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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8.1팀의 주력 윙포드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1월28일 15시02분    조회:8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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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박광철

뒤늦게 공개하는 축구운동건장의 인생발자취  

[길림신문 2011-11-28 김룡 기자] 60년대 8.1팀의 주력 윙포드─박광철


소꿉시절부터 축구인의 꿈을 무르익혀
박광철은 1936년 11월 14일 도문시교의 농민가정에서 2남1녀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집안은 째지게 가난한 빈농가정이였다. 박광철이는 어린 시절부터 삼촌의 영향으로 주먹만한 고무공을 차면서 축구에 재미를 붙혔고 소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학교축구팀의 기둥선수로 활약했다. 초중졸업하여 연변한어사범학교에서 1년간 학습하면서 축구기술을 단단히 다졌다.
1954년 박광철은 도문제재공장축구팀에 들어갔다. 축구팀에 들어간지 불과 몇달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에 축구장을 펄펄 날아다녀 공장 령도들의 눈을 확 뒤집어놓았다. 1955년 그는 도문제재공장선수로 동북제재공장분야 축구경기에 참가해 우승을 일궈냈다. 곧바로 당시 연길현축구팀 마금춘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1956년 연길현축구팀의 일원으로 10월 27일부터 11월 7일까지 북경에서 펼쳐진 전국 8개 현 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연길현축구팀은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당시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 하룡원수의 접견을 받고 기념사진을 남기는 영광을 지녔다.

1961년 12월 윁남 방문을 떠나면서(웃줄 오른쪽 네번째 박광철).
1957년 박광철은 연변청년팀일원으로 7월 28일부터 8월 15일까지 천진에서 펼쳐진 전국 12개 단위 청년축구경기에 참가, 팀은 2등의 성적을 거뒀다. 1958년 연변축구팀에 입선된 박광철은 전국을급련맹경기 연변경기구 분조경기에 참가했다. 분조경기서 연변축구팀은 1등을 따냈다.
1958년 6월 1일, 축구선수의 전성기를 보내던 박광철은 중국인민해방군 동북군구축구팀(심양부대팀 전신) 선수로 선발되며 군인의 길을 걷게 되였다. 1959년 박광철은 동북군구축구팀(갑급팀)의 주력멤버로 중국인민해방군운동회에 참가하여 팀이 축구경기에서 1등을 따내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1960년 6월, 박광철은 당시 갑급팀 강팀이였던 해방군성년팀(8.1팀•북경)에 전근되여 주력선수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박광철은 8.1팀에서 주력 윙포드(변선 공격수)로 10년간 그라운드를 누비게 된다.
8.1팀에서 《황금기》 축구운동건장 칭호도 수여받아
1960년 12월, 시골촌놈 박광철은 주은래총리의 친절한 접견을 받는 행운을 갖게 된다. 박광철옹은 이때를 자신의 체육사업중 가장 잊을수 없고 영광스러운 시기였다고 회고하고있다. 당시 박광철은 중국-버마 친선대표단(축구, 무술, 영화, 가무, 불교 등 분야의 400여명 성원으로 구성) 일원으로 뽑혀 버마(먄마)를 출국방문했다. 친선축구경기를 마치고 중국-버마친선대표단 총단장이신 주은래총리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다.

1963년 12월 윁남 하노이에서 열린 사회주의국가군대축구대회 개막전에 호지명주석이 각 나라 선수와 단장들을 접견.(맨우 왼쪽 첫번째 박광철).
1963년, 박광철은 8.1팀의 선수로 윁남에서 진행된 사회주의나라 군인축구경기에 참가했다. 축구선수로 근무하는 기간 박광철은 구쏘련, 윁남, 버마, 캄보쟈, 조선, 레바논, 인도네시아, 브라질, 알바니아 등 나라의 선수들과 친선경기를 펼쳤으며 8.1팀을 대표해 10여차의 출국방문경기에 참가했다.
8.1팀 감독들의 사심없는 지도와 배려로 기본기술, 신체자질, 전술의식 등 면에서 빠른 제고와 발전을 가져온 박광철은 강행돌파가 특기였던 재주를 맘껏 뽐내며 감독과 부대 책임자 및 광범한 축구팬들의 찬사를 자아냈다. 1963년 3월, 박광철은 영광스럽게도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축구운동건장칭호(당시 8.1팀에서 단 2명이 축구건장칭호를 수여받았음)를 수여받았다. 연변조선족축구운동사에 따르면 지난 세기 60년대 배출된 전국 조선족축구건장들로는 정지승, 동경춘, 허경수, 박장수, 박광철, 전룡호 등 6명이뿐이다.

1958년 연변팀 선수들이 경기에 앞서 연변주 지도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장면(악수하고 있는 박광철선수).
1964년 6월 20일, 박광철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박광철은 8.1팀의 맹장으로 활약하며 300차의 국내경기와 50여차의 국제경기에 참가했다. 당시 길림성축구팀 감독들의 눈에 들었지만 부대 령도들의 기대를 저버릴수 없어 8.1팀에서 축구인생의 고봉기를 이어갔다.
국가청년팀 감독기회를 마다하고 고향으로 은퇴
1969년 말, 당시 력사조건으로 말미암아 8.1팀이 해산되였다. 조직에서는 8.1팀에서의 10년 공로와 그의 재능을 충분히 인정하고 국가청년팀 감독으로 배치했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형편에서 몇달간의 심리갈등을 거치고 나중에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박광철은 3살에 아버지를 여의였고 형님은 1951년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했다가 희생되였다. 박광철은 1962년 8.1팀 선수시절 결혼했는데 그가 선수생활을 오래 할수 있었던것은 안해 한신옥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기전까지 8년간이나 고부간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다.

1960년12월주은래총리를단장으로하는중국.버마(먄마)친선경기에참가하러가는중국체육축구대표단성원들(앞줄 오른쪽 첫사람 박광철).
귀향후 대중스포츠를 위해 동분서주
고향에 돌아와서 도문철도분국체육판공실주임으로 배치받은 박광철은 군인의 단호함과 근면성으로 사업을 깐지게 밀고나갔다. 수년간 군중성체육사업을 착실히 틀어쥔 결과 도문철도차량단과 도문철도공무단이 전국철도계통 체육선진단위로 평의되였다. 년초에 계획을 깐지게 짜고 년말에는 년간사업을 전면적으로 총화 하였으며 또한 달마다 축구, 롱구, 배구, 륙상, 탁구, 바드민톤, 바둑, 장기, 라지오체조 등 운동경기를 계획적으로 조직했다. 그가 조직한 허다한 경기는 많은 아마추어선수들이 참여할수 있어서 종업원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1960년 12월 버마(먄마)친선경기에 참가하러 떠나면서.
박광철주임은 이러한 일련의 사업들을 추진하는 한편 도문철도분국의 우세종목인 축구운동을 힘있게 틀어쥐였다. 1974년에는 길림성 제7회 체육운동회 축구경기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면서 사회조 1등을 이끌어냈고 1981년 7월에 전국철도계통 축구경기에서 도문철도분국팀 감독 겸 선수로 뛰여 우승을 일궈냈다.
1986년과 1992년 박광철주임은 중국철도부체육대표단 일원으로 조선평양방문 임무를 원만히 수행해냈다. 1996년에는 중국철도부 체육협회의 초빙을 받고 철도부축구팀 감독으로 팀을 이끌고 전국 제3회 로동자운동회 축구경기에 참가했다. 박광철주임은 1992년에는 영광스럽게 전국철도계통 체육사업선진개인으로 선정되는 큰 영예를 받아안았다.

8.1팀에서의 23세 박광철.
만년에 생활체육활성화에 크게 기여
축구원로 박광철은 1996년 12월에 사랑하는 일터를 떠나 정년퇴직했다. 퇴직후에도 그는 도문 생활체육활성화를 위해 동분서주의 나날을 보냈다. 도문시테니스협회 회장사업을 10년간 해오면서 테니스운동 보급에 앞장섰고 73살까지 도문시원로축구팀 감독사업을 맡아 하면서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에서 조직한 수차의 전국조선족축구경기에 참가했다.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 리사, 고문 사업을 하는 기간 도문철로2중 등 학교의 축구선수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수명의 선수를 상급부문에 수송하기도 했다.
현재 박광철옹은 테니스운동으로 만년의 건강을 챙기고있는데 도문시테니스운동사를 집필중이다. 축구운동건장 그의 황혼인생은 축구와 테니스와 더불어 찬란한 저녁노을마냥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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