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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종:영웅적민족 빛나는 발자취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6월30일 10시40분    조회:8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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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우종
영웅적 민족 빛나는 발자취

우리 민족 선배들이 북만땅에 남긴 영광스러운 발자취

  (흑룡강신문=하얼빈2011-06-30) 김철진, 김해란 기자 = 당창건 90돐에 즈음하여 북만지역(오늘의 흑룡강성)의 우리 민족 선배들이 당이 령도하는 혁명투쟁에서 남긴 영광스러운 발자취를 더듬어보기 위해 기자는 흑룡강성당사연구소 전임 소장인 김우종교수님을 만났다. 김소장은 82세 고령에 성위당사연구실 고문으로 ‘동북항일연구사’ 심열과 항일력사국제학술토론회 준비 사업에 바삐 보내면서도 많은 사료들을 준비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며 상세히 소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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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족들은 북만지역 당조직 설립과 인민들의 혁명투쟁 지도에서 선봉적인 역할 발휘

  조선족과 중국공산당은 특수한 관계를 갖고 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립되기 전 1920년 고려공산당이 상해에서 창당되였다. 그때 조선인은 대부분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할빈을 중심으로 한 북만지역은 소련과 린접해있는데다 중소가 중동철도를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었기때문에 소련과의 래왕이 빈번하였으며 10월혁명의 영향으로 맑스주의 전파와 로동운동이 가장 일찍 발전한 지역이기도 하다. 1923년 할빈에는 동북지역 최초의 공산당과 청년단조직이 설립되였다. 연변 룡정탄생인 조선족 첫 중공당원인 저명한 미술가 한락연(원명 한광우)은 1923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24년부터 1929년까지 심양, 할빈, 치치할 등지에서 당조직을 설립하는 사업과 문화계의 혁명활동을 지도하고 공산국제와 중국공산당과의 련락을 위한 비밀련락참을 조직지도했다.

  1927년 10월, 할빈에서 중공만주성위가 창립된 후 만주성위는 조선족의 혁명투쟁, 특히는 반일투쟁과 농민운동에 대하여 큰 관심을 돌렸다. 그때 조선공산당도 우리 성 일면파에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을 설립하고 동북지역 조선인 혁명활동을 지도했다. 1929년부터 할빈에 설립한 중공북만지위는 아성 해구에 있는 조공조직과 긴밀한 련계를 갖고 반제 반군벌 투쟁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1930년 공산국제의 지시에 따라 중국 경내의 조공조직을 해산하고 조공 당원들이 중공에 가입하게 됨에 따라 북만지역의 중공조직은 광범한 농촌지역으로 확대되였고 당원수도 몇 배로 늘어나게 됐다. 중공만주성위는 소수민족위원회를 설립하고 성위 위원인 리진민이 소수민족위윈회를 책임지고 조선족혁명사업을 지도했다.

  우리 성의 각 현 당조직을 설립하는 가운데서 조선족은 중심역할을 했다. 1931년, 녕안중심현위 설립시의 현위 서기는 김성(김책의 형)이고, 주하(상지) 현위 서기는 전봉래, 아성현위 서기는 리복림, 목릉현위 서기는 김서현, 밀산현위 서기는 지희겸, 요하현위 서기는 박원빈, 탕원현위 서기는 리춘만 등 모두 조선족들이였다. 이같이 조선족 당원들은 북만지역에서 당조직을 설립하고 인민들의 혁명투쟁을 지도하는 데서 선봉적인 작용을 했다.

  조선족들 항일투쟁시기 군정에서 요직 담당, 유격대 창건과 투쟁에서 골간으로 큰 공 세워

  1931년,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켜 동북땅을 강점할때 일본 관동군은 1개 사단과 독립수비대를 합쳐 2만명 정도의 병력을 갖고 있었다. 장학량이 령도하는 동북군은 30만명이나 되였는데 그중 정예부대 12만이 관내에 이동되여 장개석을 돕는 내전에 참가하고 동북에 있는 18만 병력은 동북3성 각지에 주둔하고 있어 무방비상태였다. 장개석은 일제침략자들 앞에서 부저항주의를 력설하면서 동북군이 일본군에 무장해제를 당하더라도 절대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로 하여 일제는 큰 싸움 없이 심양, 길림을 강점하고 북만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의 부저항정책을 반대하면서 일제침략자들과 싸울것을 인민들에게 호소했다. 중공만주성위는 할빈에서 각지 당조직을 령도하여 항일유격대 창건사업을 지도했다. 그때 동북지역의 당원은 2000명 정도였는데 그중 조선족당원이 85%를 차지했다. 만주성위 군위서기인 양림(김훈)이 남만, 동만의 유격대조직사업을 지도하였으며 북만 각지에서의 유격대 창건사업은 조선족당원들이 선봉작용을 했다. 1933년10월 주하(상지)유격대는 의용군 손조양부대 참모장이였던 조상지와 중공주하중심현위 군사부장인 김책의 지도하에 설립되였다. 유격대 창건시 13명 대원중 8명이 조선족이였으며 대장은 조상지, 당서기는 리복림이였다. 이 유격대가 발전하여 1936년 항일련군 제3군으로 되였는데 전성기에는 10개 사 6000명으로 동북항일련군중 으뜸으로 가는 강군이 되여 송화강 량안과 흑눈평원의 광활한 지역을 누비며 유격전쟁을 벌여 일본침략자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김책은 제3군의 정치부 주임으로, 리복림은 제3군 합동사령으로, 허형식은 제1사의 정치부 주임으로, 리태는 제2사의 정치부 주임으로, 주서범은 제6사의 정치부 주임으로 활약하였고 1938년 조상지가 소련에 간후 허형식이 제3군 군장을 담임하는 등 조선족 간부들은 제3군의 중요한 군정요직들을 맡고 있었다.

  1933년 4월에 조직된 요하유격대는 최석천이 대장, 김문형이 정치부 주임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40여명 대원 전부가 조선족으로 구성되였다. 이 부대가 발전하여 항일련군 제7군으로 성장하였는데 군장은 리학복, 참모장은 최석천, 선전과장은 김택, 제2사 정치부 주임은 김철우, 보충퇀 퇀장 겸 정위는 리일평 등 많은 조선족들이 군에서 요직을 맡았었다.

  1933년 10월 탕원유격대 설립초기 40명 대원중 33명이 조선족이였으며 리인근이 참모장직을 담당했다. 이 부대가 후에 항일련군 제6군으로 편성되였다. 군장과 정치부 주임은 한족인 대홍빈과 리조린이였고 제1사 사장은 마덕산, 정치부 주임은 성광해였으며 제2사 정치부 주임은 장흥덕, 제4사 정치부 주임은 오옥광 등 조선족 간부들이 중요한 직무를 담당했다.

  구국군과 자위군 부대를 기초로 조직된 리연록이 령도하는 제4군도 밀산유격대와 련합하여 황옥청(한형호)이 군정치부 주임, 박봉남이 당위 서기, 박덕산이 제4사 정치부 주임을 담당했으며 리춘근이 제2퇀 정치위원직을, 주덕해(오기섭)가 후근부 당서기를 책임졌다.

  주보중이 령도하는 제5군에서도 녕안유격대와 팔도하자 자위대의 조선족 투사들이 골간작용을 했으며 리광림이 제2사 정치부 주임을 담당하였고 후기에는 강신태가 퇀정치위원 제2지대 정치위원을 맡았고 김광협이 퇀정치위원, 김윤호가 제2로군 총지휘부 비서, 김경석이 동북당위원회 부서기 등 요직을 맡았다.

  당의 항일통일전선정책에 따라 사문동이 지휘하는 민중구국군이 항일련군 제8군으로 편성되자 제4군 2퇀 퇀장이던 김근이 제8군 1사 정치부 주임으로 되였으며 제5군의 퇀정치부 주임이였던 강동수가 제3사 정치부 주임, 강동순이 제2사 4퇀 정치위원으로 되여 제8군의 정치사상공작을 위해 기여했다.

  길림자위군 리화당지대가 항일련군 제9군으로 개편된 후 허형식이 제9군정치부 주임을 맡고 부대의 정치사상사업을 강화하고 9군2사를 골간부대로 양성했다. 제9군 군장 리화당이 변절할 때 제2사는 제3군과 함께 서부원정에 참가하여 후에 제3로군 제9지대로 편성되여 항일투쟁을 견지했다.

  금광로동자들로 조직된 기치중이 령도하는 항일군 명산대가 항일련군 제11군으로 개편될때 탕원반일유격총대 정치지도원이였던 김정국이 제11군 정치부 주임을 담당하였고 제6군 제2사 정치부 주임 장흥덕이 제11군 제1사 정치부 주임을 담당했다.

  동북항일련군 11개 군중에서 항일련군 제3군부터 11군까지 9개 군과 제1로군중의 김일성이 지휘하는 제2방면군과 진한장이 지휘하는 제3방면군도 상당기간 녕안 목단강지역에서 주보중이 지휘하는 항일련군 제5군과 련합작전을 했다.

  북만지역에서 조선족 공산당원들은 항일유격대 창건에서 선봉적인 작용을 하였으며 항일유격전쟁의 투쟁중 가장 간고한 시기에도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범적인 행동으로 끝까지 투쟁을 견지하여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데 관건적인 골간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 성공적인 전투로 북만지역에서 조선족유격대야말로 용감한 항일부대라고 옹호 받아

  유격대 창건초기 적수공권으로 일본군의 총을 탈취하여 자기를 무장하는 일은 참으로 목숨을 걸고 하는 모험으로 몇 십명 유격대가 몇 자루 안되는 총으로 현대화 무기로 장비한 일본군 대부대와 맞서 싸운다는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였다. 그때 당시 북만지역의 주민 대분분은 한족과 만족들이였는데 일제의 민족리간설에 속아 지주 토호들은 조선족 항일유격대를 공산비적이요, 일본놈의 앞잡이요 하면서 조선족유격대를 배척하였기때문에 구국군, 자위군 등 항일부대와의 련합이 항상 거절당하곤 했다. 조선족으로 조직된 요하유격대는 이 같은 곤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구국군 고우산부대가 요하를 점령하자 조선족과 한족이 련합하여 조직한 반일회를 통하여 구국군 원호사업을 잘하는것으로 차츰 그들의 신임을 얻게 되였으며 고우산 부대의 참모장, 공산당원인 왕위경을 통하여 드디여 구국군과의 련합에 성공하게 되였고 고우산부대의 특무대대로 편성되여 련합투쟁을 하게 되였다.

  1934년 1월 28일 구국군련합부대가 호림현성의 일본군수비대를 진공하는 전투에서 특무대대는 김문형대대장과 최석천참모장의 지휘하에 앞장서 진격하여 일본참사관 숙소를 점령하고 일본군 20여명을 격사하였으며 기관총 5정과 많은 무기를 로획했다. 이 전투에서 김문형대대장이 중상을 입고 소련에 호송되여 치료중 희생되였으며 허성재중대장 이하 25명의 조선족 전사들이 희생되였다.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구국군부대는 철수하게 되였는데 특무대대가 마지막까지 저격하다 퇴각했다. 이 전투 후 구국군과 지방 인민들은 조선족유격대야 말로 용감한 항일부대라고 칭찬하게 되였다.

  요하유격대가 인민혁명군 제4군 제4련대(团)로 개편된 후 유격전쟁을 우수리강 연안의 광활한 지역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1935년 9월 리학복련대장과 최석천참모장의 지휘하에 북진하던중 조선족마을인 신흥동에서 휴식하게 되였다. 이때 배를 타고 뒤쫓아 온 일본군의 습격을 받게 되였는데 유격대는 신속하게 뒷산의 가둑나무 숲속에 은신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런데 이때 산뒤로부터 위만군 대부대가 넘어오고 있다는 기별이 왔다. 유격대는 앞뒤로 적에게 포위될 위험에 처하게 되였다. 유격대는 위만군부대에 선전공작을 하면서 일본군에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일본군 다까기사령관 이하 29명과 위만군 10여명을 살상하고 철퇴했다. 이 전투에서 4련대 부련대장 박진우, 정치부 주임 리두문 등 16명이 희생되였다. 이 전투는 요하유격대가 설립된 후 단독으로 일본군과 싸운 큰 전투로써 인민혁명군의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되였고 인민들의 옹호와 지원을 받게 되였다.

  주하유격대가 창설된 후 유격구의 적자위단 경찰소 등을 숙청하고 근거지를 공고히 하였으며 합동지대로 편성된 후 빈현현성진공전투 등에서 명성을 떨쳤다. 1934년 6월 합동지대가 빈현동쪽 삼차하에서 휴식할때 300여명 일본군의 돌연적 습격을 받게 되였다. 적들이 토성밑까지 기여들어 기관총과 박격포로 성내를 미친듯이 공격했다. 조상지사령을 비롯한 부대지휘부가 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였다. 악전고투중 저녁무렵 유격대 기병대장 리근식과 3명 전사가 기관총을 들고 성밖으로 뛰여나가 일본군 18명을 까부시고 적의 기관총을 탈취하여 적들의 진공을 저지시켰다. 그래서 조상지 등 지휘부 성원들은 밤도와 무사히 철수했다. 조선족 기병대장 리근식은 장렬히 희생되였으며 그는 유격대 창설 후의 첫 소년영웅으로 칭송되였다.

  중공 탕원중심현위 조선족간부들은 유격대를 조직한 후 식량, 의복, 총, 탄약 등 물자지원사업을 적극 진행했다. 이 비밀이 일본특무들에게 발각되여 탕원현위 서기 배치운, 부녀위원 김성강 등 12명 간부가 체포되였다. 일본특무들은 그들더러 산에 올라가 유격대를 설득하여 자수하게 하면 꼭 잘살게 해줄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온집안 사람을 다 총살할것이라고 협박했으나 12명 동지는 끝까지 투항하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야수적인 일본특무들은 큰 구덩이를 파고 12명 투사를 생매장했다.

  북만에서 성공적인 전투실례로는 제7군 군장 최석천이 지휘한 1938년 가을 요리하습격전을 들수 있다. 배를 타고 요리하류역의 집단부락건설상황을 시찰하러 온 만주군군정부 고문 히노다께오 중장 이하 40여명의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가렬처절한 항일전쟁시기 수많은 조선족 렬사들이 자연과 적들과의 투쟁에서 보귀한 생명 잃어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과 집단부락정책으로 말미암아 항일유격근거지가 파괴되여 항일부대는 부득불 대소흥안령의 삼림속으로 이동하는수밖에 없게 되였다. 근거지를 떠나 서부원정을 하는 시기 항일투사들은 계속 적들과 전투하면서 굶주림을 참으며 여름에는 등에.모기떼에 뜯겨 피투성이가 되고 겨울에는 령하 40도의 림해설원에서 풍찬로숙하면서 인간생명의 한계를 넘는 고생을 이겨내였다.

  장기간의 피어린 투쟁중에서 많은 우수한 조선족투사들이 희생되였다. 그중에는 조상지가 소련으로 간후 제3군 군장을 담당하다 후에 제3로군 참모장이였던 허형식, 제7군 군장 리학복, 중공수녕중심현위서기 길동국, 조직부장 반경유, 중공벌리현위 서기로 공산국제 중국대표단으로부터 송강성위 서기로 제명되였던 리성림(김동식), 제3군 합동사령 리복림, 제4군 정치부 주임 황옥청(한형호), 제11군 정치부 주임 김정국, 제3로군 12지대 지대장 박길송 등 많은 조선족렬사들이 피로써 북만땅을 붉게 물들였다. 이 간고한 투쟁시기 조선족 녀성 대원들은 남성들보다 더욱 큰 곤난을 겪었으며 많은 투사들이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그중에는 민족영웅 조일만과 같이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후 중공주하중심현위 위원, 철북구구위 서기, 통하특지 서기를 담당하고 싸우다 영용히 희생된 리추악(김금주), 항일련군 제6군의 녀영웅 배성춘, 팔녀투강영웅중의 안순복, 리봉선 등이 있다.

  오늘 동북렬사기념관에 전시된 30여명 조선족 렬사들은 그들중의 극소수의 대표인물들이다.

  14년에 걸친 동북항일투쟁중에서 항일근거지와 유격구의 조선족인민들은 희생을 무릅쓰고 큰 공헌을 했다.

  해방전쟁시기 토비부대 숙청전투와 지방치안 유지에도 조선족들 앞장서 나서 주요한 역할 담당

  항일전쟁승리 후 조선족 인민들은 해방의 기쁨을 맛본지 며칠 안되여 국민당반동파의 앞잡이들인 토비들의 소란에 시달리게 되였다.

  북만지역에서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목단강시에는 소련홍군의 목단강진출과 함께 온 항일련군 간부 김광협이 소련군 목단강 위수사령부 부사령으로 있으면서 중공목단강지구위원회의 서기직을, 목단강군구 정치위원직을 맡고 있었다. 그의 지도하에 조선족들은 조선민족해방동맹(후에 민주동맹으로 개칭)을 조직하고 당조직의 령도하에 국민당토비를 숙청하고 지방치안을 유지하는 투쟁에 참가했다. 목단강군구 경위련대(警卫团) 2대대와 제14련대 3대대는 조선족전사들로 조직된 부대였고 녕안경위련대 2대대도 조선족전사들이 대부분이였다. 가목사시에서도 항일련군간부의 지도하에 600여명 조선족 청년들이 합강군구 경위련대에 참가했다. 조선족부대들은 목단강시내의 당정기관의 보위와 목단강부근의 토비숙청전투에 적극 참가했다.

  목단강시정부와 목단강성정부가 창립될때 조선족인 김동열이 부시장으로, 림송이 성민정청 부청장, 최두찬이 건설청 부청장으로 되였다.

  1946년 5월 15일 토비들이 폭동을 일으켜 목단강을 진공할때 보안련대2대대 조선족전사들은 토비반란진압전투에서 군구사령부를 보위하는 책임을 맡았다. 치렬한 전투중 부대대장 정우, 중대장 최인규 등이 희생되였다. 땅크부대 대장 김명신은 적을 추격하는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희생되였다.

  소련홍군이 할빈에 진출하자 항일장령 리조린은 소련군 할빈위수사령부 부사령, 중소우호협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여러 민족 인민들을 단합시켰다. 리조린의 부인 김백문은 조선족이다. 일찍 1942년부터 북만지역 조선족 선진청년들을 묶어세워 조선독립동맹 북만특위를 조직하고 사업하던 김택명(리상조)은 리조린과 련락하여 조선족부대를 조직했다. 이때 관내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부대가 동북으로 진출한 후 주덕해 등 의용군 간부들이 할빈에 도착하여 김택명과 합류하여 김택명이 조직한 부대를 기초로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건립하였으며 연안에서 온 팔로군부대의 통일령도하에 할빈시와 주변 지역인 빈현, 연수, 방정, 오상 등지의 치안유지와 토비숙청 투쟁에서 큰 공헌을 했다. 북만지역의 토비숙청전투에서 많은 조선족전사들이 희생되였다. 1946년 3월 18일 목릉현 마교하전투에서 조선족 지휘원, 전투원 93명이 희생되였고 9월 12일 할빈 사리툰전투에서 21명의 조선족 용사가 희생되였다.

  국민당 장개석은 동북인민들이 이룩한 승리과일을 탈취하려고 전면적인 내전을 일으켰다. 당의 호소아래 북만 각지의 조선족 청년들은 용약 참군하여 적들과 싸웠으며 조선족 농민들은 농사를 잘짓는것으로 전선을 지원했다.

  목단강시 교외 사도촌은 조선족이 213가구 살고 있었는데 136명 청년이 참군하였고 또 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부근의 관동군 창고와 전쟁판에 던져진 무기를 수습수리하여 대포 24문, 기관총 11정, 보총 500여자루, 탄알 500상자, 수류탄 240상자 등 많은 군수품을 전선에 지원했다.

  오상현 민락촌은 403가구에서 260명 청년이 참군했다. 경안현 제7군 모범촌의 김기현 로인은 큰아들이 참군하여 전사한 후 또 서슴없이 작은아들까지 참군시켰으며 두 로인이 애써 농사지은 쌀 1000근과 200원을 전선지원에 보내 성정부로부터 특등모범군인가족이란 영예장을 받기도 했다.

  그때 송강성 조선족인구는 17만 7000여명이였는데 1만2644명 청년이 참군하였고 1만2000여명이 담가대에 나가 전쟁자원봉사자로 전선을 넘나들었으니 매 한가정에 한 사람이 전선에 나가 싸운 셈이다.

  해방전쟁중 북만의 조선족부대들은 삼하강남전역, 사평, 장춘 해방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동북전역을 해방시키는 료심전역에서 큰 작용을 했다. 이때 북만조선족부대에는 단독으로 조선족 대대와 중대가 있었다. 료심전역에서 흑산저격전은 금주해방의 승리를 보장하는 중요한 전투였다. 그때의 흑산저격전에서 주력부대였던 제10종대의 28사 82련대 3대대와 83련대2대대는 조선족부대였다. 이 부대들은 저격전에서 적의 기계화부대의 강렬한 화력과 진공을 물리치고 진지를 고수했다. 그중 3대대의 8중대는 오상현에서 참군한 조선족전사들이였는데 큰 희생을 내면서도 진지를 사수하여 강철8련이란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기관총사수 최성걸은 강철투사라는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이 중대의 지도원이 바로 후에 오상현 부현장인 김교진이였다.

  동북을 해방시킨 후 조선족부대들은 제4야전군 사령부의 지휘하에 북경과 천진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하였고 1949년 4월 장강도강작전과 남경 상해를 해방시키는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50년 해남도 해방전투에도 참가했다. 제40군에 소속된 조선족전사들로 조직된 포병영의 360여명 투사들은 김영만대대장의 지휘하에 정확한 포사격으로 적군함들을 격퇴시키고 해안포대의 화력점을 까부셔 부대의 도해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조선족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선봉적, 모범적, 골간적 작용 발휘 영광스런 발자취 남겨

  우리 민족의 선배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북만지역에서 당조직을 발전시키고 인민들을 교육단합시켜 일제침략자들과 맞서 싸워 이 땅을 지키는 항일투쟁과 국민당반동통치를 뒤엎고 인민들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는 투쟁중에서 선봉적인 작용, 모범적인 작용과 골간 작용을 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하였으며 영광스러운 발자취를 남겼다.

  우리 선배들이 이런 자랑스러운 력사를 남길수 있은것은 오직 그들이 중국공산당을 굳게 믿고 공산당의 령도하에 영용히 투쟁한 결과이다. 공산당이 령도하는 길은 우리 민족의 해방의 길이였으며 승리의 길이였고 행복의 길이였다.

  우리 선배들이 간고한 력사의 시련속에서 민족의 행복한 장래를 개척하기 위한 투쟁에서 남긴 귀중한 경험은 민족 내부의 대단합과 우리 민족과 한족, 만족, 기타 민족간의 대단합이라 할수 있다. 이 대단합이 있었기에 강대한 일제침략자들과 맞서 싸워 이길수 있었고 국민당 반동통치를 뒤엎을수 있었으며 여러 민족과 어깨겯고 공동번영과 행복의 길로 나아갈수 있었다.

  오늘 우리들이 선배들이 개척한 슬기로운 길을 따라 당의 령도하에 일심단합하여 중화민족의 부흥과 번영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는 실제행동만이 선배들에 대한 기념과 보답으로 된다고 나는 믿는다.

  김우종 프로필

  1030년 1월 17일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 용원리에서 출생

  1936년 2월 중국목단강성 목단강시 사도촌으로 이주

  1946년 2월 혁명공작에 참가 민주동맹 사도촌 청년부장 소학교 교원

  1947년 목단강시련합중학교 교원 교도주임 부교장

  1954년 흑룡강성 교육청 중등교육 시찰원(과장급)

  1957년 중앙교육행정학원 졸업

  1957년 성교육행정학원 교연실 주임,정치계,배훈부 주임 당총지 서기

  1963년 중공흑룡강성위 당사연구실 부주임, 연구원

  1972년 흑룡강일보 조문보 부총편 당지부 서기

  1973년 성사회과학원 자방당사 연구소 부소장 소장

  1981년 중공흑룡강성위 당사연구소 부소장 소장

  1995년 리직 휴양

  리직 휴양후 당사연구실 성사회과학원과 할빈 공업대학 등의 고문으로 초빙되어 계속 학술연구사업을 지도함

  현재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편찬하는 《동북항일련군사》의 고문으로 최후 심열수정사업을 담당

  사회직무들로는

  공청단 송강성 제1기 성위 위원

  성정치협상위원회 제4,5,6기 위원 문사위원회 부주임

  전국당사학회 리사

  전국당사인물연구회 리사 당사 인물전 50권 편찬위원

  중국 항일력사연구회 리사

  중국 조선사학회 부리사장 조선족 발자취 총서 부주편

  주요 저술

  《동북항일련군투쟁사》(공저,주필중 한 사람)

  《동북항일렬사전》(3권집)주필, 저자

  《동북지역 조선인 항일력사사료집》(11권집)주필

  《조상지전》《안중근》(중조문),《안중근과 할빈》

  《우의의 장정》(중조문)등 60여권과 국내외에서 발표된 론문이 70여편 신문, 잡지에 투고한 글이 40여편

  현재 국무원 사회과학 유공전문가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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