되였다. 그래도 낯설기는 하지만 프로는 볼만 했고 진행(사회자)이 수준있게 프로를 끌고가서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사회자에 신경을 쓰는것은 사실 연변TV에는 많은 특집이 괜찮아보이는데 흔히는 사회자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은적이 많았다. 억지로 한국말을 본따는것부터 귀에 거슬리는데 때론 물어보는 말자체가 소학생물음같은 감을 주어서 연변이 이 수준밖에 안되는가고 실망이 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프로를 정말 잘봤다. 진행이 언어구사가 아주 자연스러웠고 프로 전반을 종심에로 끌고가는데 우리 민족문화에 대해 다시금 리해하는데 도움이 컸다. 그래서 방송국에서 이번엔 괜찮은 사회자를 찾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후에 알아보니 전문방송인은 아니고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음악리론을 가르치는 남희철교수(51세)였는데 석사생도사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아마 대학교수가 한두번도 아닌 정기프로의 진행을 담당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짚어져서 그 교수에 대한 관심이 슬그머니 깊어졌다.

내가 남희철교수를 만나보게 된것은 2007년 6월이였다. 중한수교 15주년을 맞으면서 한국방문길에 올랐는데 마침 우리 팀에 남교수도 들었다. 그와의 접촉에서 나는 보통내기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놀랐다.

교수가 어떻게 돼서 TV방송의 프로진행을 감당하는가 하는 나의 물음에 남교수는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이 음악을 접하는 경로가 엄청 늘었다. 이 공간을 외면하면 학자로서 스스로 올가미를 조이는것과 같다. 외면하지 말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매스컴을 리용하여 민족음악을 전파하고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넋을 심어가는것이 오늘의 자세라고 본다》고 말해서 참 옳은 생각이라고 짚어졌다.

사실 교수라고 하면 대학교 선생의 대명사라고도 할수 있고 강의위주, 학술연구형 학자이다. 이러한 나의 견해에 남교수는 한수 더 떠서 《옛날 교수들의 강의, 연구 위주의 행동반경은 너무 좁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는 전통방식이다. 오늘 매체활약이 거세찬데 그 엄청난 발전시장에 우리의 진지를 마련해야 한다》고 해석을 가했다.

듣고보니 일리가 있었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등 면의문제를 가지고 교수들이 매스컴에 등장해 리드하고있다. 그런데 우리 고장을 보면 좋은 대학이 있는데 지방사회와는 어쩐지 동떨어져 마치 담을 쌓고있는것 같다. 여기에는 두가지 즉  지방대학에 대한 지방사회의 중시와 리용이 부족한 반면 대학 또한 지방에 별로 낯을 돌리지 않는 문제가 존재하고있다.

보매 그는 음악이란 테두리를 벗어나 전반 민족문화에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의 리론연구성과를 대중들이 쉽게 접수할수 있는 문화상품으로 만들기에 노력을 경주하고있었다. 그 일례가 바로 《문화광장》프로를 꾸며가는것이였다. 2006년 5월에 시작된 이 프로를 남희철교수는 금년 2월까지 맡았는데 진행뿐만 아니라 후에는 취재와 대본창작까지 담당했다.

중앙텔레비죤 《중국민요》프로그램에서 조선족전통 노래와 춤을 소개하고있는 소연아나운서와 남희철교수(오른쪽)

임범송, 동희철, 허동활, 리영근 등 분들과 대담하는 가운데서 우리 민족 문학예술에 대한 그들의 끝없는 사랑, 투철한 정신세계와 강인한 의력, 민족의 넋을 반영하였다.

이에 앞서 2002년 길림성라지오텔레비죤 우수작품 1등상을 획득한 연변TV의 대형특집 《우리 노래 50년》은 그가 책임편집을 담당했고 2003년 CCTV 12채널, 3채널에 등장하여 《도라지》, 《아리랑》 등 우리 민요를 소개하고  중국조선족의 민족음악과 음악사를 전국에 알렸다.

특히 2009년 7월 CCTV 음악채널의 《민가중국》프로에 련속 4회나 등장해 우리 조선족의 민간가요를 소개하고 무용과 겸해서 현시대에 창작된 작품도 소개해 조선족사회를 놀래웠다.2007년 12월, 우리 민족의 노래를 집대성한 《중국조선족가요대전》, 이듬해 6월에 《중국조선족동요대전》이 출판되였다. 참으로 우리 민족사회에서 특기할만한 경사이다. 그런데 그 책을 살펴보니 주필이 다름아닌 바로 남희철교수여서 나는 또 한번 놀랐다.

강의할라니, 연구생을 지도할라니, 동분서주하면서 《문화광장》프로를 엮어갈라니 사람을 두셋으로 쪼개여 써도 모자라겠는데 언제 그 큰 일을 해냈단 말인가!

대학교수로서 남희철씨는  중국조선민족전통음악, 전통음악력사, 음악미학, 서양음악사 등을 강의, 연구하는데 듣는바에 의하면 그의 강의분야는 그가 개척한것이라고 한다.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선후하여 상해음악학원, 조선 평양음악학원에서 음악리론을 전공, 조선에서 예술학 준박사로 되였다. 그는 또한  중국 조선족대학 음악교육사상 처음으로 석사연구생 양성권을 획득, 연변대학 음악학과의 첫 연구생도사로 되였다. 그가 양성해낸 석사생가운데는 전국상을 획득한 이름난 가수 변영화도 들어있다.

그의 서재에는 아주 특별한 퉁소가 있다. 보통 퉁소는 대나무로 되여있는데 이 퉁소는 박달나무로 되였다.우리 연변의 선인들이 만들어낸것으로서 민족악기 연구와 개발에 둘도 없이 소중한 문화유물이다. 이뿐만아니라 그는 장기간의 노력을 거쳐 조선민족의 음악에 관한 자료를 많이 수집하였는데 지금 그만큼 수집한 사람도 중국에 몇이 안된다고 한다.

모든 연구와 발전은 지난 력사를 토대로 하는데 토대중의 토대가 바로 력사적자료이다. 그 소중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그는 조선류학기간 자기의 생활비를 쪼개쓰면서 그 돈을 음악과 관련된 자료수집에 투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구전한 자료가 있기에 그는 학술연구를 깊이 할수 있었으며 선후하여  《중국조선족소년아동예술》, 《조선민요의 선률양식 및 발전수법》  등 저서를 집필했으며 《우리 노래 50년》, 《중국조선족가요대전》,  《중국조선족동요대전》 등을 펴낼수 있었다. 중국조선족음악문화사, 연변조선족력사 예술부분을 도맡아 집필할수 있었다.

요전번에 안 일이지만 남희철교수는 연길윤․성형미용병원의 리사장이다. 무슨 돈이 많아 리사장이 된것이 아니고 윤경애원장이 수차나  《애걸》해서 이 자리를 맡게 되였단다. 참으로 놀랍고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윤원장의 말에 의하면 남교수는 인생학적, 미학적 및 사회학적 견지에서 미용성형을 분석하고 사회활동과 결부하여 사업을 펼쳐간다고 한다.

2007년 이 병원은 《중국장미활동》에 참가하여 전국상을 받았으며 주부련회와 손잡고 2008년부터 이태째 《연변의 아름다운 어머니 가꾸기》 활동을 개최하고 1000여명에게 미용지식을 보급하였으며 400여명을 무료 또는 할인 등 형식으로 미용해주었다고 한다.

정말 남희철교수의 활동반경은 어디까지인지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되여서 이렇게 많은 일에 몸 담그고 활약하게 되였는가는 나의 물음에 남희철교수님은 자기는 차례지는 인생이라고 대답했다.

차례지는 인생, 겸손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는  준비한 사람한테 차례지는 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기회에 앞서 얼마나 준비하고있는가? 
 
 길림신문 구원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인터넷료녕신문 2011-11-22 특약기자 김경덕]  무순시제3병원 흉부외과 보통외과 리석현주임의사 무순의료계통에는 중국의 21명 의료골간사업단 일원으로 예멘공화국에 가서 의료사업을 충실히 완성한 한 나젊은 조선족의료일군이 있다. 그가 바로 무순시제3병원 흉부외과 보통외과 리석현주임의사(43세)이다.  ...
  • 2011-11-22
  • 10월중순의 하루 한 낯선 녀성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가 연변문공단에서 농악무를 배워줬고 연변예술학교에서도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연변의 농악무에 관한 보도나 론문에는 우리 아버지의 업적이 하나도 적혀있지 않습니다.》 필자는 전화를 받은...
  • 2011-11-17
  • 올해 34세에 나는 김성규는 고객과 함께 커온 무역인이다. 길림성영길현 태생인 김성규씨는 청도에 갓 진출했을때만해도 50원으로 일주일을 살았을만큼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자존심보다 자신심이 특별히 강했던 그는 꼭 성공하고야만다는 일념으로 시장을 답사하고 대상을 선택, 그러던중 플라스틱첨가제, 캐미칼(精细化...
  • 2011-11-17
  •  [길림신문 20211-11-15 김룡 기자] —연변축구평론계 거장 최동섭부교수 소년시절부터 의 꿈을 키워 최동섭은 1933년 9월 17일(음력)에 룡정 조양천의 한 농민가정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여났다. 너나없이 가난에 실달렸던 그 시절, 최동섭가정도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였다. 《가난한 집 자식이 일찍 셈이 든...
  • 2011-11-15
  • [연변일보 2011-11-14 리련화 기자 ]원 연변대학 조문학부 최상철교수가 편집위원으로 참가한 《중국소수민족신문전파통사》가 올해 2월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부터 인문사회과학성과상 저작류 2등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늦...
  • 2011-11-14
  • 협회경영의 새 모식을 연 김국성 회장, 협회주식제형식으로 전갈오공양식장 오픈,년 순수입 50만원을 예상 많은 협회가 회비와 협찬금에 의지해 운영되고 있을 때 협회를 산업화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 화제다. 바로 청도시성양구로인협회 김국성회장(1952년생)이다. 부대에서는 군관으로, 제대후에는 무장부...
  • 2011-11-11
  •   차철,최향란이 꾸리는 청향관 전통음식으로 청도에서  큰 인기   청도시성양구에 가면 청향관이 있다. 청향관은 연변전통음식으로 미식가들을 정복한 연변 청향관의 가맹점으로서 차철(72년생), 최향란(73년생)부부가 오픈 한 이래 솔화분 랭면 등 다양한 메뉴로 고객들의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대학을 졸...
  • 2011-11-11
  • 지린성 김시자민속식품유한회사 김시자 이사장을 만나   김시자(金時子) 프로필   1956년생   1972년 9월ㅡ1979년 영길현 삼가자향 화평초등학교 교원   1980년ㅡ1985년 창춘경제개발구 락동촌 6사 사장   1986년ㅡ1995년 창춘시춘진식품공장 공장장   1996년ㅡ2001년 창춘경제기술개발구 민속촌개장집 경리  ...
  • 2011-11-11
  •  중•한 교류 20년, 한국통 조선족 숫자 점차 증가   한국 최대 건축종합회사 동일건축에 건축사로 입사 심봉학   (흑룡강신문=선양 2011-11-10)초기 중국인의 한국 진출이 쉽지 않았던 시기에 중국에 밀려왔던 한국인 중 '중국 '이 되기를 꿈꾸던 많은 이들이 있었고 지금도 수많은 한국인의 중국 러시가...
  • 2011-11-11
  • 청도서원장학교 허룡교장 책임, 질량 봉사로 학교 운영   허룡교장은 길림성교하시실험소학교, 교하시 조선족중학교에 옹근 20년 교장 사업을 해온  길림성에서 인정해주는 교육계의 풍운인물이며 교하조선족교육의 일등 공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년 4월 서원장조선족학교 교장으로 부임돼 온 허룡교장은 사립...
  • 2011-11-0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