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세월이 흘러도 《진달래》향기는 여전해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0월10일 09시30분    조회:915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최기옥

[길림신문 2011-10-09 전춘봉 기자]○ 연길진달래민족음식유한책임회사 최기옥리사장을 만나

연변의 수부 연길시 도심에 자리잡은 연길진달래민족음식유한책임회사(이하 진달래회사로 략칭)는 20여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음식업계의 굴지 기업으로 국내외에 명성이 자자하다.특히 이 회사의 브랜드 음식인 《진달래 랭면》은 연변 특유의 맛으로 인기가 높아 연변랭면의 대명사로 불리울 정도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일전 기자는 이 회사의 리사장이며 《진달래 랭면》의 원조로 알려져있는 최기옥여사를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그 발전 력사와 파란만장한 창업사를 추적해보았다.

조직에서 부르면 어디든 달려가다

진달래회사의 전신은 연길시제1민족판점,연길시실습판점으로 50년대에 건립되였다. 1989년에 일본상인과 합자하여 노래방과 불고기를 위주로 하였는데 경영에서 여러 가지 허점을 보이면서 파산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연길시음식복무공사에서는 당시 당위부서기로 있던 최기옥을 이 《골칫거리》 판점에 파견하기로 결정,그때가 1991년이였다.

《판점에 내려와보니 퇴직인원만 31명에 연휴로 있는 직원이 18명이였습니다.경영방식이 허술한건 물론 봉사질이 차하고 사업효률이 낮아 결손국면을 돌려세우기가 어려웠지요.그런가 하면 160여만원이란 빚을 짊어지고있고 거의 반년동안 봉급도 타지못해 모두 한숨만 쉬고있었습니다.》

새로운 사업터에 출근하여 상세히 알아보니 판점의 상황은 말그대로 억망이였다.하루에 드나드는 손님도 몇 명 안되여 680평방메터나 되는 건물은 허울뿐이였고 생기라곤 찾아불수없이 침체된 분위기였다.

심입되는 조사연구를 거치는 가운데서 최기옥은 이와같은 국면을 수습하기란 결코 쉽지않음을 실감,우선 새로운 지도부를 내온후 자신은《절대 당조직의 신임과 전체 직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않을것이다.》고 표시했다.그녀는 새로운 지도부를 이끌고 새 돌파구를 찾기위해 노력하는 한편 《로동기률 및 해당 징벌 규정》《고찰제도》《민족단결 약정》등 기업 운영에 적합한 각종 규정제도를 새로 제정하였다.이러한 규정들은 혼란된 관리를 바로잡고 산만한 기률을 다스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구체적인 경영에서는 《진달래 랭면》을 기둥품종으로 하고 중국음식을 보조로 하며 한식을 골간으로 하는 경영모식을 도입,조선족고객과 한족고객을 모두 념두에 두어 고객유치에서 현저한 효과를 보았다.그리고《봉사는 근본이고 질량은 생존의 기본이며 고객을 황제를 모시듯하라》는 경영리념을 확고히 수립하여 매 직원들이 행동에 옯기도록 교육하였다.

직원들이 봉급도 제대로 타지못하고 생활복지라고는 더구나 운운할 수 없었던 어려운 시기, 매일 소침해있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고 최기옥은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녀는 첫 직원대회에서 나는 여러분들을 잘 살게 하려고 온 사람이다, 잘 살려면 모두 힘을 합쳐 돈을 벌어야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토해 뜨거운 발수갈채를 받았다.그녀는 또 얼마 안되는 자금을 깡그리 모아 밀린 봉급을 내주는 동시에 매 직원들에게 정수기와 텔레비를 사주는 등 파격적인 복지를 베풀어 직원들을 고무격려하였다.

경기침체로 줄곧 연길시음식복무공사 산하의 《골칫거리》판점으로 평판이 나있던 진달래 회사는 이렇게 새로 부임된 리사장겸 당지부서기인 최기옥에 의해 올바른 궤도에 올라서면서 차차 생기를 띠게 되었다.

브랜드 전략으로 독특한 맛의《진달래 랭면》을 창조

일찍부터 조선족음식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최기옥은 기회를 놓치지않고 민족특색이 있는 브랜드 음식 창조에 총력을 기울였다.불고기,떡류,개고기,랭면을 비롯해 조선족특색의 음식이 많고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울수있는 음식은 랭면이라고 단정했다.

《우리 민족의 전통 음식인 랭면은 고려시대에 나타난 것으로 추적되는데 그 력사가 유구합니다.지금 보면 그 종류가 많고도 많아 그 제조 방식이 지방마다 다르며 맛도 가지각색입니다.허나 연변지방에서 가히 브랜드라고 내놓을수 있는 랭면은 없었습니다.어떻게 하면 연변뿐만아니라 중국 나아가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인정받는 랭면을 만들어낼수는 없을가?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유일하게 민족의 것이라면 당연하게 세계적인 것으로 될수있다는게 최계옥의 소견이였다.그녀는 앞으로 진달래회사의 성공여부는 브랜드 제품 창조에 있다고 인정하고《브랜드를 창조하자》라는 발전전략을 내세웠다.

조선족들이 즐겨먹는 랭면은 종래로 면발,육수,조미료,색상 등 몇가지 요소에서 인정을 받아야한다.그 제조 과정이 복잡하고 기술적인 함량이 높기에 누구나 쉽게 손을 댈수있는 음식이 아니다. 최기옥은 우선 기존의 랭면 맛을 바탕으로 넓은 범위의 시장조사에 나섰다.연변 전 지역을 섭렵하며 수많은 랭면의 맛을 경험했다.랭면마다 맛이 달랐고 각기 장단점이 있었다.그 과정에 랭면은 아직도 개발잠재력이 있으며 기존의 랭면을 원자재로부터 제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혁신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사업고찰이 끝나 돌아온후 그녀는 랭면에 필요한 모든 원자재를 새롭게 조절하고 전문 인원들을 초청하여 일부 기술적인 문제들을 함께 연구하였다.보다 쫄깃쫄깃하고 부드러운 면발을 만들기위해 수백차나 되는 실험을 거쳐 몇가지 랭면가루의 배합비률을 새롭게 찾아냈으며 육수와 각종 조미료의 조화로부터 보다 독특한 맛을 얻기위해 수없는 실험을 거듭하여 그 비법을 새로 장악했다.

한편 먼저 직원들에게 맛을 보게하고 다음 고객이 들어오면 식사가 끝난후 반영을 듣는 일도 잊지않았다.최기옥은 직접 나서서 알아보고 어떤 의견이든 제기하면 즉시 조치를 취했다.한 고객이 육수물에 좀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하자 즉시 대량 사용되는 물에 문제있다고 판단, 즉시 원가가 많이 들어도 고급광천수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흡취하면서 마침내 《진달래 랭면》이라는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게 되었고,이는 진달래판점의 운영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고심 끝에 고고성을 울린 이 랭면은 식탁에 오르자 종래 없었던 쫄깃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으로 고객들의 입맛을 돋궈 불티나게 판매되였다.무더위 날에는 하루 만그릇 이상 팔렸다니 고객들이 어느 정도 선호하는가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톡톡한 수입으로 3년 만에 빚을 깡그리 청산하는 쾌거도 이룩했다.현지인뿐만아니라 외지 지어 외국의 유람객들도 찾아와 맛을 보게 되면서 그 명성이 국내외에 퍼지게 되었으며 원조인 최기옥이라는 이름도 날개라도 돋친듯 넓은 범위에 전해졌다.

오늘 《진달래 랭면》은 일약 브랜드 음식으로 자리를 굳혀 그 상표가 국내뿐만아니라 일본,미국 등나라에 등록되여있다.또 선후하여 《중화의 명음식》《중화의 로상표음식》《성급무형문화재》칭호를 수여받았고 올해 최기옥리사장은 연변자치주인민정부로부터 주급 문형문화재 항목에 입선되여 조선족랭면 대표적인 계승인으로 지정받았다.

베풀며 사는 인간은 행복하다

《남에게 베푼 후에는 그즉시로 잊어버리라》이는 최기옥리사장의 삶의 철학이기도 했다.그녀는 일상 생활에서도 고귀한 풍격을 보여주면서 숱한 미담을 엮어냈다.

외지에서 온 한 한족직원이 결혼하게 되었는데 부모가 옆에 없어 난감한 처지에 있게 되었다.그 정황을 안 최기옥은 선뜻 나서서 가장의 역할을 하여 한족의 풍속습관대로 결혼식을 원만이 치렀다.그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최기옥을 줄곧 부모인가고 생각하였다.직원들의 세세한 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때를 놓칠세라 돌봐주었다. 회사의 한 녀 직원이 곧 해산하게 되자 최기옥은 즉시 집사람들에게 병원에 호송하라고 알리고 자신은 먼저 가서 병원 수속을 끝마치였다.그녀는 밤늦도록 산모를 거들어 주고는 애가 안전하게 태여난후 묵묵히 피곤한 몸을 지탱하며 자리를 떴다.전혜숙이라는 한 직원은 생활이 구차하여 어린 딸애를 데리고 농촌에 가 소일거리를 하면서 생활을 유지하고있었다.그 정황을 들은 최기옥은 즉시 그를 회사에 출근하게 하고 집을 얻어주었을뿐만 아니라 딸애에게는 학용품을 갖춰주어 태평소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어찌 이뿐이랴. 해마다 3명의 불우학생을 찾아 매달 200원이라는 생활비를 부쳐주었는데 지금까지 15년 동안 지속되고있다.일단 시작하면 고중을 졸업할때까지 끝치않고 보내주지만 학생들을 한번 도 본적은 없다.단지 리우라는 한족학생이 어느 한번 중앙의 령도들이 왔을때 그앞에서 최기옥이라는 조선족아줌마가 자신한테 생활비를 보내고있다는 말을 해 한번 만났을뿐이다.그외 다른 학생들도 생활비를 받으면서 대체 어떤 사람이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는지 지금도 모르고있다.최기옥은 앞으로도 불우학생을 돕는 일을 계속 이어갈것이라 다짐했다.

《저의 집은 7남매로 저는 형제중 넷째에 속합니다.아버지 혼자 벌어서 살다나니 째지게 가난하였지요.지금은 형편이 많이 좋어져 남을 도울수있는 힘이 있기에 생각 끝에 불우학생들을 돕기로 하였습니다. 》

최기옥은 경상적으로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서로 관심하고 도우면서 화목을 도모해야한다고 말하면서 자신부터 행동에 옮겼다.어느 직원이든 생일날이면 하루 휴식을 주고 계란 10근을 증정하였다.해마다 교사절이면 료리사들을 위로하였으며 로인절에는 퇴직인원들을 위한 축하연을 베풀었다.그외 3.8부녀절,5.4청년절,8.1건군절,7.1절 등 명절을 잊지않고 뜻깊은 모임을 가져 위로하였다.진달래 회사는 선후하여 《전국 두가지 사랑 두가지 평선 선진기업》《전국 믿음기업》《전국 백성 만점 가짜 없는 시범단위》《전국 질량관리 우수기업》《전국록색음식기업》등 칭호를 수여받았다.최기옥가정은 《중국 행복가정》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은후 중국56개 소수민족에서 첫순위로 10대 행복가정에 선정되여 전국적인 행사에 참가하는 영예를 지니기도했다.

2005년 중앙텔레비죤 방송국 제1채널에서는《진달래》라는 동명의 드라마를 제작,그중 주인공의 원형 하나로 최기옥리사장이 등장해 감동적인 장면들을 엮어냈다.

진달래 회사에서는 이몇년간 선후하여 홍10자회,희망공정,재해구,불우이웃돕기에 주동적으로 100만 원이라는 기금을 기부하여 민영기업으로서의 사회적인 책임감을 충분히 체현하였다.

일심전력으로 사업에 몰두하여 혁혁한 성과를 올린 최기옥은 선후하여 전국로동모범,전국3.8홍기수,전국민족단결선진개인,성우수공산당원표병 등 칭호를 수여받아 찬탄과 부러움의 눈길을 한몸에 지녔다.

글로벌 기업으로 매진

1989년과 1998년의 두차례나 되는 경영기제 전환을 통해 경영부진으로 결손을 보던 자그마한 국영기업은 오늘 규모가 비교적 방대한 유한책임회사로 탈바꿈하였다.현재 진달래회사는 본점의 영업면적이 680평방메터로부터 3500평방메터로 늘어났으며 직원은 70명,분점까지 합하면 300여명에 달한다.도문,훈춘,장춘,북경,상해 등 지에 분점이 있어 당지인들의 큰 환영을 받고있다.

한편《진달래 랭면》의 붐이 일기라도 한듯 도처에 동명의 랭면집이 나타나 적지않는 물의를 일으켰다.산동의 어느 도시에 같은 간판이 걸려있기에 사람을 보내 음식점의 경리가 누군가하고 물었더니 난데없이 최기옥이라 했다.그의 말에 의하면 연길진달래랭면의 비법을 전수받아 경영하고있다는것이였다.최기옥은 이와같은 불법경영에 어이가 없었지만 시종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사람을 파견하여 《진달래 랭면》은 이미 그 상표가 등록되여있기 때문에 이는 불법이며 더욱이 원조《진달래 랭면》에 먹칠하는것이라는 등 도리를 설명해주어 가맹점 혹은 분점형식으로 하여줄것을 제의하였다.

《모두 고향을 떠나 창업에 뛰어든 사람들이라 좀 리해는 가지만 낯도 코도 모르는 사람이 우리의 이름으로 진달래 랭면 간판을 건데 대해서는 제지하지않을수가 없었습니다.누구든 가맹점으로 들어오겠다면 우리는 환영합니다.보다싶이 그 몇 개의 가맹점이나 분점이 잘되고있지않습니까!》

요즈음 외국에도 류사한 사건이 있어 어떻게 대체할것인가 궁리중에 있다고 최기옥리사장은 한마디 덧붙혔다.한국 가리봉동에 《원조 진달래 랭면》이라는 간판이 있는데 조사에 의하면 이는 절대 연길진달래 랭면의 《원조》가 아니며 또 전에 연길 진달래 랭면에서 일했던 직원이 비법을 전수했다는 등의 론리는 설립되지않는다고 말했다.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이런 행위는 위법행위로서 정종《진달래 랭면》의 명예를 보호하며 진달래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부득불 법률이라는 무기를 들지않을수없다고 그녀는 부언했다.

회사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려면 사람이 관건이기에 최기옥은 학습과 인재양성에 각별한 중시를 돌렸다.그녀는 6000여원이란 자금을 들여 각종 전업 선적들을 사들였으며 직원들을 계획적으로 길림,장춘,대련,할빈,심양,북경 등 지에 보내 학습과 고찰을 진행하도록 하였다.또 12000원이란 자금을 투자하여 4명의 중급간부들을 연변대학 기업관리 과정에 연수로 보냈고 2명의 료리사를 장춘,길림에 보내 기술을 배우게 하였다.본인도 학습에 게을지않고 10여년동안 《오늘의 관리》《오늘 경제》《정책 가이드》《지혜》등 잡지를 읽고있다했다.

진달래 회사는 새로운 항목 개발에도 진력하고있다.랭동창고,전자유희 등 시장 잠재력이 있는 항목을 이미 개발했거나 개발중에 있다.

최기옥리사장은 고향이 연길시,1972년도에 연길시 신풍촌에 하향한바있으며 남다른 사업열정과 능력을 보여줘 만 19세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도시에 올라온후에는 선후하여 승리판점,음식복무공사,민족호텔 등 부문에서 부경리,당지부서기,당위부서기를 담임하였다.

20여년전 조직의 배치에 의해 진달래 판점의 리사장겸 당지부서기로 부임되여온 최기옥리사장은 진달래 랭면과 끊을수없는 인연을 맺어 오늘까지 정녕《랭면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그가 있음으로 하여 연변조선족자추지의 수부 연길시 도심에 뿌리내린 《진달래》는 그 향기 잃지않고 세월과 더불어 더 활짝 피고있는게 아니겠는가!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장백산 기슭에 뿌리내린 미인송중국전역에 조선민족 문학 알리는 한 상하이지식청년 (흑룡강신문=하얼빈) 윤운걸 길림성 특파원 = "불의에 물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관용을 베풀면서 살아가고 있는 진설홍 번역가가 돋보인다"라고 연변작가협회 우광훈 작가는 말하면서 "진설홍 번역가는 원작에 가...
  • 2010-03-15
  • 한 녀류작가의 희로애락  연변작가협회 창작실 주임 리혜선에 대한 이야기 련속 두기나 중국작가협회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고있는 리혜선씨 1980년대 중반에 단편소설 《눈내리는 새벽길》을 《연변문예》에 발표한것을 계기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지난 25년간 부지런히 글농사를 지으면서 볼거리가 있는 작...
  • 2010-03-13
  •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 교정은 물론 전국에  널리 울려퍼지는 노래,   40, 50대는 물론 20, 30대들도 많이 불러온 이 노래는 작곡가 동희철선생에 의해 작곡되고 《20세기 중국소년아동 10대가요 》등재되면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것이다.이미 신문에 나갔는데 또 취재를...
  • 2010-03-12
  • 최영원의 《련환화전기관》을 찾아서 ㅡ조선족이 북경에 꾸린 첫 개인박물관3월 7일, 필자는 일요일 휴식을 리용하여 CCTV의 이름난 아나운서이며 저명한 조선족 수장가인 최영원선생의 첫 공익성적인 개인박물관ㅡ《련환화전기관(连环画传奇馆)》을 찾아 떠났다. 비록 붐비는 뻐스와 지하철...
  • 2010-03-10
  • 中에 조선족 문화 알리기 한평생 “이번 中정협서 박물관 건립 제안” 유일한 조선족 정협상무위원 이승숙 씨“조선족박물관 건립을 제안합니다.” 3일 오후 중국 베이징(北京) 제11기 3차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정협)가 열리는 인민대회당 입구에서 만난 이승숙 위원(67·여...
  • 2010-03-10
  • 반금시 제2인민병원 리홍수원장   반금시 사상 첫 조선족석사연구생 도사로 2002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반금시제2인민병원 원장에 선임되며 료녕성 의학계의 주목을 끌었던 리홍수씨는 2006년에 중국의과대학 박사과정을 마쳐 반금시 위생계통의 첫 박사로 되였고 지난해에는 료녕의학원 연구생원의 석사연구생도사로 ...
  • 2010-03-09
  • 조선족금융리재의 든든한 뒤심이 되여―중국은행 민족지행 행장 남해금씨의 이야기《조선족들의 금융거래에 편리를 도모하고 상업수요를 만족시키며 민족경제발전에 저그마한 힘이라도 기여하는것이 저의 리상이였습니다. 마침내 그 리상을 실현할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여 가슴이 뿌듯합니다.》 날마다 수없이 드나드는 조선...
  • 2010-03-08
  • 조선족가요계에 떠오른 새별 ― 연변가무단전직가수 강화의 이야기 우리 민요를 불러 묵직한 상을 수차례 수상한 연변가무단 가수 강화― 어려서부터 음악에 싹수를 보이기 시작한 그는 4살때에 이미 바이올린을 배우며 음악에 접근하였고 소학교에서 가수의 꿈을 가지게 되였으며 부모의 지지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6년...
  • 2010-02-15
  • 비전을 향한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연길시 방생진료소 소장 방산옥 박사에 대한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김해란 기자 = "그는 또 환자들을 방문, 병세를 관찰해 나갔다. 치료효과가 좋은 환자들을 보면서 난치병인 전립선 질병과 골반염증 치료에 대한 희망에 들뜬다. 아울러 전립선 임상과정에서의 전립선액의...
  • 2010-02-11
  • 의술연구와 환자진료에 최선을—연변대학부속병원 소화내과 부주임 임분옥간장, 담낭, 이선, 위장도염증과 궤양, 종양 등 질환을 주로 진단하고 치료하고 있는 연변대학부속병원 소화내과는 높은 의술과 량질봉사로 환자치료에 최선을 다해 사회상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고있다. 여기에는 소화내과 부주임 임분옥박사...
  • 2010-02-1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