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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인 박만복과 그 시대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1월7일 13시54분    조회:6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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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박만복

—우리 민족 축구사에 간과할수 없는 족적 남겨

소시적부터 남다른 축구재질 뽐내

박만복원로는 1935년 11월 4일(음력) 왕청 하마탕(북하마탕) 일툰(해방후 녕안툰으로 개명)이라는 마을에서 4남2녀중 넷째아들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축구일가로 불리우는 아버지, 삼촌, 형님들의 영향으로 헝겊뽈(당시 고무뽈이 없었다고 한다)을 다루며 축구재능을 읽혀갔다. 소학교시절부터 어린 만복이는 학교축구팀 일원으로 활약했다. 대흥구중학시절에도 학교축구팀의 중견선수로 활약했으며 졸업뒤 축구실력을 인정받아 룡정고중(당시 연변제1고중)에 뽑히우는 행운을 지닐수 있었다.

박만복은 이때로부터 정규적인 축구훈련을 받을수 있게 됐다. 채송철선생의 수하에서 만복이의 기량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1953년 졸업당시 연변에서 처음 청년축구팀을 조직하였는데 그도 선발되여 이해 3월, 팀의 주장으로 상해에서 거행된 전국 11개 성, 시 청년축구경기에 참가했다. 과외축구팀에 불과한 연변축구팀은 그 경기에서 준우승을 따냈다. 이로 인해 공화국창건이래 처음으로 중국에 《연변이란 조선족집거지구가 있고 축구도 아주 잘한다》는 이미지를 전국 각지에 심어줄수 있었다. 당시 감독 지휘봉은 축구원로 박로석이 잡았다.

선수시절 《로케트》라는 별호를 가져

전국 11개 성, 시 청년축구경기에서 두각을 내민 박만복은 24명(조선족 7명)으로 구성된 제1기 중국청년축구류학대표단과 함께 웽그리아로 향발하는 행운을 지녔다. 박만복은 중국청년팀의 일원으로 로므니아, 벌가리아, 동부독일, 체스꼬슬로벤스꼬, 알바니아 등 나라 축구팀과 자주 평가전을 치르군 했다. 특히 1955년 뽈스까 수도 와르샤와에서 열린 제5회 세계청년련환절 개막식 축구경기에서 박만복을 포함한 중국청년팀 수비선은 그 탄탄한 수비력으로 하여 《깨뜨릴수 없는 만리장성》이란 별호를 갖게 됐는데 그 중앙수비가 바로 박만복이였다. 당시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으로 있었던 하룡원수가 이 경기를 친히 관전했다. 웽그리아류학시기 박만복은 웽그리아국가팀 감독으로부터 중국청년팀의 《로케트》로 불리우게 됐다. 약 1년 남짓한 류학생활에서 박만복은 웽그리아 중앙체육훈련반에서 기초리론 강습을 받았으며 1954년 4월부터 웽그리아 수도 부다뻬슈뜨에서 정식으로 리론을 실천에 옮기는 실습에서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다. 1955년 10월 귀국후 웽그리아로 류학갔던 성원을 기반으로 국가팀을 구성하였다. 박만복은 이때로부터 나라를 대표하여 구쏘련, 동구라파, 동남아시아 등지의 축구장을 전전하면서 조선족으로서, 국가축구팀의 주력으로서 영예를 빛내갔다. 국내에 돌아와서는 북경팀의 선수(변선 수비수)로 뛰면서 1957년 전국축구갑급련맹전 우승과 1959년 제1회 전국경기대회 축구경기 3등을 하는데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다.

웽그리아 류학시절

박만복은 1957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건장제를 실시할 때 중국축구계의 17명 동료와 함께 건장칭호를 받게 됐다.

감독으로 있던 나날 수많은 인재 배출

1959년 10월 10일은 박만복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날이다. 이날 남경 오대산에서 훈련중이던 국가팀과 전국기관차팀이 평가전을 가졌다. 이 경기에서 박만복은 정강이 큰뼈가 끊어지고 작은 뼈가 금이 가는 큰 부상을 입게 된다. 축구선수의 생활도 이때 접게 되는것이다. 박만복은 두달간 남경에서 치료를 받고 지팽이에 의지해 북경으로 돌아왔다. 이후 상처가 나은 뒤 2년간 북경팀의 조리감독으로 있으면서 경험을 쌓아갔다. 1960년 박만복은 북경 청년2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 시기 박만복은 《연변축구팀은 용맹완강하지만 기본기가 없다》는 《비아냥》을 수차 접하면서 우리 민족이 집거해 사는 연변의 축구부터 춰세워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1962년 8월경 당시 길림성의 체육을 주관하던 장문해 부성장으로부터 길림성팀을 맡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왔다. 북경의 우월한 대우, 훈련시설, 개인 발전전도 등을 뿌리치고 박만복은 서슴없이 연변(당시 길림성팀 연변서 훈련)으로 달려왔다.

길림성팀의 사령탑을 잡은 박만복은 길림성팀 선수들이 속도가 빠르고 작풍이 완강하며 체력이 왕성하지만 기전술이 차한 페단에 근거하여 유럽식기전술을 팀에 주입했다. 하지만 그 기전술을 받아물지 못한 길림성팀은 1963년 전국축구갑급리그에서 강급해 을급으로 내려가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뒤 반복적으로 기전술응용을 교정한 결과 1964년에 인차 을급리그 2등 신분으로 갑급에 올라왔고 1965년에는 중국조선족 축구력사에서 휘황찬란한 한페지를 장식하는 전국축구갑그리그 우승이란 전과를 올리게 된다.

또한 그해 박만복감독은 허경수, 정종섭, 당봉상(한족), 김정식, 리두근, 류명복 등 6명 선수를 국가팀에 수송했을뿐만아니라 지운봉, 정지승, 동경춘 등 10여명의 축구건장도 육성해냈다.

앞줄 왼쪽 세번째 박만복

박만복원로의 감독생애를 통털어 가장 눈부신 전성시기였다. 1966년 박만복은 과감히 감독직을 내놓고 어린 선수 양성에 나선다. 연변 각 지역을 돌며 30여명 선수(중소학교)를 모집했다. 훈련을 시작한지 한달도 못돼 중국대지에는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축구팀은 허울뿐이고 완전 마비상태였다.

문화대혁명의 가장 거센 폭풍우가 지나가자 박만복원로는 1971년 재차 길림성청년 3팀을 조직, 이 팀은 1973년 전국축구청년련맹전에서 4등이란 영예를 지니게 되였으며 그 시기에 렴승필, 리승범, 전석기, 우근화, 리호은 등 많은 우수한 선수들을 육성해냈다. 박만복은 1973년부터 1978년까지 주체육운동위원회 주임으로 있었다. 1982년에는 국제축구련맹 중급축구강사로 되였으며 1987년에는 국가체육영예상을 받아안았다. 1989년에는 북경시체육영예상을 수상하였으며 체육 언론매체에 많은 평론과 문장을 발표해왔다.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악수

한편 감독생애를 거치면서 박만복원로는 도합 100여명의 우수한 선수와 10여명의 건장을 육성, 이는 중국축구 특히 우리 민족의 축구발전사에 있어서 거룩한 업적이 아닐수 없다.

조선족축구친목회 창설에 《구심적역할》

1981년 박만복은 초청으로 흑룡강으로 가 흑룡강성축구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근 10년간 흑룡강성팀의 축구팀을 이끌었다. 20세기 80년대에 이르러 중국축구의 발전템포가 빨라짐에 따라 조선족축구는 그 보급과 발전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에 당시 국가체육운동위원회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갖고있던 박만복원로는 사명감을 안고 중국조선족축구친목회 구상에 나섰다. 1988년 박만복과 그 시대 축구인들의 노력으로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국가체육운동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국가민정부에 등록된 국가 1급 체육사회단체(국내 55개 소수민족중 유일한 체육단체)인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가 세상에 고고성을 울릴수 있었다. 당시 박만복은 국가민정부에만 10여차 다녀왔다고 한다. 친목회가 설립된후 박만복은 직접 회장직을 맡고 많은 사업을 추진했다. 우선 동북3성 각 지역에 친목회사업위원회를 설치하고 회원들을 적극 발전시키는 한편 200여차에 달하는 축구 지도 및 심판원 양성반을 조직해 조선족축구발전의 템포를 다그쳤으며 근 1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 청장년과 소년아동들을 축구운동에 참여케 했다. 또한 회장으로 있던 나날 중국조선족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전국 조선족축구경기대회를 5차에 걸쳐 조직했으며 경기때마다 한국축구련합회 소속의 여러개 팀들을 초청하여 경험교류를 했다. 축구친목회가 걸어온 자욱마다에는 창시인의 한분이신 박만복 전임 회장의 로고가 력력히 슴배여있다.

제5회 세계청년련환절 개막식축구경기(왼쪽 첫사람)

은퇴뒤에도 축구에 대한 미련 못 버려

10여년간의 축구친목회 회장생활을 접은 뒤에도 박만복원로는 축구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 사영축구학교인 연길시장백축구학교를 세우고 축구후비력육성에 나섰다. 학교를 세운 목적은 각종 원인으로 기회를 놓쳐 체육학교 같은 곳에 가지 못한 축구인재를 받아들이고 키워주자는것이였다. 하지만 연변의 청소년축구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연길시장백축구학교도 얼마 못 가 문을 닫게 된다.

인터뷰도중 자연스레 현 연변축구에 대한 화제로 이야기가 오고갔다. 박만복원로는 《현재 연변에 축구밑거름이 없다》고 짚어말했다. 이어 그는 《지금 연변에는 고급축구인재가 거의 없고 자금이 결핍하고 지도일군들의 중시가 부족한것이 연변축구를 춰세우기 힘든 객관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연변축구를 장원한 안목에서 바라보고 이를 결책하는 사람이 없고 시대에 맞추어 관념을 전변하려는 의지가 없는것에 대해 그는 매우 안타까와하고있었다.

중국국가팀 시절(오른쪽 뒤줄 첫사람)

박만복원로는 연변축구에 대해 자신이 이렇다저렇다 말할 처지는 안되지만 원로로서, 연변축구의 흥망성쇠를 견증한 축구인으로서 한마디 한다면 《청소년축구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그 열쇠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축구인 뒤에는 화목한 가정이 있었다

박만복원로가 걸어온 축구인생에서 동반자 김숙자녀사를 짚지 않을수는 없다. 남편의 험한 축구인생의 길을 한결같이 따라온 녀인이다. 연길시제2고급중학교 어문교원으로 퇴직한 김숙자녀사는 현재도 주로년대학에서 영어공부를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한편 남편내조를 끔찍이 잘해주고있었다. 일찍 부모를 여읜 박만복원로는 현재도 안해 김숙자녀사(1937년생)와 함께 숙모(91세)를 45년째 모시고있다.

박만복원로는 슬하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한국 로무길에 올랐고 딸은 현재 한국에서 중국어학원을 운영하고있으며 작은 아들은 주총공회에서 사업하고있다.

안해와 자식들은 박만복원로에게 《이제 그만 축구에 대해 생각하고 신체나 돌보며 건강하게만 살아달라》고 부탁을 한단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되는 모양이였다. 지금도 종종 원로축구팀의 행사에 초청을 받고 경기를 구경하는 한편 그들과 어울려 술도 기분좋게 마시고있다…

금후의 타산에 대해 박만복원로는 《아직 몸이 건강하고 사유도 명석하기에 앞으로 몇년은 문제없는바 자신의 축구력사를 기록해 자료로 남기고싶다》고 밝혔다.

중국축구 및 우리 민족 축구발전을 위해 힘차게 일해온 원로—박만복선생이 걸어온 발자취마다에는 그렇게도 자랑찬 긍지로 주렁져있었다.

사진 글/허연화 리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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