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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리의 살아있는 전설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8월17일 08시43분    조회:8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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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신옥화


 



[연변일보 2011-08-16 장연하 장설화 기자] ]새하얀 머리를 곱게 빗어올린 쪽진머리 , 연분홍저고리에 자주색 한복을 차려입은 단아하고 절도있는 모습, 그리고 90고령의 나이가 무색할만큼 아직도 80여년전의 일들을 어제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조리있게 이야기하고있는 신옥화(93세)할머니, 새장구 하나, 쥘부채 하나로 관객을 울리고 웃겼던 당년의 명창답게 새장구로 가락을 맞추더니 어느사이 《진도아리랑》을 뽑는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 아라니가 났네…

처량하고 슬픔에 겨워 한없이 애절한 가락을 탄식하듯 애소하듯 뽑아내는 소리는 듣는 사람의 가슴을 파고들어 애간장을 녹인다. 판소리에 울고웃으며 수십년을 살아오셨던 신옥화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순간이다. 어느사이 할머니의 눈가에도, 듣는 이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인다…

우리 민족의 서도소리 남도소리를 모두 전공하고 중국조선족들에게 우리 민족의 민간음악과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음악을 널리 알리면서 민족문화의 살아있는 《전설》, 살아있는 《무형문화재》로 각광받고있는 신옥화할머니의 《한》과 《흥》, 《멋》이 어우러진 90여년 《아리랑》인생이 더더욱 가슴을 짠하게 파고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리하고싶어요!》

 

 
지금도 가끔 꿈결이면 《엄마야!》하고 울부짖으며 잠에서 깬다는 할머니, 그래서 아직도 어머니를 찾아 집을 나섰던 9살때 일이 어제일처럼 생생히 눈앞에 밟혀온다고 한다. 1919년 신옥화할머니는 한국 전라북도 전주시 구이면 흑석골의 한 가난한 농군의 딸로 태여났다. 5남매중 둘째였던 할머니는 어려부터 령리한데다 이쁘장하게 생겨 애명을 예쁜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가 9살나던 해 지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엄마는 어느날 새벽 젖먹이동생만 데리고 사라졌다. 잠결에 깨여나 엄마가 사라진것을 발견한 할머니는 맨발바람으로 《엄마!》하고 울부짖으며 엄마를 찾아 집을 나섰다. 맨발로 엄마를 찾아 뛰여나온 9살의 어린 할머니는 그후로 영영 집으로 돌아갈수 없게 되였다.

 

길거리를 방황하던 할머니는 11살까지 6번이나 남의 집 양딸로 옮겨다니며 갖은 수모와 학대 봉변을 당하면서 비참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할머니가 13살이 되던 설날, 할머니가 살고있는 13호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에 조선의 명창들인 리동백, 김정이 등이 공연하러 왔다. 공연을 보고난 할머니는 완전히 판소리에 빠지게 되였다. 그들처럼 마음속의 모든것을 끄집어내는 그런 소리를 하고싶었다. 그래서 양엄마한테 《엄마 나 소리하고싶었어요》하고 말했다가 그건 쌍놈들이나 하는거라며 된욕을 먹고말았다.

하지만 소리에 미친 할머니의 고집은 그누구도 꺾을수 없었다. 앞집에 사는 초동은 나무하러 산으로 갈 때마다 《경기도아리랑》을 불렀다. 이전에는 그냥 무심코 지나쳤는데 명창들의 소리를 들은 후부터는 그 노래에도 귀가 솔깃해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산천초목은 젊어나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간다…》

할머니는 초동이 부르는 《경기도아리랑》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부뚜막에서도, 물을 길으면서도 절구질을 하면서도 《경기도아리랑》을 불렀다. 그때부터 동네에서는 할머니를 보고 《아리랑계집애》라고 불렀다.

그후로 할머니는 마을에 거지가 와서 《장타령》을 부르면 그것을 따라 함께 불렀고 엿장수가 나타나 《엿장수타령》을 부르면 가위를 절거덕거리며 함께 불렀으며 모내기철이면 일군들과 함께 《농부가》도 불렀다.

《아라랑계집애》가 《춘향》으로

할머니가 소리에 완전히 넋이 나가자 양부모는 하는수 없이 할머니가 14살되던 해 인천인항권번에 보내 소리를 배우게 하였다. 이곳에서 할머니는 서울소리를 중심으로 녀창, 남창, 별곡, 긴잡가, 휘모리잡가 등 서도소리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였다. 할머니는 어렵사리 찾아온 배움의 기회를 소중히 여겼다. 그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인천만곡공원에 올라 소리를 연습하였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련략선이 들락거리는 창창한 바다을 마주하고 마음껏 소리를 쳤다. 엄마를 부르며 어린 가슴에 한으로 맺혀있던 소리를 마음껏 쏟아냈고 그 소리는 파도에 맞혀 메아리로 들려와 어린 나이에 엄마와 동생들을 잃고 고아로 떠도는 그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었다.

인천인항권번에서 공부한지 2년째 되던 해 서울극단에서 창극 《춘향전》의 춘향역을 맡을 배우를 물색하러 5명의 소리군이 권번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서울, 개성 등 크고작은 권번을 샅샅이 흁으면서 인천까지 왔던것이다. 그들은 인물이 예쁘고 판소리를 할줄 아는 처녀를 찾는다고 하였다. 모든 학생들을 둘러보던 그들은 할머니한테 시선을 멈추었다.

《 너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뭐냐?》

《저는 성은 없고 이름은 여러개 됩니다.》

9살까지 집에서 예쁜이 애명으로 불려졌던 할머니는 그때까지 자기 본명과 성이 무엇인지 몰랐다. 또 여러번 입양될 때마다 이름이 바뀌였으며 권번에 다닐 때에는 복순이라고 불리웠다. 신옥화라는 본명은 할머나가 썩 후에야 알게 된것이다.

할머니의 소리를 들어보던 서울극단의 소리군들은 《천구성》을 타고난것 같다고, 《조선팔도를 다니며 찾았는데 인제야 제대로 된 춘향역을 찾은것 같다》고 무릎을 쳤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오전에는 권번에서 서도소리를 배우고 오후에는 판소리 다섯바탕가운데서 가장 길고 어렵고 다채롭다는 창극 《춘향가》를 배웠다. 3개월후 원만하게 《춘향가》를 배워낸 할머니는 창극 《춘향전》에서 춘향역을 담당하여 조선팔도를 순회하며 근 20여차에 달하는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조직의 부름을 받고 연변가무단으로

1936년 출중한 성적으로 인천인항권번을 졸업한 신옥화할머니는 청진에 와서 조선의 이름난 명창 지만수선생에게서 가야금과 남도

 
소리를 배우게 되였다. 한번 배운 노래를 그대로 따라 부르고 가야금도 손가락이 안보일정도로 현란하게 튕기는 할머니를 보고 지만수선생은 귀하디 귀한 목소리와 재주를 가졌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남달리 뛰여난 명창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줬던 할머니는 19살 결혼하여 목단강으로 이주하면서 모든것을 접었다. 그러다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할머니는 남먼저 배워낸 《부녀가》를 앞장서 목단강시내의 조선족부녀들에게 보급하였으며 또 새로 창립된 목단강문공단에 들어가 연극 《탈선된 해방》을 무대에 올려 좋은 반향을 얻기도 하였다. 그때쯤 10년간의 결혼생활에 아이가 없다는 리유로 시집살이가 혹독했던 할머니는 3대 독자인 남편과 리혼할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갈라진 할머니는 목단강을 떠나 심양시 소가툰에 이주해 세상과 담을 쌓고 농사만 짓고 살았다.

그러던 1954년 연변에서는 주덕해동지가 《가장 빠른시간내에 민족민간예술을 발굴 정리하라》고 연변문예계에 지시하고 연변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찦차까지 문예사업일군들에게 내주면서 민간예술의 수집, 정리를 아낌없이 후원하였다. 이에 힘입어 연변가무단에서는 유명한 조선족민간예인들을 찾아 심옥화할머니가 있는 심양 소가툰까지 찾아왔다.

조직의 간곡한 부탁으로 할머니는 연변가무단에 와서 배우들을 지도하였다. 할머니는 근 한달반동안 음악조배우들한테는 장구와 가야금을 가르치고 무용조배우들한테는 민속무용을 배워주었으며 성악조배우들한테는 민요를, 연극조에서는 연극 《춘향전》을 지도하였다. 하루 10시간씩 팽이처럼 돌아치며 가르치다보면 온몸이 녹초가 되여갔지만 할머니는 민족예술사업을 춰세우는데 내가 배운것들이 큰힘이 되여간다고 생각하니 힘든줄을 전혀 몰랐다.

40여일이 지난후 연변가무단에서는 할머니가 지도해준 종목을 묶어 《민간의 밤》 시연회와 연극 《춘향전》 시연회를 연길에서 가졌는데 폭발적인 반향을 얻었다.

연변가무단에서는 시연회종목을 가지고 연변 각지를 돌며 공연하였는데 공연대가 가는 곳마다 명절의 분위기로 넘쳤다. 특히 연극 《춘향전》은 관중들의 절찬을 받으면서 근 300여차에 달하는 공연을 펼쳤다. 전통을 바탕으로 창작된 연변가무단의 공연은 중국 조선족사회의 박수갈채는 물론 전국 순회공연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1956년 수도 북경에서 있는 《전국음악무용주》 기간 신옥화할머니를 비롯한 민간예인들이 가르친 《농악무》, 《부채춤》 등 무용종목들이 북경무대에 올라 수도관중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이어진 전국순회공연에서 《장백의 노래》를 중심으로 신옥화할머니가 가르쳤던 서도소리 남녀표연창 《날개타령》등 종목들은 곳곳에서 조선족가무의 열풍을 일으켰고 이때로부터 조선족은 춤과 노래를 즐기는 민족으로 부각되였다. 전국순회공연의 가장 큰 공신이였던 신옥화할머니는 《전국음악무용주》와 전국순회공연에서 표연 1등상과 명창이라는 영예를 안고 가족들이 있는 심양으로 되돌아왔다.

연변예술학교 강단에 서다

1957년 연변예술학교가 창립되면서 신옥화할머니는 다시 조직의 부름을 받고 연변예술학교 전통음악교원으로 초빙되여 본격적으로 학교강단에 서게 되였다. 학교설립 초창기라 할머니는 직접 동북3성을 돌면서 학생모집에 나섰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전에 배운 소리의 가사들을 모두 정리하였다. 짦은 기간 할머니는 밤낮을 패가면서 창극 《춘향전》을 비롯하여 200여수의 판소리, 민요를 집필, 정리하였다

예술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할머니는 교안도 쓰고 교원일지도 매일매일 적으면서 학생들에게 우리 민족의 전통음악을 전수하는데 자신의 모든 정력을 바쳤다. 1958년 학교에서는 조선국립고전예술극장의 가야금연주가이며 명창인 지만수선생을 초청하였다. 오매에도 그리던 옛 스승을 20여년만에 다시 만난 할머니는 목이 메여 말을 이을수 없었다.

뜻밖에 남달리 재능이 뛰여났던 옛 제자를 같은 분야에서 다시 만나게 된 지만수선생님은 당시 연변예술학교 교장한테 《나같은 사람을 청할 필요가 없을것 같습니다. 서도소리 남도소리를 모두 전공한 사람은 조선의 임소양과 중국의 신옥화 둘뿐이니까요》하고 감개무량하게 이야기하며 할머니의 뛰여난 재능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그후 잇따른 기근과 학생들과 함께 하는 농촌하향, 그리고 산간벽지를 찾는 공연 등으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나날을 겪으면서도 할머니는 스승의 높은 평가와 기대를 가슴에 새기고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 국가 1급음악가로 활약하고있는 강신자, 전화자, 김선옥 등은 모두 할머니의 애제자들이기도 하다.

이런 할머니한테 학교측에서는 수많은 영예을 안겨주었다. 할머니는 선후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회의 위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로 추대되였고 해마다 부녀모범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그후 할머니는 문화대혁기간 《잡귀신》으로 몰리면서 돈화 쌍두대대에 쫓겨가 4년간 《로동개조》를 받다가 1974년 억울한 모자를 벗고 연길로 돌아왔다. 2년후 할머니는 정년퇴직 나이에 이르자 다사다년했던 연길에서의 생활을 접고 다시 심양 소가툰으로 돌아갔다.

1993년 1월 7일, 연변예술집성판공실과 연변예술학원 예술연구소에서는 공동으로 《신옥화녀사 예술생애 60돐 기념가창모임》을 마련했다. 오랜만에 다시 서는 무대이지만 할머니는 우리 소리의 명창에 손색없이 장장 4시간이나 창극 《춘향전》을 1막부터 6막까지 열창하였다. 장구와 춤을 추면서 한량없이 청하한 높은 소리로 냅다 휘잡으며 모든 청중을 울리고 웃게 해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2000년 할머니는 또 심양에서 《신옥화음악회》를 가졌으며 중앙텔레비죤방송프로에도 여러번 출연하였고 2007년 90세의 고령을 앞두고는 제자들인 강신자, 전화자 등과 함께 연변텔레비죤 음력설야회에도 출연하여 또다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수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연변에서 심양에 다시 돌아오면서 지금까지 퇴직금을 비롯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 몇백원으로 생활해오면서도 청고하고 꿋꿋한 자존심으로 전통음악에 대한 남다른 사랑으로 하루하루 버텨왔던 할머니, 그래서 90세 고령을 넘긴 할머니는 요즘도 소리를 배우러 연변 도문에서 심양까지 찾아온 한 젊은이의 열정에 탄복되여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가르치고있다.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무형문화재》 신옥화할머니의 애절비련한 《아리랑인생》은 톱질로 비벼 차근차근 말아들이는 애절한 그의 노래가락마냥 우리들의 애간장을 녹이며 오래도록 우리들의 기억에, 우리들의 가슴에 남아있을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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