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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숙-영길현조선족실험소학교 교장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0월19일 15시03분    조회: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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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장선생님은 녀중호걸입니다》
-영길현조선족실험소학교 최명숙교장 인터뷰

 

 

최명숙교장

 

불운한 시대의 행운아

 

1958년 영길현 찰로하진 단결촌의 한 농민의 딸로 태여난 최명숙,여느 농가의 자제들과 마찬가지로 고중을 졸업하고 회향지식청년이 되여 고향에서 농민이 된 그녀,그러나 학교시절부터 반간부로 활약했던 그녀이기에 농촌에서 기공원,보관원,부녀대장,대대단총지로 주목을 받았고 1978년 20살이 되던해 민영교원에 선발되여 단결조선족중심학교에서 담임교원으로 교편을 잡았다.1981년에는 시험에 합격되여 연변제1사범 민사반에 입학해 교원이 갖추어야 할 전문지식을 계통적으로 배우게 되였다. 배움의 욕심은 끝이 없어 그후 연변대학 함수 조선어어문전업을 많은 애로속에서 원만히 완수했다.

 

1984년 영길현조선족실험소학교에서 《조한상호보완(朝汉相辅相成)》과제실험을 하면서 조선어, 한어 교원 각기 한명씩 영길현교육계통에서 선발하게 되였는데 영길현조선족제4중학교에서 최명숙교원이 조선어문교원으로 뽑혀 영길현조선족실험소학교로 전근하게 되였다.

 

이로부터 실험교재편집에도 직접 참가하고 그 교재로 전통적인 주입식교수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수모식을 모색하면서 헤아릴수 없는 참관교수를 담당했고 수십편의 가치있는 론문을 발표했다. 《조한상호보완》과제실험은 대성공을 거두어 1988년에 전국에 보급하게 되였고 그는 《길림성우수교학성과상》 2등상을 받음과 함께 《길림성교육개혁적극분자》로 당선되였다. 당시 상금 800원을 타서 동료들한테 밥 두축이나 샀던 기억이 생생하단다. 그후 최명숙은 교학능력,사업능력을 인정받아 담임교원에서 학교 교도주임으로, 1996년에는 영길현조선족실험유치원 원장으로 승진했다.

 

 

학교건물 보수공사에 국경절련휴에도 출근하며(중간 최명숙교장)

 

역경을 이겨나온 세월

 

2002년 영길현조선족실험유치원 원장직에서 영길현조선족실험소학교 교장으로 발령이 나 부임을 하고보니 학교에는 근 40만원의 빚더미가 쌓여있었다. 따라서 빚받이군들의 성화에 몸살을 앓아야 했고 그보다 더 힘들었던 부분은 교직원들의 민심이 해이해져 아예 타교로 전근을 하려는 교원들도 줄을 섰다.

 

학교건설 무계획으로 인한 후유증 그리고 부실지출,비뚤어진 령도층의 사업작풍으로 초래된 결과였다.

 

최명숙교장은 우선 민심잡기에 주력을 하고 학교의 빚은 3년안에 갚는다는 목표를 세웠다.

 

민심잡기의 조치로 교직원들에 대한 상벌제도를 내여오고 선진,직책 평선을 공평공정하게 한다는것이다.이런한 조치는 교직원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키는 기초가 되였다.

 

경제복구 조치로 원래 숙사생식당을 확충해 전교 사생식당으로 만들었다.따로 화식원을 두지 않고 농촌학교의 페교로 타교에서 온 교원들중 경쟁에서 밀려난 이나 로교원들을 사상공작을 해 식당일을 맡겼다. 이렇게 림시공을 쓰는 월급이 남게 되여 학교의 수익금이 되였다. 상급부문에서 제정한 통일표준 급식비를 받지만 우리 민족의 특색에 맞게 영양급식제도를 내여와 학부모들도 대만족이고 학교에는 수입창출의 고정래원이 되였다.

 

학생들이 휴식시간에 외부 소매점으로 가는것도 막고 학생들의 수요도 만족시키도록 학교내부에 소매점을 꾸렸다.역시 본교의 인원을 책임자로 배치해 수입래원이 하나 더 늘었다.

 

또 다른 주요한 경제래원은 당시 형세에 맞추어 5일 반 근무제도를 내여온것이다.조선족학생들의 절대대부분이 로년가장인 현상에 비추어 토,일요일 휴무기간 로년가장이 학생들의 학습지도를 제대로 못하는 실황을 료해하고 학부모들의 의견을 청취해 자원의 원칙하에 토요일 오전 보도반을 개설한것이다. 당시 학부모들은 98%가 찬성표를 내였고 실제로 400여명 학생이 이에 동참했다. 학생당 한달 보도료가 40원이였으니 학교재정에 큰 도움이 된것이다. 5일 반 근무제를 4년간 견지했으나 그후 상급교육부문의 정책이 바뀌여 보도반을 취소했다.

 

최명숙교장은 이렇게 창출된 재정수익을 3등분해 1/3은 빚을 갚고 1/3은 기본건설에 쓰고 나머지 1/3은 교직원복지에 쓴다는 경영방침을 내여왔다.이런 제도는 교직원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최명숙교장은 애당초 목표대로 3년만에 끝내 빚을 청산했다.

 

최명숙교장은 학교경제를 살리는 동시에 학교의 생명인 교수질 제고를 늦추지 않았다.

 

근 몇년래 많은 농촌학교와 합병하면서 교원대오가 로령화한데다가 학력이 낮아 전반 교원들의 업무소질이 말이 아니였다. 하기에 교원들의 업무소질을 제고시키는것이 급선무였다. 《하면 된다》는 굳은 신념하에 최명숙교장은 과당교수질제고를 돌파구로 실효적인 교연활동을 조직함 동시에 학교경제가 그토록 곤난한 상황에서도 많은 교원들을 밖에 내보내 배우게 하고 전문가들을 요청하여 강좌를 듣는 등 《나가고 모셔오는》 경로를 통해 교원들의 소질을 높이기에 무척 애를 썼다. 하여 많은 교원들이 빠른 시간내로 성숙되여 성, 시 교수시합에서 훌륭한 성적을 따내였다.

 

학생들의 능력도 몰라보게 제고되였다. 매번 영길현조선족제1중학교 진학시험에서 본교에서 1등-10등을 독차지하였고 2004년에 제12회 중국조선족소학생 《신동컵》수학경연에서 대상을 탄 리우봉학생이 한국에서 열린 국제급수학경연에 참가하였으며 매 3년에 한번씩 열리는 3중언어시합에서도 좋은 성적을 따내였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지식과 능력제고를 틀어쥐는 이외에 매년 6.1절 운동대회,국경절예술절 등 다채로운 활동을 조직한다. 특히 7월초 6학년 졸업식 문예공연은 학부모와 교직원들이 함께하는 무대로 학부모들이 연변가무단의 공연도 안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최명숙교장이 부임한 이래 영길현 조선족사회에서 이 소학교에 대한 평가도는 상당히 높다.학부모들은 학교의 곤난을 리해하고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영길현 교육계통의 수십개 학교중 학생수금문제로 상급 교육부문이나 기률검사위에 고발당해본적이 없는 학교가 영길현조선족실험소학교이고 고발을 당해보지 않은 교장이 최명숙교장이다.

 

또 최명숙교장은 성공안청과 성교육청의 비준하에 외국류학생을 받아 한학기에 학생당 2000원씩 학비를 받아 학교의 수익래원으로 만들었다.

 

교학질의 제고 및 고갈된 조선족교사래원에 비추어 영어, 한어, 음악 등 부문에 학교에서는 한족교원을 초빙했다. 학교에서는 이런 한족교원들에게 매일 한시간 조선어공부를 시키는데 문자, 언어뿐아니라 조선족의 례의범절교육까지 가르친다.현재 8명의 한족교원이 있는데 학교 교학질제고에도 도움이 될뿐더러 모두들 학교분위기에 동화되여 민족단결도 잘 이루어지고있다. 최명숙교장은 한족교원들에게만 매년 특별한 회식자리를 만든다. 민족은 다르지만 민족교육사업에 수고많다는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말도 전하면서.

 

 

고급학년조 교원들과 함께 (앞줄 오른쪽 최명숙교장)

 

검소한 사업작풍 솔선수범의 원칙

 

최명숙교장의 일관된 사업작풍중 식당출입 삼가도 철칙이다. 한때 전임 실험소학교 령도층의 잦은 식당출입이 조선족사회의 말밥에 올랐었다고 한다. 최명숙교장이 부임당시 여기저기 식당 외상이 있었고 심지어 모 식당에는 외상이 만원넘게 있었으니 교직원들과 학부모들의 불만 1위에 오를 정도로 질타가 될수밖에.

 

출근 지키기도 최명숙교장의 철칙이다. 최명숙교장은 33년 교직생활에서 정상적인 산후휴가를 빼고 단 하루도 청가를 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안 대소사에 그는 참가못하는 사람으로 인상이 박혔다. 시부모 생일날 새벽에 가서 일을 해주고 정상출근을 한다. 가족들에게 미안함이 많은 그녀는 퇴직후에는 정성껏 보답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유치원원장 7년, 교장직 8년, 교직생활 33년 인생의 철리 - 대가를 바라지 말고 일하라, 남에게 요구하는 일을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고 지키자는것이다.

 

감동의 순간

 

2010년 7.28대홍수, 홍수가 밀려오기전에 한달음에 학교에 달려나온 최명숙교장은 홍수에 갇혀 점심은 학교식당에서 남은 쌀로 죽을 쑤어 때웠다. 통신도 중단된 마당에 금년 12월에 퇴직을 앞두고있는 교도처 배춘란 주임이 허약한 몸에 조카의 부축을 받으며 나왔고 김일국부교장이 다리부상으로 운신을 못해 집사람을 학교로 보내여 실정을 알아보도록 해서 나왔고, 송세정 후근부주임, 김운실 정교주임이 줄줄이 학교로 나왔다. 최명숙교장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우리 학교 령도조직이 이처럼 전투력이 강하고 각오가 높구나,관건적인 시각에 역시 돋보이는 이들이구나!

 

홍수후 형제학교들과 조선족사회 각계에서 보내는 다함없는 관심과 지원에 또한번 감동을 받았다고 최명숙교장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 교장님은 녀중호걸입니다

 

김춘애부교장은 최명숙교장을 《녀중호걸》이라고 엄지를 내든다. 녀자의 몸으로 학교의 그 많은 첩첩곤난을 이겨온 세월, 수재때에는 매일 4시경이면 등교해 일을 했고 요즈음은 학교건축보수처리일로 매일 아침 6시전에 학교에 1번으로 등교한다.

 

한번이 아니면 두번, 세번 문턱이 닳도록 교육국을 찾아다녀 학교수재보수지원금 50만원을 지원받아 학교건물 외부보온벽, 옥상방수처리, 식당인테리어를 새로 하게 되였다. 바람이 술술 새는 창문이 10년만에 새창호로 바뀌여 추운 겨울나기에 마음이 벌써 따뜻해진다.

 

우리 교장님은 친절합니다 랑만적입니다

 

저급학년조 주정연조장은 점심에 교내식당에서 교장이 친히 교원들 밥을 퍼주고 반찬까지 담아주는 친절한 사람이라고 한다.

 

1학년 담임선생님 전금련은 교장선생님은 랑만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2년전 생일날 아침 6시에 집으로 배달된 꽃다발, 당시 당황함과 의아함, 교장님의 지시로 학교에서 보내온 생일축하꽃다발이라는 말에 뭉클 감동이 오는 순간이였다. 작년 눈 내리는 겨울날 아침에 두번째로 받은 생일축하 꽃다발, 너무나 랑만적이였다.

 

특수한 가정배경

 

최명숙교장은 조남기장군의 친질녀이다. 그래서 주위람들은 혹시 덕을 본것이 있는지 의문들을 갖게 된다. 최명숙교장은 사실 덕을 보고싶지만 덕을 본건 전혀 없다고 했다. 본인뿐아니라 조남기장군의 모든 친척들이 덕을 보지 못했다고 덧붙이는 최명숙교장. 최명숙교장의 4남매가 모두 자기 노력으로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일해 자그마한 성과를 이루었으며 자신의 두 아들도 큰아들은 북경의 외국기업에서, 작은아들은 청도대학을 다니고있다고 했다. 최명숙교장은 외삼촌은 그렇듯 친인, 친척이랄것 없이 그 누구에게나 공정히 대하시는 분이기에 사회의 존중을 받고 인정을 받고 그 높은 위치에 선것 같다며 그래서 외삼촌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했다.

 

안타까움으로 남는 간절한 소망

 

2년후 퇴직을 바라보는 최명숙교장, 그의 간절한 소망인즉 조선족민족교육사업이 길이길이 더욱 번창했으면 하는것이지만 지금 학생래원이 자꾸만 줄고있어 너무나 안타깝다는것이다. 당시 교장으로 부임시 540명이던 학생수가 반으로 줄어 지금은 280명밖에 되지 않는다. 조선족은 교원직 지망자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조선족교원래원도 줄어 민족학교 특색을 살려가는데 큰 걱정이다. 민족교육사업에 발을 들여놓은지도 어언간 33년, 최명숙교장은 루차 현 3.8붉은기수로, 길림시우수교사,민족단결 선진개인으로 수많은 영예를 안아왔다.

 

지난 33년을 뒤돌아보면서 세월의 무정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줄창 앞만 보고 달려온 민족교육사업의 한길에서 후회는 없다고 최명숙교장은 담담히 말했다.

 

 

4학년 2반 교실을 둘러보며



길림신문 차영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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