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7세 나이에 연변대학에 입학,1980년 연변대학 부교장으로 임명되고 1986년 국무원 학위위원회에 의해 중국의 첫 조선언어문학박사생 지도교원으로 임명됐다.
1997년 한국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한 정 교수는 상금 10여만원을 헌납해 ‘정판룡 교육발전기금회’를 설립, 가난한 대학생들의 학업을 격려했다. 2001년 10월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도 11만원의 예금통장을 선뜻 장학회 리사회에 바쳤다.
‘중국조선족의 력사’라는 글에서 정판룡교수는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상을 ‘개혁개방속에서의 곤혹과 반성’이라고 개괄하면서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상을 조감해보면 위기감에 잠기게 되며 곤혹에 빠지기도 한다고 경종을 울린적이 있다.
정 교수는 중국조선족은 개혁개방이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 동방문화와 서방문화, 농경문화와 도시문화의 화합과 강등속에서 심각한 곤혹을 치르지 않을수 없었으며 우점을 발양함과 아울러 렬근성을 폭로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중국 조선족문화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많은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고 지적, 발굴한 문화재에 대한 연구, 채집한 전설, 민담, 민요에 대한 연구가 따라가지 못하고 민족예술, 민간신앙 등에 대한 연구가 따라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기의 전통문화 가운데서 귀중한 재부를 잃게 될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의와 리, 현실과 리상, 원칙과 구체적상황, 학문연구과 벼슬살이를 조화시킴으로써 이들 량자 평형 유지에 애썼다. 이를 체현하는 그의 ‘며느리론’은 조선에서 중국으로 ‘시집온’ 우리는 시집뿐만 아니라 친청일도 돌봐야 한다는것이다. 중국조선족 문화나 문학의 이른바 ‘이중성격’에 관한 견해도 바로 똑같은 맥락이다.
정 교수는 문학사저술, 기행문창작, 수필창작, 전기물창작 등 다양한 쟝르와 분야를 아우르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민족성원 모두로부터 애정과 흠모를 받을수 있었고 나아가서 력사가 기리는 인물로 남게 되였으며 따라서 자연히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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