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초기 공산주의자 리동휘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8월4일 16시20분    조회:860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리동휘
 
리동휘.
제1차세계대전의 포화가 세계를 뒤덮고있던 20세기초, 인류사상 가장 큰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났다. 1917년 부패한 짜리로씨야에서 사회주의 10월혁명이 일어나 첫 무산계급 독재정권을 수립하였다. 10월혁명의 승리는 각국 무산계급투쟁을 고무하여주었고 세계 피압박 인민과 피압박 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1919년부터 1922년 사이 제국주의침략과 수탈에 허덕이던 아시아 민족해방운동도 고조되였다. 조선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그리고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각국의 민족해방운동은 전례없이 고조되였다. 하지만 각국의 비폭력적 해방운동은 세계렬강의 비정한 외면과 제국주의, 봉건주의의 피비린 탄압을 받아 결국 실패하고말았다.

수많은 선각자들이 새로운 민족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부 의사들은 폭탄투척을 감행하고 일부 의사들은 일제 괴수와 추종자들에 대한 암살을 목적으로 한 의렬투쟁을 전개하였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강대국에 환상을 품고 외교적인 노력을 하였고 더욱 많은 선각자들은 중국 동북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무력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 시기 로씨야 10월 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여 아시아 각국에 맑스주의리론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의 진보적 인사들도 공산주의리론을 접하고 또 이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성재(诚斋) 리동휘(李东辉1873--1935년)는 1873년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출생하였다. 일찍 조선말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륙군 참령(参领)으로 지냈던 리동휘는 개화운동에 적극 참가하였고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리동녕(李东宁),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많은 학교들을 세우며 조선의 계몽운동을 적극 전개하던 그는 1912년 중국 동북에 망명하여 간민회에 가담하였고 1915년에는 로씨야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서 아시아지역 최초의 공산주의단체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사학자 권립 교수) 《1919년 상해에는 688명(조선인 총수) 우리 민족 선각자들이 맹활동하고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철혈단, 구국모험단, 애국부인회요 수많은 단체들을 결성하여 반일투쟁의 길을 모색하고있을 때 그해 9월 조기 공산주의자 리동휘가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1919년 9월, 동방의 빠리로 불리우는 국제도시인 상해에 도착한 성재 리동휘는 상해림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한편 공산주의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20년 5월 그는 상해에 있던 려운형(吕运亨)과 손잡고 공산주의소조를 건립하고 1921년 1월에는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거된다. 그리고 려운형과 김립(金立), 안병찬(安秉瓒) 등이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들은 상해에 《유신인쇄공장》을 세우고 맑스주의 저작을 번역, 출판하고 직접 진보적인 잡지도 꾸리면서 맑스-레닌주의를 적극 전파하였다.

한편 리동휘는 김하규 등을 연변에 파견하여 공산주의소조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연변에 첫 맑스주의연구소조 광명회가 룡정의 대성중학교, 광흥중학교, 은진중학교 학생들속에 건립되였다. 조기 공산주의자들은 로농혁명의 길, 로씨야 혁명의 길을 선전함으로써 적지 않은 선진인물들이 협애한 민족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회혁명을 지향하게 되였다.

민족주의사상에 제한되여있던 구춘선을 대표로 한 국민회의 많은 지도자들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연변에는 1300여명 조선족이 조기 공산주의단체들에 가입하였다. 이사이 리동휘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제2차대표대회에 출석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인 레닌을 만나 자금지원을 받기도 했다.

상해 림시정부 수립후 군무총장을 맡았던 리동휘는 1920년 국무총리로 나섰지만 좌우익간의 치렬한 대립에 커다란 실망을 느꼈다. 게다가 쏘련에서 보내온 지원금 40만불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겨 리동휘를 위수로 한 고려공산당은 상해림시정부에서 탈퇴하였다.

동북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을 계속 지도하던 성재 리동휘는 그후 쏘련으로 넘어가 활동하다가 1935년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新韩村) 저택에서 서거하였다.

(권립 교수) 《리동휘 선생이 상해에서 악전고투하고있을 때 다른 한 공산주의자 안병진선생이 특수한 사명을 지니고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1920년 모스크바 동방대학 출신인 안병진이 공산국제의 대표이자 로씨야 공산당대표인 위신스키를 안내하여 상해로 온다. 그는 북경과 상해에서 중국 공산주의선구자들인 리대소와 진독수를 만나 위신스키와 회담하게 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창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안병진은 그후 일제 옥중에서 십년간 고생하다가 출옥한후 조선의용대의 충직한 지하일군으로 계속 투쟁하였다.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이 있은 후 두 나라 혁명가들 가운데서는 공산주의 학습 열조가 일어났다. 쏘련 10월 혁명승리에 크게 고무된 공산주의자들은 맑스주의를 적극 선전하면서 로농대중에 의지한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고있었다.

중국내에 들어온 조선 혁명가들은 공산주의 활동을 적극 전개함과 동시에 중국의 진보적인 인사들과 적극 접촉하면서 《중한호조사(中韩互助社)》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중한호조사는 1921년 1월 한구에서 설립되였다. 다년간 한구에서 조선인들을 적극 도와주던 중국의 유명한 대 변호사 시양이 조선인 리우민(李佑民)과 합작하여 《중한국민호조사》를 설립하였다.

이해 3월 호남성 장사에서 《장사중한호조사》가 건립되였다.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의 한사람인 하숙형(何淑衡)이 장사중한호조사의 선전부 주임을 맡았고 모택동이 통신부 주임을 맡았다. 한편 광동에서는 《중한협회》가 설립되였는데 손중산의 아들 손과(孙科)가 나서서 조선인들과 함께 《중한협회》 기관지인 《광명》을 꾸리면서 조선혁명자들을 도와주었다.

전국 각지에서 호조사활동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1922년 8월 상해에 《중한호조총사》가 창립되였다. 전국 각지의 중한호조사를 통해 두 나라 혁명자들과 두 나라 인민의 단결이 이루어졌으며 동방 피압박민족의 대단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던것이다. 

신규식, 리동휘를 비롯한 조선혁명자들이 상해에서 구국의 길을 적극 탐구하고있을 때 중국의 정치중심지인 북평에도 많은 조선 혁명자들이 모여왔다. 리시영, 신채호, 안창호, 신규식, 김규식, 안광천을 비롯한 수많은 선구자들이 북평에 자취를 남겼던것이다.

                                                      옛 북경역 건물

북경에서의 반일투쟁 유적지답사  취재팀은 북경 서산의 향산공원에 모였다. 북경의 향산은 가을의 붉은 단풍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이다. 북경시와 20킬로메터 상거한 향산은 1186년 금나라 황제가 이곳에 사원을 축조하면서 인적이 닿기 시작하였다. 금대에 만든 사원 대영안사(大永安寺)가 있는데 현지인들은 감로사(甘露寺)라고도 한다. 그후 사원은 부단히 확건되면서 청나라 건륭 10년인 1745년에 와서는 정의원(静宜园)으로 명명되였다.

향산공원에서 취재팀의 력사고문인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가 북경에서의 조선인 혁명자들의 행적을 이야기해주었다.

《북경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옛날 전문으로 많이 들어왔다고 봅니다. 북경에는 좌익인물들이 많았습니다. 북경은 총적으로 리시영, 신채호, 안창호, 신규식, 김규식, 안광천 등 이런 사람들이 활동했는데 모두 좌익입니다. 림시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활동하였습니다. 사회주의운동자만이 림시정부를 반대한것이 아니라 리시영도 반대하였습니다. 또 향산은 리대소, 진독수와 관련되는 사람, 25년 좌우 북경 여러 대학에 조선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무정도 이곳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대부분 북경에 유가족이 많습니다.》

향산기슭에서는 공산주의활동이 적극 진행되였다. 특히 중국 신문화운동의 지도자이며 중국 공산주의선구자인 리대소가 조선혁명가들에 대한 동조가 많았다.  

북경 서산기슭에는 중국의 위대한 공산주의자 리대소릉원이 있었다. 아담한 정원에는 고목이 우거지고 흰 대리석 건물과 비석이 푸른 잔디와 꽃밭사이에 유난히 아름답게 안겨왔다.

최룡수 교수:《리대소는 중국 공산당의 창시인으로서 조선혁명에 대단히 관심을 가졌던분입니다. 5.4운동의 지도자의 한분이였던 그는 조선의 3.1운동을 적극 평가하고 북경에 오는 조선 젊은이들의 혁명사업을 도와주었고 20년 상반기에 조선 젊은이들을 만나 혁명사업을 도와 주었고 또 이 시기 김일학, 김상지 등 조선청년들을 향산자유원에 보내 혁명사업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산과 김성숙이 꾸리는 〈혁명〉잡지에도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3.1운동후 상해 림시정부는 미국에 있는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지만 리승만은 계속 미국에 남아 활동하면서 미국 월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제창에 맞추어 위임통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았다.

더우기 1920년 일본군이 조선독립군 탄압을 구실로 중국 동북에 출병하여 조선 독립군과 독립단체들이 붕괴되거나 분산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일본군과 동북의 봉건군벌 장작림이 결탁하여 많은 조선인을 학살하고있을 때 림시정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이 필요되였다.

1921년 2월초, 박은식(朴殷植), 원세훈(元世勋), 김창숙(金昌淑) 등 14인이 《我同胞에게 告함》이라는 시국선언을 발표한다. 선언은, 전국민의 의사에 따라 통일되고 안정된 정국을 만들고 단결된 힘으로 독립운동의 발전방향을 확정할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이해 4월 박용만(朴容万), 신숙(申肃), 신채호 등의 조직하에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회의(军师统一筹备会议)가 소집된다.

일제식민주의자들의 억압과 수탈에 더욱 적극적인 방법으로 대응하기 위해 혁명자들은 무장투쟁의 길을 확정하게 되였으며 대단결을 주장하게 되였던것이다.

중앙인민방송 김성룡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콘텐츠 강화.안정적 재정 확보 등에 역점"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2012년 처음 치러지는 재외국민 선거를 앞두고 중책을 맡게 돼 어깨가 무겁습니다."    전경희(51) 호주 동아일보 발행인은 30일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이하 세계한언) 신임 회장...
  • 2010-11-03
  • 《정말 감개무량 합니다!》 저명한 조각가 최수송씨를 만나 [길림신문 2010-11-02 오기활 기자]《두만강조각공원은 민족성이 독특하고 내용이 다양합니다. 연변에 조각공원이 있다는것 자체가 대단합니다. 더구나 연변의 첫 조각공원이 나의 고향 도문에 있으니 더욱 감개무량합니다.》 《반세기만에 꿈이 실현되였습니...
  • 2010-11-02
  • 한중일 근대사를 동아시아 입장에서 재조명합니다" “한나라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입장에서 근현대사를 재검토하려 합니다” 일본 히로시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북경 청화대에 조리연구원으로 있던 김준 박사가 내년부터 부교수로 연변대학 교단에 설 예정이다. 마침 서울대 강연을 위해 한...
  • 2010-11-02
  • 료녕성 안산시 달도만진 김태복진장을 만나본다 8년전, 김태복(남,조선족,51주세)씨가 료녕성 안산시 달도만진 진장으로 부임될 때만도 이 진은 1000여만원이나 되는 빚더미에 짓눌린 가난뱅이 진이였다. 그로부터 3년이란 시간에 빚을 몽땅 청산하고도 5년사이에 년간 재정수입을 1.47억원으로 기적을 창조해《새농촌건설의...
  • 2010-10-27
  • 중화초석양조선족예술단을 이끌고있는 김상규단장 북경 동성구 화평리 교통주민구역 활동실에서 늘 활동하던 북경조선족로인합창단을 최근년래 중화초석양조선족예술단으로 발전시키면서 국내외 이름있는 로인예술단으로 부상시킨 로인이 있는데 그가 바로 김상규단장이다. 일전 기자는 심양에서 김상규단장을 만나 그...
  • 2010-10-26
  • 기능성식품 개발에 박차  청도농업대학 박미자 박사  (흑룡강신문=하얼빈)리수봉 기자= 청도농업대학부교수 겸 중한식품바이오기술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박미자 박사(44세, 연변 화룡 출신, 사진)는 기능성 식품개발에서 두각을 내밀고 있다.   그의 주요 연구방향은 발효 및 발아 기능성식품 개발, 곤충식품 개발...
  • 2010-10-26
  • 흑룡강성 비공유제경제인사 우수 후선인으로조선족기업인 박광종씨  (흑룡강신문=하얼빈)윤선미 기자= 제3차 전성 비공유제경제인사 중국특색사회주의 사업건설자평의위원회가 23일 발표한 '제3차 전성 비공유제경제인사' 우수 후선인 30명 중에 조선족 기업인 박광종(사진, 40세, 경안현 출신)씨의 이름도 올랐다.  ...
  • 2010-10-26
  • 연변대학의 대표적인 문학교수 — 김호웅교수가을 치고는 유난히 화창한 날씨를 보였던 10월 21일, 기자는 아침 출근시간에 맟추어 일찌감치 연변대학교로 향했다. 김호웅교수와의 인터뷰가 예정되여있었던것이다.연변대학교 도서관 3층에 자리를 잡은 김호웅교수의 연구실에 들어서니 김호웅교수가 사람 좋은 미...
  • 2010-10-26
  • 신용있는 경영인 김명화북경동인당 연변의약상점유한회사 총경리인 김명화씨는 해마다 5000여만원의 판매액을 올리고 100만원에 달하는 세금을 납부하며 100여명 정리실업종업원들을 재취업시키고 50%에 달하는 종업원들을 사회양로보험에 가입시켰다.몇년간 김명화씨는 광범한 종업원들을 인솔하여 창업실천에 적극 투신했...
  • 2010-10-26
  • 나젊은 녀박사 병리학연구정상에 우뚝37살의 젊은 나이에 교수, 박사생지도교수로 발탁된 당찬 녀박사가 있다.   현재 연변대학종양연구센터 주임, 연변대학 기초의학원 병리학과 병리생리학 학과주임을 맡고있는 림정화교수는 2006년 1월, 37살에 교수, 박사생지도교수로 발탁되였고 당시 연변대학에서 가장 나젊은 박...
  • 2010-10-2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