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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욱-중국 조선족력사의 《살아있는 사전》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1월17일 14시19분    조회:1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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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력사의 《살아있는 사전》
원 연변대학 민족력사연구소 소장 박창욱교수를 만나본다

박창욱 프로필:

1928년 화룡현 사도구 포지골에서 출생
1944년 길림성립제6국민고등학교 졸업
1947년 참군하여 동북해방전쟁, 평진전역을 거쳐 화중전역 사천까지 진출
1952년―1960년 연변대학 력사학부. 졸업후 연변대학에 조교로 류임
1961년―1964년 국가 및 성 민족사무위원회 지시로 《중국조선족략사》 주요 편찬인으로 참가, 《조선족략사》한어초고가 내부발행 《백피서》로 출판
1978년부터 연변대학 력사학부 부주임으로 사업
1983년 3월 연변대학민족연구소 력사연구실 주임으로 사업
1978―1985 국가민위와 성민위의 지시로 《중국조선족략사》 수개보충사업 담당
1985년 《조선족략사》조한문으로 공개 출판
1985년―1992년 석사연구생도사로 중국조선족 력사연구생 11명 양성, 동시에 외국류학생 접수

국외에서 발표한 주요론문:
1988년 《중국 조선족력사와 민족자치 실시》를 미국하와이대학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
1989년《1927―1989년 민족좌우진영의 민족유일당조직 촉성운동》한국국사편찬위원회주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
1994년 《중국 조선족력사와 금후 전망》을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 《한민족공영체》의 제1,2,3호에 련재
1998년 《중국 소수민족정책과 조선족의 민족구역자치 실시》, 1999년《1940년이후의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항일유격전쟁》2001년《로씨야연해주의 조선인》 등 론문이 일본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되였으며 근100편의 론문이 국내외에서 발표

저서:
1985년 《중국조선족략사》주필담당, 연변인민출파사(조,한문)에서출판
1989년 《간도사신론》(上,下)주필담당. 한국 《우리들의 편지사》에서 출판
1987―1991년《조선족렬사전》(제1,2,3권)을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판
1995년 《중국조선족력사연구》연변대학출판사에서 출판
1992년 《조선족략사(한문)》 길림성사회과학성과가작상 수여, 동3성조문출판물(조문) 1등상.
《조선족렬사전》(제1권,조문)길림성사회과학성과 《우수상》;《조선족렬사전》 동3성조선문출판물3등상
2002년 《로씨야연해주조선인》이 중국사회과학성과평의회에서1등상

사회직무:
1990년 북경대학 조선연구소 겸직연구원
1990년 국제고려학회 리사
1991년 한국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겸직위원
1991년 한국사편찬위원회 해외 겸직연구위원
1992년 한국력사문제연구소 자문위원
 
중국조선족력사 기본체계를 세운 《조선족략사》

1956년에 연변대학 력사학부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력사교수로 활약하게 된 당시 중앙민족사무위원회로부터 《조선족략사》를 쓰라는 지시가 있었다. 박창욱교수를 주요책임자로 《조선족략사》(朝鲜族简史) 자료수집과 집필을 시작하여 문화대혁명이전에 초고가 완성되였다. 당시 주덕해동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겸 당위서기였고 연변대학 명예교장이였는데 그 어려운 경제여건속에서도 략사편찬자금 4,500원을 마련해주면서 적극 지지해나섰다. 그리하여 1965년경에 북경사회과학원과 중앙민족사무위원회에서 민족략사 5개 총서중 하나로 가장 먼저 내부서적으로 된《조선족략사》(백피서)를 출판하였다.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연변대학 민족언어력사연구소는《지방분렬주의리론기지》로 봉쇄당하고 박창욱교수는 쫓겨나 농촌으로 로동개조를 떠났다. 학자로서의 학문연구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장장 8년세월이 흐른 뒤  쉰살을 넘어서면서 연변대학으로 돌아와 다시 조선족략사수개에 나섰지만 그동안 백피서마저 종적이 사라졌고 .력사자료도, 연구원도 없어 촌보난행이였다. 그는 민족사를  쓰는데 전념하기 위해 력사학부  부주임사업에서 손을 뗐고 7년간  연구팀을 거느리고 자료수집부터 착수하여 1985년에 드디여 《조선족략사》를 출판하고야 말았다.

허나 학문에는 완성이란  없었다. 《결국 〈략사〉도 다시 써야 했습니다.〈백피서〉도 반우파투쟁이 갓 끝난 뒤에 출판됐고 완작도 문화혁명이 끝나면서 집필하게 되다보니 내용상에서 좌적사상의 경향이 농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 력사에 대한  기본체계는 세웠다고 생각합니다.》박창욱교수는 조선족략사에 대해 학자로서의 객관적이고 량심적인 평을 내려본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를 위한  12년간 대장정

1983년 민족력사연구소를 차리고 석사연구생 11명을 모집해오면서 박창욱교수는 조선족통사를 쓰기 위한 준비를 다그쳤다. 하지만 자금도 인재도 역시 판부족이라 통사를 써낼수 있는 여건이 아니였다.하여 보다 많은 조선족민중들이 쉽게 접할수 있도록 력사사건과 인물자료를 정리하여 통속적인 총서로 출판하기로 결정하고 1989년부터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8권)를 출판하는 대장정길에 올랐다.

여기서 우선 중국조선족의 력사기점을 어디에 둬야 하는가, 중국조선족의 조선혁명(조선독립)과 중국혁명 《두가지 사명》에 대해 어떻게 기술할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만 학술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였다.

중국조선족의 력사기점을 흔히 19세기 60년대 대이주로부터 보고있지만 사회학적 견지에서는 300여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했다. 민족기준을 언어문자에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민족심리와 민족의식에 그 기준을 맞춰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관건문제로 제기되였다. 2년이란 기간동안 허다한 학술론쟁을 벌이면서 천입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의 력사기점을 새롭게 17세기30년대로 확정하였다. 그것은 명말청초에 중국 하북성 청룡현에 이주한 박씨촌 375명, 료녕성 개현의 박가구 275명, 료녕성 본계현 산성향의 박포일대1235명은 1985년 조사에서 모두 조선족으로 기록되여있었다는 유력한 력사적근거가 있었기 때문이였다.

비록 그들은 언녕부터 조선언어문자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의식속에는  여전히 조선민족의 후손으로  기억되였고 그들의 생활속에는  여전히 조선민족의 풍속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여  정부에서는 만족이나  한족으로 기입된 이들을 모두 조선족으로 시정해주었던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통치하에 망국노가 되기 싫어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주했든 조선독립과 해방을 위해 이주했든 19세기 60년대로부터 조선민족의 대량 이주가 시작되고 잇따라 농토개간과 동북에서의 수전농사가 개발되면서 연해주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그에 대한 진술은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당시 중국조선족들의 《두가지 사명》에 관한 객관적인 진술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당시 력사배경에서 중국혁명을 위한 조선족들의 영용무쌍한 전투정신과 희생정신,  한편 조선 독립과 해방을 위한 사업이였다는 력사적진실을 외면할수 없다는것이다.

1920년대까지 중국조선족들은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민족해방사업을 진행하면서 혁명방향을 모색하였고 중국공산당의 령도가 있으면서 중국혁명의 승리로 조선혁명을 촉진한다는 《두가지 사명》을 한어깨에 짊어지고 분투하였다. 이런 특수한 사명으로 하여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항일전쟁, 해방전쟁에서 목숨걸고 싸웠고 전후방이 따로 없이 민족전체가 동원되였다. 1945년 213만명 조선족인구가 동북해방을 맞은 1948년경에 110여만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전쟁에 참군한 병사만도 6만 5000 여명이였다는 집계가 나온다. 여느 소수민족가운데서도 찾아볼수 없는 력사적현상이였다.

《오죽했으면 중화인민공화국 창건당시 모택동주석께서 〈중화인민공화국오성붉은기에는 조선사람들의 피가 스며있다〉고 특별히 강조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해방전 중국조선족의 력사특점이라고 시인하고 총서에서 감히 진실하게 밝혀썼습니다.》 박창욱교수는 감개무량하게 말씀하셨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는 조선인의 이주로부터 개혁개방, 1990년까지의 발자취가 포함되여있는데 중국조선민족력사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연구팀은12년간 최선을 다하여 정력을 몰부어왔다.

80세 로학자의 꿈 《조선족통사》

그동안 박교수는 중국조선족력사에 관계되는 무려 100여편의 론문을 국내외에서 발표했다. 그중 1988년《중국조선족력사와 민족자치 실시》를 미국하와이대학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 1989년 《1927―1989년 민족좌우진영의 민족유일당조직 촉성운동》을 한국국사편찬위원회주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 1994년 《중국조선족력사와 금후전망》을 한국 《한민족공영체》의 제1,2,3호에 련재,1998년《중국소수민족정책과 조선족의 민족구역자치 실시》, 1999년 《1940년이후의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항일유격전쟁》2001년《로씨야연해주의 조선인》이 등 론문이 일본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 등 주요론문들이 있다.

65세에 리직휴양하였어도 연구생들을 거느리고 계속 민족사연구에 정진해왔던 그는 평생을 손에서 필을 놓지 않고 계셨다. 오늘도 컴퓨터건반을 누르며 후대들에게 남길 자료를 정리하고있는 그는 필생의 정력을 모아 한글자한글자 써내려간 얇은 책자 3편을 필자앞에 펼쳐보였다.

《조선족통사를 쓰려고 이렇게 요강까지 작성해놓은지 오래됩니다. 하지만 우선 자금이 없어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있습니다.》

박교수는 민족사연구사업에 모든 지지를 아끼지 않던 고 주덕해주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감회가 깊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창립초기부터 주덕해동지를 비롯한 일대 민족간부들의 정확한 지도아래 당의 민족정책을 잘 관철하여 교육,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전국의 모범으로 되였고 줄곧 민족단결선진으로 전국에 정평이 나있었다.

그는 《민족은 어디까지나 사회적범주로서 산생, 발전, 소실의 발전법칙을 갖고있는 한 깊이 연구하고 법칙에 따라 처사해야 한다》고 재삼 강조한다.

박창욱교수는 장장 300여년의 력사발전을 거듭해온 조선족사회는 아직까지  력사전체를 아우르는 통사 한책 없다는것에 못내 안타까와하고 가슴아파하셨다. 정치, 경제, 철학, 문화, 교육, 예술, 종교 등 전방면으로 조선족력사는 자체의 특성을 구현하고있는바 이를 과학적체계로 집대성할 사명이 민족력사학자들의 어깨에 놓여있다고 한다.

박창욱교수의 80돐생일축수를 맞으며 제자들은 스승에게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당신은 중국조선족력사의 과학적인 체계를 수립한 저명한 민족력사학가입니다. 당신의 뒤엔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꼭 당신의 뜻을 이어 〈조선족통사〉를 써내고야말것입니다.》

그는 통사가 출판되자면 기본적으로 20만원이란 자금이 앞서야 한다며 빈손을 펴보이면서《발자취총서를 출판할 때에도 민족사회 각계의 지지와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부언을 잊지 않으셨다.

저도 몰래 필자의 앞에 놓인 3편의《조선족통사요강》에 눈길이 가면서 부디 이《요강》이 박창욱교수의 꿈으로만, 유작으로만 남지 말기를 기원했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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