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조선민족의 정초자- 주덕해 (1)
김 혁 (소설가, 위인전기 “주덕해의 이야기”의 저자)
낯선 땅, 우수리스크에서 태여나다
주덕해는 1911년 3월 5일 로씨야 원동 연해주 우쑤리스크부근의 도베아라는 산간마을에서 태여났다. 주덕해의 원명은 오기섭(基燮), 원적(原籍)은 함경북도 회령군 팔을면 복색동이였다.
오늘의 우수리스크
“늪지대”라는 의미를 지닌 우수리스크(Usurisk)는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수리스크는 청나라때 “쌍성자(双城子)”라고도 불렀다. 그 리유는 이 곳에 두 개의 토성이 쌍둥이처럼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성과 남성으로 불리어지던 두 성은 금나라 시대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곳은 력대 중국 왕조의 관할에 있었으나 1860년 “중로북경조약” 체결의 결과로 짜리 로씨야의 령토가 되였다.
이곳은 또한 가난에 못이긴 조선의 리재민들의 이주가 시작된 첫 번째 지역이기도 하다.
19세기 70~80년대를 전후하여 함경북도와 평안 북도로부터 리재민들이 끊임없이 연해주에 밀려들었다. 1902년 연해주 관청에 등록한 조선 이주민들은 무려 3만2400여명에 달하였다. 두만강을 넘은 조선의 가난한 이주민들이 매서운 혹한으로 벼농사가 어려운 지역임에도 벌판을 감싸며 흐르는 수분하의 물을 관개해서 불모의 땅에 벼꽃을 피워 냈다.
오기섭의 아버지 오우서는 이곳에 먼저 와서 자리잡은 7촌숙부의 알선을 받아서야 도베아촌에 사는 로씨야 인의 밭을 소작으로 받아 부칠수있었다. 타향땅에서 본 기섭이를 비롯한 네 아들과 하나 외동딸이 그들 부부의 앞날이였고 희망이였다.
오기섭이가 8살나던해 이곳에서 근 10년간 살고있던 부친 오우서가 불행히도 토비들에게 살해되였다. 살길이 막연한 그의 어머니는 원 고향인 조선 회령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향에서도 역시 여의치못하여 이듬해인 1920년 2월에 다시한번 일가족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오기섭은 어머니와 세 삼촌을 따라 화룡현 수동촌(룡정시 지신향 승지촌)에 와서 정착하였다.
승지마을 주덕해 고향집 옛터
승지촌에 정착한 이듬해에 기섭은 어머니의 아량으로 어려운 형편에서도 세살 손우인 형님 기하와 함께 화룡현 공립 제14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소년시절을 기섭이는 매우 어려운 환경속에서 보냈다. 아침을 먹으면 저녁끼니가 없는 걱정속에서 어머니가 뜯어온 산나물과 들나물로 보리고개를 넘겼고 엄동설한에도 노닥노닥 기운 홑저고리와 바지에 짚신을 신고 다녔다. 게다가 가정의 큰 일군이였던 둘째삼촌마저 세상뜨면서 생활형편이 극히 어려워 4학년까지 다니고 월사금을 물수 없어 형님에 이어 학업을 그만두어야 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덕해는 형님과 함께 소달구지를 몰고 삯짐실이에 나섰다. 그들은 룡정과 회령사이를 드나들면서 목탄이며 량곡이며 돈냥이 되는것은 닥치는 대로 실었다. 이와중에 공장, 철도, 벌목장, 숯막들을 드나들면서 주덕해는 어디로 가든 가난한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득불 일본사람들의 예속밑에 우마와 같은 생활을 하는것을 보게 되였다.
(계속)
김혁 문학블로그: http://khk6699.blog.me
"문화시대" 201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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