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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영-"압록강변에서 태여나 압록강물을 먹고 자랐지유!”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7월30일 10시16분    조회:7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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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야 압록강변에서 태여나 압록강물을 먹고 자랐지유!” 

“제가 길림성 집안현에서 태여나 열네살때 관전으로 이사해 죽 살아왔으니까 60여년을 단동지역에서 보낸셈이지요. 아니, 80평생을 압록강변에서 압록강물을 먹고 살아왔다고 할수 있을만큼 압록강과는 인연이 깊수다.” 단동시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일하다 리직하고 집에서 만년을 보내고있는 김창영(82)씨의 일생은 말그대로 압록강과 더불어 영광의 희열과 보람, 수난의 상처와 아픔이 함께했고 수많은 세월의 간난곡절을 겪은 한생이였다. 한마디로 그의 삶속에는 압록강변 우리 민족의 한단락 력사와 삶이 그대로 고스란히 배여있다고 하는편이 알맞을것이다.

  김창영씨의 고향(원적)은 조선 자강도 초산군. 살길을 찾아 그의 할아버지가 가솔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을 때는 그의 아버지가 겨우 두살나던 해였다. 그러니까 가문의 이주력사는 100년이 넘는셈이 된다. 그의 아버지가 집안현 천가장일대에서 촌공소 조리원으로 일하다 사직하고 관전현 하로하에 이사해온것은 그가 소학을 졸업하고이다. 16세때 학교 공무로 들어가면서 일찌감치 사회생활에 뛰여들었던 그는 한동안 이곳에서 대과교원으로도 일했고 몇해후에는 하로하조선족소학교 교원채용시험을 거쳐 선후하여 교원, 교도주임을 맡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것은 1950년 하로하구정부의 민정조리로 채용이 되면서부터이다. 그후 그는 선후하여 태평소구 부구장, 구장, 관수구 구위서기, 공청단관전현위서기, 현감찰위원회 부서기, 현위 “제2서기”  등직을 담임했다. 그중 그가 현위 “제2서기”로 임명된 일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1962년 성위조직부에서는 고찰을 거쳐 김창영씨를 관전현위 부서기로 임명한다는 전근령을 내렸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김창영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내용을 담은 밀고편지가 현위에 전해졌다. 난감하게 된 현위에서는 론의끝에 결국 김창영씨를 “제2서기”로 임명하였다. 전국적으로도 유일했던 이 “직무”는 “계급투쟁”의 정치적분위기가 심했던 당시의 상황에서만 있을수 있었던것으로 전대미문의 정치적유머로 되였다.

  “문화대혁명”기간 김창영씨도 정치적박해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반역자”,  “주자파”,  “반군파”,  “모 반혁명집단의 두목” 등 7~8개의 무거운 “정치모자”가 씌워졌다. 그당시 그가 겪었던 일중에 두가지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1968년도인가. “조선특무” 등 모자를 쓰고있던 그는 낮에는 “홍위병”들에게 끌려다니며 투쟁을 당해야 했고 밤에는 두사람이 지키는 삼엄한 “감옥”에서 지새야 했다. 년로한 어머니가 아들이 오래동안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면 가족들이 출장갔다며 적당히 둘러대군 했고 때로는 낮에 거리에서 “김창영을 타도하자!”는 구호소리가 무시로 들려와 한어를 모르는 어머니가 “왜 거리에서 창영이 이름을 부르느냐”고 하면 가족들이 이리저리 둘러대며 숨기군 하였다. 그러기를 1년 반, 감옥생활을 하는 기간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채 《모택동선집》만을 갖고 들어갔던 김창영씨는 그 “덕”에 《모택동선집》을 몇번이나 통독하면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되였고 이를 통해 당중앙의 간부정책을 굳게 믿었으며 언제든지 꼭 “해방”되리란걸 확신했다.       

1970년 겨울 김창영씨는 지옥 같은 “감옥”생활을 마치고 식구들과 함께 “5.7간부”로 보달원 농촌에 쫓겨내려갔다. 이 기간 김창영씨는 농민들속에서 네 아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일반적인 가정생활을 누렸는데 고달프기는 했지만 이것이 그자신은 물론 네 아이의 성장에 밑거름으로 되였던 나날이였다고 김창영씨는 감회깊게 회고했다. 드디여 1972년 김창영씨는 “해방”을 맞았고 선후하여 보달원공사 당위부서기 겸 혁명위원회 부주임, 홍석립자 당위서기 겸 혁명위원회 주임을 담임하다가 뒤미처 1977년 현혁명위원회 부주임(즉 후날의 부현장)으로 복귀하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김창영씨가 가장 감명깊게 느꼈던 점은 민족사업에 대한 의식을 확립한것이였다. 이는 한 조선족간부가 어느때, 어떤 장소에서나 조선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것을 보면서 받은 충격때문이였다. 여러 정부기관을 전전하면서 일에 쫓기다보니 이런데 신경을 쓰지 못했던 그였기에 감회는 더욱 깊었다.

 “조선족간부는 조선말을 해야 한다. 조선족과 만나도 조선말을 하지 않는다면 조선족간부라 할수 없다. 조선족간부라면 조선족활동을 적극 지지해나서야 한다.” 그의 의식속에 자라난 이러한 관념은 이후의 사업실천에 행동으로 옮겨졌다.

  우리 성의 유일한 소수민족지 《료녕조선문보》가 복간된후 그는 우리 말 신문과 조선민족사업의 련관성을 절실히 느끼고 신문의 주문발행을 적극 지지해나섰고 기자가 당지취재를 나갔을 때는 찦차를 내여 자신이 직접 기자를 배동해 취재활동을 안내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본 신문의 독실한 애독자로 되였을뿐아니라 네 자녀에게도 각각 《료녕조선문보》 한부씩 주문해주었는데 지금은 이들 모두 본 신문의 열성적인 애독자로 되였다.
  1984년 그는 심양에서 진행된 전국조선어문사업실무회의 및 중국조선어학회 제4차학술대회에 참가하였는데 현인대상무위원회 주임으로 갓 발령이 났던 그는 돌아가는 길로 현위에 제기해 현조선어문지도소조판공실을 설립하고 전문인원을 배치하였다.

  그후 1988년에 단동시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전근된후에도, 단동시연안정신연구회 상무부회장, 단동시조선족로인협회 회장을 담임했을 때에도, 단동시 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및 조선족기업가협회 설립과정을 비롯하여 각종 조선족의 활동이나 행사에 적극 참가하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어디서나 민족간부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강조하며 민족간부들은 민족사업에 앞장서야 한다고 력설한다. 그는 또 조선족간부양성에 대해 중시하면서 이에 대한 구체적건의 등을 시위조직부에 제기하기도 했다.

  재직시절 《단동조선족민간이야기집》(한문판)을 펴내기도 했던 김창영씨에게는 유감 하나가 애석함으로 남아있다. 조선족항일독립운동을 비롯하여 조선족의 력사에 대한 자료를 발굴, 정리하는 일을 미처 해내지 못한것. 이제 남은 여생이나마 민족사업을 위해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탤수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다는것이 그의 심정이다.  


특별취재팀 윤선일 김창영 윤재윤
인터넷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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