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국민가수 김인숙의 노래인생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4월7일 08시46분    조회:789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중앙방송 2011-04-06 글: 채선화]

1936년 11월 룡정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나 흑룡강성 오상현의 어느 시골에서 소학교에 다닌 김인숙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 꾀꼴새로 소문났고 12살 어린 나이에 조선의용군 제3지대 선전대에 입대하면서 노래인생을 시작하였다.

당시 소학교 5학년에서 공부한 김인숙은 조선의용군 제3지대 선전대의 공연이 끝난후에 마련된 지방군중들과의 련환모임에서 소학생대표로 독창을 하였다. 그런데 선전대의 배우들이 노래를 참 잘 부른다고 칭찬해주면서 선전대에 참가하라고 할줄이야?! 흥분을 가라앉힐수 없게 된 김인숙은 며칠후 아버지를 졸라 할빈에 자리잡고있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 선전대를 찾아가고야말았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 선전대에서 김인숙은 백고산선생한테서 음악리론을 배우고 조득현선생의 안무를 보고 무용을 익혔으며 왕향선생한테서 성악을 배우면서 음악수양을 닦았다.

이렇게 예술수양을 제고하는 한편 부대를 따라 목단강, 밀산, 계서, 상지, 길림 등지에 가서 공연하고 장춘해방전투에도 참가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 전쟁년대라 낮에는 적군의 폭격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밤이면 야전부대를 따라 행군했는데 하루에 보통 25∼30킬로메터, 많으면 50여킬로메터를 강행군할 때도 있었다.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상황이였지만 나어린 김인숙은 용케도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혁명전사로 성장하였다.

1948년 할빈에서의 꼬마전사 (오른쪽 첫번째 김인숙과 정인덕).

 

인기가수로 환영받던 시절

1948년, 조선의용군 제3지대의 꼬마선전대원들과 더불어 할빈민족사무처문공단에 들어간 김인숙은 1949년 할빈민족사무처문공단이 연변문공단(연변가무단)과 합병하면서 연변가무단 배우로 되였다. 이때로부터 연변가무단 독창가수로 활약하게 된 김인숙은 선녀같이 아름다운 용모, 감칠맛나는 노래, 춤을 동반한 황홀한 표현으로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다.

1953년 심양에서 펼쳐진 제1차 동북3성문예콩클에서 김인숙은 최정연 작사, 정진옥 작곡으로 된 《처녀의 노래》를 불렀는데 재청을 요구하는 박수소리가 그치지 않아 수차례 답례끝에 그 노래를 다시 부르고서야 다음 종목으로 넘어갈수 있었다고 한다.

 1953년 심양 제1차동북3성 문예콩쿠르에서 《처녀의 노래》를 부르는 김인숙 .

그번 콩클에서 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김인숙은 1959년에 동북3성 복건전선위문단의 성원으로 3개월동안 위문공연에 참가하여 독창, 2인창에 중창까지 번마다 10여수의 노래를 불러 부대장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당시 하루에 5차례 공연을 해야 하는 로고도 마다하고 여가 시간에 부대장병들의 옷을 빨고 깁고 하는 옹군우속 옹정애민 활동에도 적극 참가해 동북삼성복건전선위문단에서 수여한 선진사업일군의 상장을 받기도 했다.

그해 북경에서 진행된 국경 10돐헌례공연에서도 김인숙은 수도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배우대표로 국경초대연에 참가하는 영광도 누리였다.

지난세기 50, 60년대에 김인숙은 여러 차례나 모택동주석의 접견을 받고 주정부의 10년우수연기상을 비롯한 많은 영예를 따내였으며 선생이 부른 《처녀의 노래》, 《연변목가》, 《깜둥처녀》는 레코드로 출판되여 전국에 보급되였다. 이밖에 김인숙은 또 《콩쥐팥쥐》, 《백모녀》, 《배나무골》,《류호란》 등 가극에서 주역을 맡고 뛰여난 연기력을 과시했으며 1960년대말부터는 연변가무단의 무용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에서 쏘프라노를 맡아 각광을 받았다.

현모량처

김인숙선생이 독창을 할 때마다 손품금반주를 맡은 안국민선생은 반주에만 그치지 않고 섬세하게 지도해주면서 예술기량을 제고할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에 김인숙은 안국민선생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였고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사랑이 싹터 1954년에 결혼을 하고 딸 셋을 낳아키우며 지금까지 화목하게 살아가고있다.

당년에 안국민선생이 지휘를 하는 한편 창작을 하느라고 팽이처럼 돌아치는통에 쌀이며 석탄을 사들이는것은 물론 온돌을 뜯어고치는 등 궂은 일까지 김인숙선생의 어깨에 떨어졌다. 여름이면 선생은 지붕우에 올라가 기와를 얹고 겨울이 오기전에 천정우에 톱밥을 올려야 했다. 그럼에도 공연을 떠난후면 자식들이 고생한다면서 집에 있는 동안만은 장판을 닦는 등 자질구레한 일들마저 딸애들에게 시키지 않았다.

1975년 북경전람관 공연에서 가야금병창 왼쪽부터 가야금 첫번째 김인숙.

그 시기 선생네 가정은 부부의 로임이 꽤나 높았다. 하지만 선생은 검소하게 생활하고 멋을 부리지 않았으며 자식들에게도 우량한 전통을 물려주기에 최선을 다했다. 먹을것은 한밤중에라도 일어나 만들어주면서도 옷은 언제나 헐렁한걸로 사주었기에 자식들은 새옷을 입어도 이쁘게 입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 몸에 꼭 맞다싶으면 이미 해지거나 낡아서 색이 바랜 뒤였으니 말이다.

부모님들에게 있어서 선생은 효성이 지극한 딸이였다. 김인숙선생의 친정부모님들은 생전에 몸이 퍼그나 허약했는데 선생은 달마다 꼭꼭 생활비를 보내는외 1년에 한번씩 연길에 모셔와 건강검진을 받도록 하였고 몸에 좋다는 음식을 대접하면서 효도를 다하였다.

2010년 8월 북경자죽원에서 가족들과 함께.

가족애가 특별한 선생은 성악사업을 생명처럼 사랑하면서도 창작에 정력을 쏟고있는 남편을 위해 리직후에는 예술활동을 접고있다. 안국민선생이 만년에 보다 훌륭한 작품을 많이 창작할수 있도록 뒤받침해주는것이 가정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보람찬 일이라는것이다.  

《산 뢰봉》

1961년에 중국음악학원 성악학부에서 1년동안 연수를 하고 연변가무단 합창대 부대장으로 활약한 김인숙선생은 중국음악가협회 회원,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 리사,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으로 당선되면서 유명해졌지만 틀이 없고 남을 도와주기를 즐겼다.

당년에 김인숙선생은 명배우이다보니 어디를 가나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상점에 가면 판매원들과 고객들, 병원에 가면 의무일군들과 환자들…그들은 김인숙선생을 만나기만 하면 노래를 불러달라고 간곡하게 청을 들군 했다. 그때마다 선생은 그들이 듣고싶어하는 노래를 불러주면서 기꺼이 요구를 만족시켜주군 하였다.

주위사람들로부터 《산 뢰봉》이라고 불리운 선생은 남새를 사도 무더기로 사서 로인들만 사는 집, 병환으로 고생하는 집들에 나누어주었으며 김장철이면 동네집을 도와 배추를 다듬어주기도 하면서 좋은 일을 찾아하였다.

만년에 와서 선생은 홀로 사는 전우, 양로원에 들어간 선배들을 종종 위문하는것을 잊지 않고있다. 운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양로원의 선배를 찾아가 얼굴도 닦아주고 옷도 빨아주면서 양로원일군들의 일손을 도와주기도 하고 《불효자는 웁니다》, 《사랑아 어찌 늙으랴》, 《홍도야 울지 말라》 등 노래를 부르면서 로인들과 함께 울고 웃기도 하면서 로후를 진지하게 살아가고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중국조선어방송넷 2010-12-22 글 : 김학송 (전 연변극단 서기 겸 업무단장, 현재 연변가문단 창작실, 편극, 문학편집, 서류당안실 주임, 행정당지부서기)] 리영근(1930.12-2010.9)웃음의 빈 자리  —고 중국 조선족 문화거장 표연예술가 리영근선생을 추모하여  지난 2010년 9월 2일 웃음의 왕별 고 리영근...
  • 2010-12-29
  • 전국 발로 뛰며 정보 수집해 내년 2월 출간 예정(서울=연합뉴스2010-12-28 ) 구정모 기자 = 국내에서 중국동포들이 운영하는 상가의 연락처를 한데 담은 주소록이 최초로 발간된다. 중국동포들을 위한 신문인 한중법률신문의 김용선(34) 편집국장이 전국을 돌며 발품을 팔아 공을 들인 결과다.국내에 머무는 중국동포가 40만...
  • 2010-12-28
  • 《조선족의 독서무심에 그만 실망했습니다!》《독서삼매》 최고령수상자 송해숙인터뷰 [길림신문 2010-12-28 오기활 기자]도문에 《독서삼매(讀書三昧)》하는 70대 녀성이 있다. 독서삼매란 《책읽기에 골몰한다》는 뜻이다. 중국조선족 대문호 김학철선생은 《사람이 늙어가면서 쓰고 버린 건전지 같은 취급을 받지 않으려...
  • 2010-12-28
  • 고향건설을 사명으로 여기고[연변일보 2010-12-28 조창호 기자] —연변형봉시정공정유한회사 총경리 조동주씨 고향의 유기입 연변형봉시정공정유한회사 총경리 조동주(42세)는 고향에서 창업하여 고향마을의 유기입쌀산업과 관광산업의 발전을 적극 추진하고있다.조동주는 화룡시 숭선진 태생이다.  1986년에...
  • 2010-12-28
  • 만성 C형간염과 2형 당뇨 관계 연구에 전력 (흑룡강신문=하얼빈2010-12-23) 허문호 기자= 길림성 훈춘시병원 소화기내과에서 사업하는 리종섭(44세) 주임은 만성 C형간염과 2형 당뇨간 관계, 신경내분비와 면역학 등 연구에 두각을 내밀고 있다.   리종섭 박사는 1989년 길림성 장춘베쮼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의...
  • 2010-12-24
  •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부부 공동의 가사.양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고 국가개입을 통한 교육비 부담이 대폭 줄어들면 저출산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다고 말하는 중국 옌볜 출신의 김범송(44.金范松) 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흑룡강신문 논설위원으로 재직중인 김 교수는 이달 초 연구서인 '동아시...
  • 2010-12-21
  • 미술학원의 비전을 그리며[연변일보 2010-12-16 리련화 기자] -—연변대학 미술학원 리승룡원장을 찾아  미술학부 설립 60돐 행사 기획 그리고 연변대학 미술학부 창시자이자 저명한 화가인 석희만선생 서거 10주기 기념 행사를 준비중인 미술학원이 여느때보다 분망하리란것은 자명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빽빽...
  • 2010-12-17
  • [연변일보 2010-12-14]  세계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저명한 조선족 고고학자 김창주—김창주교수 "고고학은 상상력의 학문 재미있는 보물찾기 사람들은 고고학을 페쇄적이고 딱딱한 학문이라 생각하고있지만 평생을 이 학문에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는 200만년전 인류생존의 흔적을 발견하고 ...
  • 2010-12-15
  • 시인이며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상무부주석인 리성비의 이야기20대시절부터 시를 써서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하고 꼬박 10년간 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 주임직을 력임한적 있는 리성비씨  1990년대에만도 선후로 5권의 시집을 펴내면서 전도유망한 청춘파시인중의 한사람으로 자랑을 떨쳐가던 그는 최근년에 와서 길림성민...
  • 2010-12-14
  • 비엔나 황금홀에서    음악문화에 대한 심층리해가 뛰여난 예술인재 만든다  '동북 호른의 왕' 김룡백 수석 호른연주원 (흑룡강신문=하얼빈2010-12-10 채복숙 기자) 중국 문예계에서 ‘동북 호른(圆号)의 왕’으로 통하는 조선족 연주자가 있다. 흑룡강성가무극원의 수석 호른연주원...
  • 2010-12-13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