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호웅-연변대학의 대표적인 문학교수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0월26일 08시51분    조회:789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연변대학의 대표적인 문학교수 — 김호웅교수

가을 치고는 유난히 화창한 날씨를 보였던 10월 21일, 기자는 아침 출근시간에 맟추어 일찌감치 연변대학교로 향했다. 김호웅교수와의 인터뷰가 예정되여있었던것이다.

연변대학교 도서관 3층에 자리를 잡은 김호웅교수의 연구실에 들어서니 김호웅교수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권하고나서 미리 준비해놓은 본인의 략력이며 참고할만한 자료들을 내놓는데 취재의도에 딱 맞는 자료들이여서 어딘가 모르게 이번 인터뷰에 신심이 생기였다.

1

김호웅교수는 연변대학 조선-한국학원의 교수, 박사생지도교수이다.

그는 주로 《문학개론》과 《문학비평방법론》, 《세계조선민족문화와 문학》 등 학과목을 강의하고있는데 문학창작과 현장비평에도 남다른 재능을 갖고있다.

교수로서의 그는 교수내용을 갱신하고 교수 방법과 수단을 개혁하며 학생능력을 양성하는 면에서 신근한 땀방울을 쏟아부었다. 그는 처음으로 중국특색의 조선문습작학리론과 문예학리론 과정체계를 세웠고 문학리론, 문학창작, 문학비평을 아우를수 있는 학생들의 종합적인 자질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리론성과 실천성이 결부된 《글짓기기초》, 《문학개론》, 《문학비평방법론》등 조선문판 교재와 과정체계는 국내 조문학과와 조선어학과 교수개혁에서 지도적의의를 띠고있다.

또한 김호웅교수는 부단히 한국학연구방법을 탐색하고 새로운 연구령역을 넓혀왔는데 해방전 재중조선인 디아스포라문학과 해방후 조선족문학 내지 세계조선민족 문화와 문학 연구 령역에서 많은 중요한 연구대상을 발굴해냈다. 그는 석사, 박사생들을 지도해 재일 조선인작가 리량지, 김사량을 다룬 학위론문을 쓰게 함으로써 국내외 학계의 중시와 찬양을 받았다.

그는 이미 2명의 박사연구생, 21명의 석사연구생을 지도했고 현재 또 2명의 박사생과 7명의 연구생을 지도하고있으며 수차 우수지도교수로 선정, 표창을 받았다.

2

연변대학에서 김호웅교수는 한국학연구에 조예가 깊은 한국통으로 통하며 한국학연구에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학자이다.

그는 2004년부터 두기 련속 조선한국연구쎈터 주임을 맡았고 2007년부터는 아시아연구쎈터 주임까지 겸임하면서 조선한국연구쎈터를 교육부 인문사회과학중점연구기지, 한국 학국학중앙연구원 해외한국학 중핵대학, 한국국제교류재단 및 고등교육재단후원단위로 부상시켰다.

몇년간 그는 "한국전통문화국제학술대회"(2007년), "조선-한국문학과 동아시아 국제학술대회"(2007년)를 성공적으로 조직했고 또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후원으로 제1, 2회 "두만강학술포럼"(2008년, 2009년)을 성공리에 개최했다. 이러한 학술활동들은 국내외 학계의 커다란 중시를 불러일으켰으며 국무원의 "두만강지역 합작개발개방전망계획 요강"을 실천하는데 중요한 추진역할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3

김호웅교수는 중국조선족문단의 저명한 평론가이기도 하다.

일찍 대학시절에 그는 벌써 소설 "산속에 핀 진달래"를 《연변문예》에 발표하여 문학가로서의 재질과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선후로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장백산 "모드모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은 "우리 문단의 백마 김호웅씨"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호웅씨는 지칠줄 모르는 견인성도 좋지만 유연성과 포용력이 돋보인다. 그래서 나는 100킬로그람에 육박하는 웅장한 체구를 가진 호웅씨를 백마에 비기고싶다. 잘생기고 인품 좋고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고 또 연변의 마당발로 소문난 팔방미인이다. 강의 잘하고 학생들을 아끼고 사랑해서 대학교수로도 인기가 만점이다. 그는 또한 우리 조선족문학의 발전을 위해 새롭고 괄목할만한 창의적인 비평성과를 이룩한 우리 문단의 중견으로서 우리 비평계의 앞자리에 좌단하고있는 이름있는 비평가요, 현대지성이다."

그는 리론을 실제에 결부시키는 우량한 학풍을 견지하고 진리를 숭상하며 문학비평에 과감히 참여하여 대량의 론문과 평론을 써냈는데 이러한 작품은 《인생과 문학의 진실을 찾아서》, 《중일한 문화산책》,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등 3부의 개인문학평론집에 수록되여있다. 2007년, 그는 "중국조선족문학평론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부주석직무를 맡고있다.

4

김호웅교수는 또 정열적인 사회활동가이다.

중국조선족아동장학회 회장직을 맡고있는 김호웅교수는 2004년부터 해마다 1.5만원의 장학금을 유치해 100명 소학생들에게 인당 1000원의 장학금을 안겨주었고 2006년부터는 해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장학금 1만딸라를 유치하여 10명 석사연구생에게 인당 1000딸라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2006년부터 매년 <<정수장학금>>을 발급, 25명 대학생에게 인당 3000원의 장학금을 안겨줬다. 이외 김교수는 6차의 소월문학상응모를 벌렸고 10차의 청송컵작문경연, 11차의 평화백일장, 4차의 중한대학생학술대회를 조직하여 조선족어문교육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또한 그가 쓴 3편의 문학작품과 평론이 조선족중학교의 《조선어문》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2006년, 그는 주로력모범칭호를 수여받았으며 현재 연변대학 문과학술위원회 주임, 한중인문학회 부회장으로도 활약하고있다.

5

여기까지 취재하고나니 오늘날의 김호웅교수를 있게 한 그의 성장배경과 학문의 길을 줄달음친 그의 인생궤적이 사뭇 궁금해졌다.

김호웅교수는 1953년 연길시의 한 평범한 로동자가정에서 태여났고 항렬로는 넷째이다. 그의 부모는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그중 4명이 이미 박사칭호를 받았고 한명이 지금 박사과정에 재학하고있다. 이들 가정은 박사가정으로 수차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김호웅교수는 중학교 1학년때 “문화대혁명”을 맞아 동란의 세월에 중학교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현명한 교육관을 지닌 부모님 덕분에 어려서부터 형들을 따라 많은 책을 읽은 보람으로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고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자 1978년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였다.

대학시절 친구와 술을 좋아하고 결혼까지 했지만 강의를 열심히 듣고 폭넓게 독서를 했으며 학습내용을 체계를 세워 지식창고에 저장하고 력사, 철학 서적도 함께 읽어 보다 포괄적인 지식과 안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였다. 보고 듣고 느낀바가 있으면 글을 쓰는 습관을 키운 덕에 그의 성적은 늘 학급에서 상류에 속했다. 그는 본과를 졸업하자 곧장 연구생시험에 합격되여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걷게 되였다.

석사과정을 졸업한후 김호웅교수는 조문학부에 남아 조교, 강사로 있었고 1989년부터 1년 반동안 일본 와세다대학의 객원교수로 가있다가 귀국하여 조문학부 당총지서기 겸 부학부장으로 일했다. 1993년, 그는 박사연구생 공부를 시작했고 1998년 박사학위를 받은후에는 조문학부 학부장으로, 교수로 발탁되였다.

2002년 3월, 김호웅교수는 근 6년간 맡아하던 조문학부 학부장 자리를 내놓고 한국 배재대학교 객원교수로 나가있었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연변대학교 조선문학연구소 주임으로 있었고 2004년 4월부터는 연변대학 조선-한국학원의 박사생지도교수로, 조선-한국연구쎈터의 주임 겸 아시아연구쎈터 주임으로 일했다.

학자, 교수, 문학비평가, 사회활동가…이렇듯 여러가지 역할에 충실하다보니 김호웅교수의 하루는 늘 빡빡한 일정이다. 인터뷰중에도 수시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전화가 걸려왔다. 귀한 시간을 점하는것 같아 서둘러 취재를 끝내고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연변일보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孫文 만난 뒤 중국공산당 입당 사해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조계지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당시 임시정부는 재정형편이 취약해 그의 생계를 해결해 줄 수 없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는 당시 조선인들이 주로 취직하던 전차회사의 차장노릇을 하면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때 그는 어릴 때 잠시 접어두었...
  • 2005-11-04
  • [원제:동포 1.5세 여성 미 해군 부대장 `우뚝'''' ] 미군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인사지원부대(PSA)장이 동포 1.5세 이연미(40. 미국명 앤리 쿠베라) 중령인 것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30일 미주중앙일보에 따르면 5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한 이 중령은 뉴저 지에서 중.고교를 마친 뒤 버지니아대 국제관계학을...
  • 2005-11-04
  • 조국독립을 위해 고향을 떠나다 1898년 중국용정에서 태어난 한낙언은 어릴 적부터 남다르게 그림에 재간이 있었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유민이 되어 조국을 떠난 가난한 조선인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체계적인 그림공부를 할 기회를 갖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이었을 것이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부친이 병으로 돌아가...
  • 2005-11-03
  • 본사소식(윤선일)" 최근 단동출입경 검험검역국에서 료해한데 따르면 10월에 들어서면서 단동랑두항구로 무연탄을 싣고 입항하는 조선 화물선이 부쩍 늘고 있다. 해당인사의 소개에 의하면 10월부터 겨울 난방기에 들어서고 국내 화력발전소에서 대량의 석탄을 수요로 하며 질 좋은 조선의 무연탄이 중국에서 각광을 받으면...
  • 2005-11-02
  • 흑룡강동원상업무역유한회사 —망규동원화원주점 개업 선언 본사소식( 기자 최계철) 조선족청년기업가 박광종(39세)이 이끄는 흑룡강동원(同源)상업무역유한회사는 상업,무역, 부동산업을 병진시켜 창업 12년만에 총자산 1억 2000만원에 7개 자회사를 둔 그룹으로 급부상했다. 이 회사 산하 흑룡강 망규화원주점이 10월...
  • 2005-11-02
  • 1947년 비행기 추락사고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 7월 30일, 실크로드에 세워진 도시 우루무치를 떠나 란저우로 향하던 국민당소속 257호 비행기가 자위관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광활한 중국대륙의 오지에서 일어난 추락 사고는 자칫 긴박한 내전 상황 속에서 중국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영...
  • 2005-11-02
  • 클린턴과 골프 친 뒤 성금 50만불 쾌척 '1,000만달러의 소녀' 미셸 위(위성미)가 지난 31일(한국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서던하일랜즈골프클럽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골프 회동을 가졌다. 미셸 위와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이 날 골프 만남은 프로 전향 때 발표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 돕기 성금 5...
  • 2005-11-02
  • 붓으로 새로운 세상을 굼꾸다 총이 아닌 붓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려보자고 했다는 한낙연. 최용수교수도 한낙연이 중국에 알려진 것에 비해 정작 조국인 한국에서는 그를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하긴 그런 인물이 어디 한둘이랴. 널리 알려진 스타에만 초점을 맞추는 세상 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도...
  • 2005-11-01
  • [원제:홍광정신 실천으로 조선족 명예 찾겠다 ]  “한국정부에 리홍광장군의 명예회복을 수차례 요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반응이 없다.”  지린성 반석시 홍광중 교장을 역임한 이주산(李柱山·72)선생은 오랫동안 항일운동가 리홍광장군을 연구해온 인물. 아마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그 만큼 리홍광장군에 대해 잘 알...
  • 2005-10-3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