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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2월7일 09시17분    조회: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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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리훈

연변대학 예술학원 리훈박사의 이야기


      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표현학부 주임으로 사업하고있는 리훈은 연박한 지식과 과학적인 방법론, 끈질기게 진리를 탐구하는 정신 그리고 강인한 의력과 분투정신을 가진 학자이다. 그가 박사학위론문으로 내놓은 학술저서 《중국조선족공연단체에 대한 음악사회사적연구》(이 저서는 2005년에 연변대학으로부터 우수도서로 평의받았고 2009년에는 진달래문학상을 수상하였음)는 중국조선족공연단체의 활동과 작품에 대한 연구의 폭을 넓히고 연구에서의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연변음악사를 정확하고도 전면적으로 펼쳐냈다. 하여 이 저서는 2004년 12월 14일에 한국 서울대학교 대학원의 심사와 답변을 거쳐 통과되였고 리훈은 서울대학교가 양성해낸 중국조선족의 첫 문학박사(음악학)로 되였다.
      리훈은 문학박사로 되기까지 길고긴 배움과 탐구의 나날을 보냈다. 그는 중국교육단계 즉 소학교, 중학교, 고중, 중등전문학교, 대학전문학원, 대학본과, 석사, 박사까지 전부의 과정을 모두 거쳤는데 그중에서 석사는 연변대학 문학석사와 한국서울대학교 대학원 음악학석사를 마쳤다. 리훈이 공부와 이렇게 긴 인연을 맺게 된데는 끝없는 학구열외에 그가 처한 당시의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960년 8월 21일, 룡정시의 한 간부가정에서 6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리훈은 온 가정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동년시절에 리훈은 집체호에 내려온 지식청년으로부터 혁명적본보기극을 배우게 되였는데 아주 재미있었다. 이것이 그가 예술에 관심을 보인 첫걸음이였다. 소학교, 중학교시절에 그는 학교의 선전대에서 독창을 하면서 많은 공연에 참가하였고 크고작은 콩클에서 상을 타기도 하였다.
      룡정고중에 입학한 리훈은 가무극 《반짝이는 붉은별》에서 주인공 반동자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여 동창생들이나 선후배들은 지금도 리훈을 만나면 “반동자”라고 친절하게 불러준다. 하지만 그때 리훈의 심리에 변화가 생겼다. 독창가수보다 뒤의 악대가 더 멋있고 부러웠던것이다. 하여 그는 룡정시문공단 강영로선생으로부터 플류트를 배웠다.  
      1978년에 리훈은 고중졸업을 앞두고 학교선전대동학들과 함께 연변예술학교시험을 보았다. 얼마 안되여 입학통지서가 민정국에 출근하는 아버지의 단위로 날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통지서를 주지 않고 리훈더러 대학시험을 치라고 하였다. 담임선생이였던 김명덕선생이 아버지를 찾아서 “공부를 잘하는데 굳이 중등전문학교에 보내서까지 예술을 시킬 필요는 없는것 같다”면서 “대학입시를 잘 보게 하여 좋은 대학에 보내라”고 권고했던것이다.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대학시험을 보라고 아들을 설득하였고 플류트에 푹 빠진 리훈은 그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부자간에 서로 고집을 꺾지 않을 때 다행히 어머니가 아들편이 되여주었다. 우로 5남매가 다 집체호로 내려가 고생하는것을 본 어머니는 막내아들만은 고생시키고싶지 않았던것이다. 특히 조학금까지 준다는 예술학교에 보내여 편안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플류트를 배우게 하고싶었다. 하여 어머니는 극구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1978년 3월, 리훈은 연변예술학교 기악학부에 입학하여 심용춘선생을 지도교사로 모시고 플류트를 배우게 되였다. 1년이 지난후 학교에서는 진취심이 많은 리훈을 북경 중앙음악학원에 추천하여주었다. 하여 리훈은 나머지 3년을 중앙음악학원의 부원장인 주동덕을 은사로 모시고 배울수 있었다. 아들이 처음으로 멀리 타향으로 떠나서 걱정이 많았던 아버지는 주동덕선생한테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아본 주동덕선생은 소박한 부성애에 감동되였고 아버지의 멋있는 글씨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거기에다가 부지런히 배우는 제자가 갸륵하여 처음을 제외하고 졸업할 때까지 3년간 과외비를 받지 않고 성심껏 배워주었다. 하여 리훈의 플류트실력은 눈에 뜨이는 진보를 가져오게 되였다. 
      북경에서 있은 3년간 6촌누나네 집에서 학교를 다닌 리훈은 그렇다 할 유람 한번 하지 못했고 시내구경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침에 등교해서부터 학교에 붙박혀 공부만 하다가 방과후 집으로 돌아갈 때에야 오늘은 이쪽 길로 래일은 저쪽 길로 두세시간씩 걸어가면서 거리구경을 한것이 고작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걷는것이 그한테는 제일 큰 휴식이였고 눈을 호강시켜주는 시간이였다. 그렇게 3년을 걷다보니 많은 거리를 알게 되는 계기로도 되였다.
      1981년 6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리훈은 그해 9월에 연변사범학원(전과)에 입학하였다. 1년후 그는 학교에서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진음악학원(본과)의 관현악학부에 가서 플류트를 배우게 되였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숙소에서 고독했던 리훈은 부지런히 플류트를 련습하는것으로 고독을 달랬고 따라서 그의 플류트연주실력은 일취월장하여 1985년에 있은 전국플류트콩클에서 표현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안았다.


      1984년 7월에 리훈은 연변사범학원을 졸업하고 연변예술학원의 교원으로 초빙받았다.
      1986년 6월, 천진음악학원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였던 리훈을 학교에 남길 의향을 내비쳤다. 이를 눈치챈 연변예술학원에서는 학교측에 “소수민족인재를 파가지 말아달라”는 의견을 제기하였고 리훈 또한 고향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게다가 막내아들이 천진에 남을수 있다는 소문을 들은 어머니가 쇼크하는 바람에 리훈은 졸업하자마자 귀향길에 올랐다. 26시간이나 쇼크상태에 빠졌던 어머니는 리훈이 손을 만지면서 “어머니, 막내아들 리훈이 돌아왔습니다”고 인사를 하자 기적같이 쇼크상태에서 깨여났다.
      1986년도부터 정식으로 연변예술학원에서 플류트교수를 맡은 리훈은 자신이 배운 지식을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전수해주었다. 그가 양성한 학생들중에는 일본, 한국, 로씨야, 오스트랄리아로 류학을 간 학생들도 있고 중앙음악학원, 상해음악학원, 중앙민족대학 등 중점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도 많았다. 한편 자신 또한 국제, 국내 무대에서 플류트연주실력을 선보였는바 대중형공연에만도 100여차 참여했다. 1993년부터 음악학부 부주임을 맡아하면서도 학문에 대한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은 리훈은 《플류트기교연구》, 《음악연주의 심미적 마음에 대하여》 등 우수한 론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96년 9월에 리훈은 연변대학 연구생시험에 합격되여 채미화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문학석사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로 음악과 문학에 미학적 공통점이 많은 점을 감안하여 미학방면에 대해 많이 탐구하였다. 하여 그가 졸업론문으로 쓴 《장단엮음에 대한 예술특징연구》는 조선민족의 원초의식과 음악언어를 결부시켜 쓴 론문으로는 처음이여서 많은 호평을 받았다.
      1999년 7월의 어느날,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리훈은 스승이였던 김관웅, 허휘훈, 채미화 등 교수들과 모임을 가졌다. 한담중에 김관웅선생이 리훈에게 “음악이 철학적사유를 반영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가?”고 질문했다. 물론 “음악이 철학적사유를 반영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어째서?”를 해석할수 없었다. 그날 여러 교수님들이 “음악적으로 더 깊이있는 공부를 해보는게 어떤가?”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교수님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리훈은 결국 한국류학을 선택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서울대학교 대학원 음악학석사연구생에 입학하게 되였는데 그때로부터 고된 류학생활이 시작되였고 이는 2005년에 음악학박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계속되였다.
      서양음악과 조선언어문학은 대학과 연구생 시절에 배웠기때문에 그래도 일정한 기초가 있다고 할수 있지만 조선민족음악은 처음으로 접하는 분야였다. 그것도 한국 최고학부인 서울대학에서 기초부터 닦는다는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 아닐수 없었다. 기초지식을 쌓으려면 장소나 때를 가릴것 없이 짬만 나면 책을 보아야 했는데 매일 왕복 3시간이상 타는 지하철은 그가 제일 많이 리용하는 독서장소였다.
      지하철에서의 책읽기는 기초지식을 쌓는데는 그래도 많은 도움이 되였지만 론문제목이 확정된후에는 그 상황이 달라졌다. 생각이 깊어짐에 따라 내려야 할 전철역을 지나치는 경우가 잦아졌던것이다. 감히 택시를 타지 못하고 막차를 타는데 정차역을 놓치면 걸어서 되돌아올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종점인 창동역이 리훈이 내릴 수유역과는 두정거장거리밖에 되지 않았기에 반시간을 걸으면 집에 도착할수 있었다. 이런 일이 몇번 반복된후에는 아예 생각날 때 몇정거장 먼저 지하철문옆에 서서 내릴 때를 기다리군 했다.
      학습에 대한 압력은 몸속 깊이 배여들었다. 주제발표회가 있는 날이였다. 리훈이 잔뜩 시름에 겨워 등교준비를 하고있는데 동창생한테서 교수님이 출장을 떠나 오늘수업이 취소되였다는 통지가 왔다. 듣던중 기쁜 소식이였다. 수업을 하지 않아 한시름 던것은 물론이고 그간에 몰렸던 피곤을 풀수 있게 휴식시간을 공으로 얻은 기분이였다. 리훈은 한잠 푹 자고 정신차리려고 이불을 펴고 누웠다. 근데 갑자기 감각으로도 느낄수 있을 정도로 삽시에 열이 오르더니 온몸이 불덩이가 되고말았다. 서랍에 약이 있는것까지는 생각나는데 몸이 전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가까스로 일어나 안궁환을 먹었다. 잠간사이에 덮고있던 이불이 흠뻑 젖었고 입술에 단통 물집이 생겼다. 리훈은 자신처럼 마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많은 땀이 있다는것에 깜짝 놀랐다. 그날이후로 학기말마다 꼭꼭 같은 증상이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공부몸살”이였던것이다.
      류학생활에서 힘들었던것은 공부뿐만이 아니였다. 국내에서 리훈은 중등전업과 대학 및 석사연구생에 이르기까지 전부 조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류학은 자부담이였으며 얼마 안되는 로임마저 끊긴 상황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한다는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였다.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학비는 한학기에 420만원(한화), 일년이면 840만원(한화)으로서 웬만한 회사원의 1년 로임에 맞먹었다. 공부에 빠져살다보니 첫학기를 방금 시작한것 같았는데 어느새 또 학비고지서가 날아왔다. “어떻게 해결할가?” 무거운 마음으로 겉봉을 뜯어보니 정액장학금으로 결제되여있었다. 리훈은 너무나 흥분되여 한달음에 지도교수의 사무실에 달려가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지도교수는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학과에 가보라고 하였다. 학과사무실에 가서 알아보았더니 성적에 따라 자동결제된다는것이였다. 그동안 악착같이 공부한 보람이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날듯이 가벼웠다. 리훈은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어야 한다. 받았으니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지하철에서 만난 불우이웃마다에게 1000원(한화)짜리 한장씩 나누어주었다. 학교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이였다.
      서울대학교의 규정에 따르면 정액장학금은 한사람에게 한번의 기회만 있었다. 하지만 리훈은 학교의 규정과 상관없이 총 열번의 학비에서 여섯번을 정액장학금으로 면제받았다. 힘들게 그러나 악착같이 버텨내는 한 류학생에 대한 서울대학교의 사랑의 힘이 규칙을 뛰여넘었던것이다. 비록 학교측의 보살핌으로 여섯번은 학비를 면제받았지만 리훈한테 있어서 나머지 네번의 학비는 역시 부담거리였다.
      안해가 공부뒤바라지를 해준다고 한국에 와서 고생을 하고있지만 리훈도 방학이나 휴식때면 학비에 얼마간이라도 보태려는 일념에서 일거리를 찾아했다. 한번은 친척의 소개로 장갑회사에서 일하게 되였는데 칼로 장갑부분품을 뜨는 일이였다. 그때까지 리훈은 멋있는 붓놀림은 본적이 있어도 그렇게 자연스럽고 재치있는 칼놀림은 본적이 없었다. 모두가 달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였다. 그러한 환경에서 그것도 플류트연주를 위해서 손을 아껴가면서 작업하는 리훈의 손놀림은 서툴기 그지없었다. 얼마후 다시 장갑상표를 찍는 일을 하게 되였는데 그 일만은 사장의 마음에 퍽 들게 하여서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 사장이 총화연회까지 열어주었다. 
      토요일이면 플류트보도도 하였다. 전직교수가 아니였기때문에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학생을 가르쳐야 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역에서 저 역으로 헤매다니면서 점심은 화전역에서 붕어빵 3개를 먹으면서 뛰였고 저녁은 의정부역에서 순대 한접시를 먹으면 그만이였다. 아침에 문을 잠그고 돌아선후 그대로 뛰였으며 지하철계단은 하나씩 밟을 때가 거의 없었다. 
      늘 헤매면서 공부하고 일하다보니 밥 한끼 제대로 갖추어놓고 편히 앉아서 먹어본 일이 적었다. 이런 리훈에게 뷔페를 먹을 기회가 차례졌다. 한학기가 끝나자 서울대학교와 중국대사관에서 장학생들을 조직하여 판문점과 대전박람회를 참관시켜주었다. 저녁은 대전에서 지내였는데 오랜만에 고급스러운 호텔에서 뷔페를 먹게 되였던것이다. 리훈은 오랜만에 군이 뚝 떨어지게 먹을수 있게 되였다고 쟁반에 한가득 맛있는 음식을 담았다. 먹다보니 모자랐다. 그런대로 다시 한쟁반 담고와서 먹었는데 그래도 배가 차지 않았다. 세번째로 다시 가자고 하니 눈치가 보여 쑥스러운대로 과일을 담는 접시에 다른 음식까지 담아와서 깨끗이 비운 다음에야 숙소에 돌아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숙소에 와서 자리에 눕자 또다시 배가 고파났다. 그동안 속이 얼마나 허했을가 하는 생각에 고향의 따뜻한 밥상이 그리워났다.
      2005년 2월에 리훈은 모든 과목 A학점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가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마칠수 있었던것은 가족의 따뜻한 손길과 힘찬 응원이 있은 덕분이였다.
      리훈이 류학길에 오른 이듬해에 민족의학연구소에 출근하던 안해 박명옥은 남편의 뒤바라지를 해주기 위해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고달픈 한국행을 결심했다. 당시 12살인 딸 리선화를 외할머니한테 맡기고 떠나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남편의 그 아름찬 학비를 벌려면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한국에 가서 하루에 13시간씩 식당에서 일을 하기 너무 힘들었지만 언제 한번 얼굴을 찡그린적이 없는 안해였다. 그렇게 억척같이 일한탓에 팔에 무리가 와서 지금은 어지간히 무거운것도 들기 힘들 정도이다. 다행스럽게도 딸애는 일찍 셈이 들어 부모의 고생을 리해해주면서 무탈하게 잘 자라주었다. 거기에 40고개를 넘어서 한국에서 본 늦둥이 아들 리광연 또한 온 집식구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였다. 사실 중국에서 외동딸만 키우다가 한국에 가서 집집이 아이 둘이상 키우는것을 보니 은근히 부러웠다. 그래서 늦게나마 자식계획을 세웠는데 바라던대로 귀염둥이 아들을 보게 되였던것이다. 아무리 힘들다가도 아들을 보면 힘이 솟았고 웃음이 절로 났다. 오누이는 모두 아버지의 유전을 받아서인지 음악적재능이 있었다. 딸애는 연변예술학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현재 소학교 3학년인 아들 또한 피아노를 배우고있는데 아주 감성적이다.
      귀국후 리훈은 연변예술학원 음악학부 부주임으로 사업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정력을 몰부었다. 그는 중등전문학교와 본과생들에게 플류트를 가르치는외에 석사생들의 지도교사로 조선음악사, 조선민족음악연구, 음악사회사, 소수민족음악사를 가르쳤다. 이미 4명의 석사생을 졸업시킨 그는 현재 8명의 석사생의 지도교사를 맡고있다. 이렇게 바쁜 나날에도 그는 끈질기게 학술연구를 계속하여 국내외학술회의에서 선후로 《락양춘연구》, 《밀강향퉁소음악의 미적근거》, 《산조연구》 등 깊이있는 론문들을 수십편 발표하였다.
      2010년에 연변예술학원 음악표현학부 주임직을 맡은 리훈은 “우리 조선족들은 음악감, 표현력이 뛰여나다. 이런 우리 민족의 우세를 리용하여 좋은 예술인재들을 많이 발굴하고 양성하고싶다”면서 앞으로의 타산을 밝혔다. 이외에도 그는 “조선음악사를 정리해놓았는데 거기에 따른 악보와 록음도 정리해놓아야 한다”, “현재의 음악표현전업을 연변대학의 특색전업으로 만드는것 또한 꼭 해야 할 일이다”, “교내 지도교원과 학생들을 우수한 학원이나 한국에 연수보내는것 또한 홀시할수 없는 일이다”, “학원에 음악자료실, 음향자료실도 하루 빨리 꾸리고싶다” 등 자신이 해나가야 할 여러가지 계획들을 밝혔다.
      리훈주임이 끊임없는 분투정신으로 자신의 계획을 차곡차곡 실행해나가는 한편 그 자신 또한 더욱 높은 학술의 고봉에 오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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